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힘찬 활동과 신앙생활
예수님은 목마른 우리를 초대하시면서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이 말씀을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해 주님이 바라시는 힘차고 보람된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자.
- 성령의 현존을 믿고 의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면서 힘차게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삶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열정적으로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소심하고 겁 많던 그들이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했고,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용기를 내었다. 또 공동체 생활에서 더 많은 나눔과 봉사 그리고 일치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기 쉽다. 성령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인간적 결심이나 능력으로 살아가려 하기에 쉽게 지치고 실망하며, 냉소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사탄은 성령의 성전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성령의 불을 훔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성령의 현존을 잊고 살도록 유혹한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라고 한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급선무는 언제나 성령강림을 생활화하는 것이다.”란 말씀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성령의 활동을 믿고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한 사회심리학자의 임상실험 결과를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랭어Ellen Langer는 호텔 방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들이 하는 일이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하루에 평균 객실 15개를 청소한다. 객실 하나를 청소하는데 대략 20-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청소를 하기 위해서는 밀기, 팔다리 뻗기, 굽히기, 들어올리기와 같은 근육운동을 하게 된다. 따라서 호텔 객실 청소원들의 하루 운동량은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평균 운동량을 충족하거나 초과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운동이라고 여기고 일한다면, 그렇지 않은 청소원들과는 건강상 차이가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랭어 박사는 호텔 객실 청소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그들이 하는 일이 헬스장에서 하는 운동과 똑같은 효과가 있다는 의식교육을 시키고, 다른 그룹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 후에 두 그룹의 건강상태를 검사한 다음 한 달 뒤에 살펴보았더니 의식교육을 받은 그룹의 건강수치가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몸무게가 줄었고, 체지방 비율과 허리와 엉덩이 둘레의 비율이 감소했다. 또 혈압도 눈에 띄게 낮아졌다. 한편 의식교육을 받지 않은 그룹은 한 달 전과 같은 상태로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일(운동) 양에 비하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이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우리의 영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 성령의 현존은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고 다른 특별한 은혜를 받은 이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기에 생수의 강들이 자기 안에 흐른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쩌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지만 며칠 안 가서 식어버린다. 세상 풍파에 시달리다 보면 영혼은 다시 메마른 땅처럼 굳어지고 시들은 나무처럼 축 늘어져버린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 안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는다는, 성령께서 자기 안에서 활동하시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7,38의 말씀에 머물러 보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 다음에 “성경 말씀대로” 생수의 강들이 우리 안에서 흐른다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고 하셨다.
성경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진실되며 사실이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 안에 성령의 강들이 흐른다고 하셨으면 흐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성령의 강들이 흐르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내 마음속에서 활기찬 생명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성령의 강들이 흐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 느낌이 주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권위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 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시편 125,1)고 노래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 느낌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이 점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가 있다. 주님의 약속, 우리의 믿음 그리고 우리의 느낌이 높은 성벽 위를 기어오르고 있다. 주님의 약속이 먼저 올라가고, 그 뒤를 이어 우리 믿음이 따라가고, 맨 마지막으로 우리 느낌(감정)이 따라가고 있다.
믿음이 자기보다 앞서 가는 약속을 계속 바라보는 한 셋은 모두 성벽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약속에서 눈을 떼고 느낌이 어떻게 따라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다보면 그 순간, 믿음도 느낌도 성벽에서 떨어진다. 주님의 약속만이 성벽에 붙어 있게 된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믿음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느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다.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다.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는 것은 수시로 변하는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진리다. 곧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요즘은 정말 성당에 가기 싫어. 하느님을 생각해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아.” 한다면 자연히 신앙생활에 소홀해질 것이다. 우리가 느낌에 따라서 주일미사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참여하지 않을 날이 태반일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 좋은 일을 하고픈 열정을 갖기 위해서라도 객관적 진리를 존중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약속에 굳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진리에 복종할 때 우리의 감정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약속, 믿음, 느낌의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믿음과 느낌은 추락하게 된다는 사실이 단순히 신앙세계에서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서로 사랑하기에 평생을 같이 하고자 결혼한 부부가 시간이 흘러 상대에 대한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권태기를 맞이했을 때, 감정만을 중시하며 결혼할 때 했던 신성한 약속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미국 오클라호마의 한 고등학교에 미식 축구팀이 있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라이벌인 이웃 도시 학교 팀에게 승리한 적이 없었다. 경기는 매 금요일마다 열리건만 번번이 경기에서 졌기에 선수들은 물론 학생들과 그리고 학부모들까지도 금요일 저녁이면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보다 못한 그 마을 사업가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다음 주 금요일 경기에서 상대 팀을 이긴다면 모든 선수에게 자동차 한 대씩 사주겠다고 했다. 기대감에 부푼 선수들은 다음 주 시합을 위해 연습에 열중했다. 학교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선수들은 연습이 지겨워지면 새 자동차에 여학생들을 태우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사기는 전례 없이 높았다. 경기에 임하기 직전 선수들이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치며 승리를 다짐했다. 그리고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운동장으로 나갔다.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예전과 똑같이 38대0으로 완패했다. 하늘로 치솟던 그들의 사기는 단 한 점의 점수로도 연결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의 맹연습과 충천한 사기만으로는 선수들의 기술과 경험 부족을 해결할 수 없었다. 충천한 사기는 느낌이었을 뿐 실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느낌 곧 감정의 특징이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떤 감정은 파도와 같아 언제까지나 그 고유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물론 감정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와 지성이라는 보다 높은 정신 능력으로 통제해야 한다. 의지와 지성을 배제하고 감정만을 앞세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성경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진실되며 사실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5)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