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산책길에 아내에게 삶의 목표가 뭐냐고 물었더니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요.”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목표는 없느냐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더 간단하다. ”없어요!”
오늘 아침 잠언을 읽으며 그 대답에 담긴 지혜를 보며 놀란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 31:10-12)
평생에 칭찬받을 아내의 일은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평생에 칭찬받을 남편의 일은 아내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할지라도 배우자에게 선이 되지 않고, 악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아내는 남편과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이요, 남편은 아내와 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부부 관계가 아니면 사용될 일이 없다. 한 남자나 한 여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이름, 그만큼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배타적인 이름이다. 자신이 아내라면 곁에 배우자가 있든 없든 방향은 오직 하나임을 상기시켜 주는 이름이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과 여’라는 한국 영화가 있다. 아이를 캠프에 참가시키기 위해 핀란드를 찾은 유부남과 유부녀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먼 곳으로 갔기 때문에 아내나 남편이 슬퍼할 일을 해도 되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일이면 선악을 벗어난 일이 되는가?
천만명이 넘게 해외노동자로 떠난 필리핀이다. 그중에는 가정을 두고 떠난 배우자가 많다. 남은 배우자는 본국에서, 떠난 배우자는 해외에서 몇 년씩 산다. 배우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믿음을 주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매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매일 가족들의 일상을 나누는 것이 서로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줄 노력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필리핀 사회 문제의 진원지는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한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는 대신에 누군가의 남편이요, 아내라는 인식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져 가는가, 아니면 희미해져 가는가?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아내나 남편으로서 위치를 얼마나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한 일이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얼마나 안전하며, 세상은 그 관계에 대해 얼마나 우호적일까?
살아있는 동안에 배우자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이 먼저다. 원양어선을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여러 달, 여러 해 만에 돌아오는 경우라면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서로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기란 어려운 환경이 될 것이다. 배우자를 외롭게 하는 것이나 배우자가 아파서 힘들어할 때 곁에 없어도 괜찮을까?
티브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에 한 부부가 나온다. 서로 떨어져 산 지 14년이나 되어 함께 살기가 어려워졌다. 아내는 남편이 날씨에 미쳐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딸은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색하고 어렵다고 한다. 마침내 남편은 짐을 꾸려 회사 당직실로 들어가지만, 비난은 더 거세질 뿐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결국 아내는 이혼 서류를 내민다. 서로 향한 마음을 점검할 일이 아니라 떨어져 지내는 동안에 서로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했는지를 살필 일이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 거리에 사는 것은 선택 사항인가? 안 보면 물리적 거리만 아니라 마음도 멀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부부는 같은 공간에 호흡하며 생활하는 것이 기본이다. 배우자는 ‘함께’ 있으라고 주신 사람이다. 잠시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게 되면 얼마든지 다른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의 교훈이 아닌가.
돈 버는 것도, 건강한 것도,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집을 깨끗해지고 보기 좋게 정돈하는 것도, 늘 예쁘고 단정한 차림을 유지하는 것도, 자녀를 잘 돌보는 것도, 이웃과 관계가 좋은 것도 모두 다 배우자에게 선을 행하는 한 목표 아래에 이뤄질 때 아름답고 복되다. 잘 꿰어진 첫 단추 아래 나타나는 질서요 평화요 안정이다. 결혼을 제정하신 아버지의 계획이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
바울이 부부가 다른 방에서 자지 말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 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사람은 생각처럼 강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위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 어떻게 제 기능을 할까? 부부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착한 일은 함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고, 새로운 유행이 나타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행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는”(잠 2:17) 것이다. 가위는 짝으로 있을 때만 서로 보호하며 유용하다. 둘을 결합하는 그 못은 사회법이 아니라 우리의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알맞은 짝을 주셨다. 외로워하지 않고 즐겁게 살라고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일을 할 때 그 모든 관계에 아버지의 뜻은 아름답게 이루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