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 대한 소고(小考)
황 정 현
눈물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의 배설이다. 종적 횡적으로 연결된 감정의 기폭에 따라 자각적 격정과 순수로 표출되는 눈의 액체가 눈물이다. 삶의 행로에서 감정 개입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면,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자기 방어의 치밀한 보호막을 눈물로 치장하는 일이 흔하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한 방울의 눈물로 하여 공격의 예봉을 꺾고 눈물 밑에 숨어있는 의도를 이해하려고 잠시 숨을 죽인다. 심신을 조여 오는 압박이 극에 다다르면, 인간은 누구나 그 극단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친다. 지치고 가눌 수 없는 상황에 서광이 비치거나 필사적인 몸부림을 어루만지는 사랑의 손길이 자신에게 머물면 눈물을 쏟는다. 감정이 격하면 눈물이 폭포수가 된다. 어린이도 성인의 여자도 남자도 칭얼거리며 눈물을 흘린다. 감정의 호소와 쌓인 한의 배출을 눈물에 엮어 자신을 드러내며 연출하는 방어기제는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이런 의미로 눈물에는 수없이 많은 감정의 색깔이 있음을 본다.
먼저 드러내야 할 부정적 눈물의 예를 보자. 이성적 감각으로 ‘악어의 눈물’을 상정해보면 위선과 가식이 가득 찬 눈물의 예를 들 수 있다. 필요 이상의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려고 과장된 행동의 무대에 눈물을 동반하는 어느 부잣집 불효자의 눈물, 아름다운 여인을 사이에 두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렸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가식적 눈물, 어느 한 순간이라도 국민을 생각해보지 않은 바 없다며 표를 갈구하는 위정자의 눈물이 그런 예이다. 눈물 자체는 순수하지만 악어의 눈물은 차가운 온도만큼이나 치밀하게 계산된 허위의 자국들로 얼룩진다. 이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면 탐욕스런 대상을 얻기 위한 비범한 표정관리가 몸서리를 칠만큼 철저하다. 악어의 눈물에 속은 세계 역사와 개인 인생사의 그늘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눈물이 연민의 정서에 함몰되어 삶의 주류에 섞인 채, 판단이 흐려진 세파를 추인하는 역사가 여전히 굴러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눈물이 갖고 있는 다면성은 이것만이 아니다.
눈물의 긍정적 요소는 슬픔의 감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거나, 하던 일이 실패하였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병고를 보며, 흘리는 비애의 눈물 속에 슬픔의 춤판이 펼쳐진다. 이런 눈물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기도 하다. 한 두 방울의 눈물에 담긴 무게는 지극히 가볍다. 그러나 눈물에 담긴 감정을 헤치고 들어가면 단순한 무게로 잴 수 없는 유장한 사연들로 가득차서 무겁기 한량없다.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과 진실이 들어나는 몸부림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이런 공감의 정서는 영화나 연극 또는 소설에 종종 등장하여 극적 절정 효과를 이루는데 기여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눈물이 슬픔과 비애에만 등장하여 최루의 누선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 언급한 악어의 눈물 같은 거짓 눈물 외에 몇 가지 눈물샘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 7월 8일’편에 “천고의 영웅이 잘 울었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지만,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을 뿐이지, 소리가 천지에 가득차서 쇠나 돌에서 나오는듯한 울음을 듣지 못하였소.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중에서 슬픔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낼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라고 했다. 요동벌판의 장대한 산하를 보며 정말로 울어볼만한 땅이라고 찬탄했던 연암은 칠정이 울 수 있는 요소에 모두 해당되기는 하나 지극한 정서, 즉 억눌린 요소를 풀어내는 정서가 지극하면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된다는 것이다. 주목해볼 것은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욕심도 슬픔과 동가 항렬에 넣어 눈물을 자아내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원했던 바를 이룬다던가, 치열한 경쟁을 물리치고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의 눈물을 본다. 올림픽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 기쁨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눈물의 씨앗임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연암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다. 더 많은 경계에 이해의 폭을 넓히면, 눈물이 설명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 속에 칠정을 비롯하여 놀람과 공포 그리고 어린 아기의 울음까지 포섭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울음의 눈물로 시작하여 울음의 눈물로 마감하는 여정을 볼 때 헤아릴 수 없는 지극한 감정을 일일이 언어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다만 느낌으로 전달되는 공감의식으로 눈물의 세례에 참여하면서 세상의 무대에 선다. 부모 형제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감정과 친구와 나누는 깊은 정리(情理) 그리고 남 녀 간에 나누는 사랑의 행간에 눈물의 공리적 역할은 무궁무진하다.
서양 속담과 명언에 눈물에 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눈물로 씻어지지 않는 슬픔은 없다. 땀으로 낫지 않는 번민도 없다. 눈물은 인생을 위로하고 땀은 인생에게 보람을 준다.(서양격언) 여자의 눈물은 눈의 가장 품위 있는 언어다(헤리크. 영국 서정시인), 눈물은 슬픔의 말없는 슬픈 언어다.(볼테르), 아내는 세 가지 종류의 눈물을 갖고 있다. 괴로움의 눈물, 초조의 눈물, 그리고 체념의 눈물이다.(네델란드 속담), 만일 이 세상이 눈물의 골짜기라면 미소는 거기에 뜨는 무지개이다.” (다트리) 눈물은 입이 말할 수 없는, 마음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하나하나 설명하기보다 그냥 흘려버리고 나면 시나브로 시위가 끝난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 텍쥐페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보석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문장가 심노숭이 말한 ‘눈물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이렇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 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이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 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로流路일진데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김영진 역. 태학사. 2006>
심노숭이 말한 눈물의 흐름이 감정이입의 결과로 어떻게 심신 사이에 서로 관계를 맺어서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는지 신랄하게 묻고 따지고 있다. 눈물의 내적 욕구가 체화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과정 속에 물음의 답이 나온다. 그러나 모두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정곡을 찌르는 심오한 뜻이 있다. 묻는 질문에 답이 있고 답 속에 질문이 있는 눈물의 정서 설명은 마음이 지극하고 격해 있을 때 온 몸에 울려 퍼지는 애련한 교향악 같은 느낌이 든다. 동정과 연민의 감정에 눈시울을 적시는 심신의 반응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질서와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파토스(애절감, 비애)를 우리 몸이, 눈이, 시현할 때 감각의 신비를 체험한다.
웃음이 세계를 관통하는 언어가 되듯 눈물도 아픔과 슬픔 또는 어떤 간절한 욕구를 전달하는 세계의 언어가 된다. 눈물의 파토스에 한 인간의 생애를 가로지르는 명예와 영광 그리고 삶의 고뇌가 스며있다. 그러므로 눈물은 또 다른 우리네 삶의 표정이며 연출이고 충실한 언어 감각을 전달하는 중요한 소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남을 위해 흘리는 순수한 눈물의 세계, 동체자비同體慈悲의 눈물이 생 텍쥐페리의 보석과 같음을 깨치고 그런 세계로 갈 수 있는가의 여부는 우리 삶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