작은 도시에서 꽃가게를 하는 남자가 있었다. 늘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손님을 맞으며 꽃다발도 센스 있게 만들 줄 아는 그 남자를 좋아한 여자가 있었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때로는 도시를 벗어나 밤을 함께 새우는 여행도 다녔지만 남자는 결혼식 때까지 지켜주고 싶다며 여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요구한 것은 혼인 신고였다. 여자는 이런 남자를 만난 것이 행복했다.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 여자는 남자의 발목에 채워진 전자발찌를 보았다. 소름이 돋는 끔찍한 충격이었다. 남자가 그동안 보여준 모든 이미지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여자는 왜 혼인 신고부터 하자고 했는지도 비로소 이해했다. 남자가 여러 말로 자신을 용서하고 믿어달라고 했지만 여자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고 사기로 인한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혼인 신고도 마쳤고 결혼식도 치렀으니 그냥 부부로 살면 안 될까? 아니면 없었던 일로 하고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까? 여자가 다만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일까? 남자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굳은 결심을 한다면 사라질 수 있는 문제일까? 그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면 어떨까? 답을 쉽게 내기 어려운 듯 보인다.
잠언은 말한다.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잠 21:8) 그의 범죄로 그가 걷는 길이 크게 구부러졌다는 증거는 일부러 찾지 않아도 가득하다. 대중목욕탕에 갈 수 있었을까? 수영복이나 반바지를 입을 수 있으며 마음 편하게 옷을 걷어올릴 수 있었을까? 발을 꼬고 앉고 싶을 때 어떤 발을 들어야 할까? 가벼운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어김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요, 덮이는 옷을 입었을 때도 자기 눈에 숨겨지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남들은 모르는 제약 속에서 살아왔을까?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대폭 줄어든 그의 삶의 불편한 매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 작은 물건 하나로 몸도 마음도 마치 목줄이 묶인 개와 같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팩트는 그는 성범죄자요 법의 판결을 따라 전자발찌를 찬 사람이라는 점이다. 성적 충동에 의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요, 자신도 제어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입증된 사람이다. 죄에서 돌아서라는 충고나, 양심의 소리도 가인처럼 무시했을 만큼 완고한 사람이다. 죄를 거듭 범한 결과로 더 큰 범죄도 가능해진 자요, 우발적인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는 자다. 그런 결과로 또 다른 범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아내가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두 사람의 문제는 용서나 사랑이 아니라 ‘결혼’에 대한 것이다. 평생 먼 길을 함께 갈 동반자를 선택하는 문제다.
아들러는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완전히 고립된 자신 만의 문제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누구나 일정한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끈이란 첫째, 우리들이 우주 안의 특정한 장소에 살고 있고, 우리 환경이 갖고 있는 한계나 가능성을 근거로 발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타인들 사이에 살고 있으며, 그들에게 동조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 자손의 미래는 이 두 가지 성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로 보기 쉽다. 사랑에 빠진 남녀라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결혼은 두 사람이 살아갈 물리적인 환경과도, 그로 인해 맺게 될 가족이나 이웃과도, 더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하나로 연결된 일이다. 두 사람의 결혼은 사는 곳과, 관계 맺고 있는 이웃들과, 태어날 자녀들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
자신이 지은 죄로 법의 심판을 받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본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의 가족이나 이웃에게, 태어날 자녀들에게 권하거나 요구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심하게 구부러진 그의 삶도 반듯하게 펴질 수 있을까?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뱀이 우유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고 우리의 의가 되어 주셔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 때 죄인 중의 괴수인 바울도, 방탕한 삶을 살았던 어거스틴도, 그 밖에 이 땅에 살다 간 무수한 죄인들도, 지금의 우리도, 구부러진 내 앞의 길이 반듯해지는 것을 보며 기뻐했다. 감사하고 감격했다.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죄와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환영할 때 경험하는 비밀이다. 그 길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은 그 길을 걸어본 사람만 아는 비밀이다. 아무것도 묶어놓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자유다. 주님은 그 자유를 주고자 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그 자유를 경험으로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묶는 삶이 아니라 풀어주는 삶을 살게 하신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허락하신다. 아들을 통해 노아의 홍수보다 더 큰 긍휼과 사랑으로 온 세상을 덮으신 이유다. 피할 길을 내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