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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 원용우 시조 문학
석야 신웅순
1.
오래전에 교수의 논문「역학기원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시조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많은 생각과 영감을 주었던 학설이다. 시조의 원리를 역학적 측면에서 풀어낸 탁월한 논문이었다. 필자가 시조 연구에 몰두했을 때였으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시조의 3장은 주역의 천지인 삼재의 원리를 본딴 것이고, 6구는 6효의 원리를 본 따서 만들었다 고 하였다. 그리고 각장이 4등분 되는 것은 춘하추동 사상을 의미한다고 보았고,시조 한편이 12절 로 된 것은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시조 형식을 삼재 육효로 처리했다. 한글 모음도 천․지․인, 삼재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이는 시조의 원리와 결국 같은 것이다. 감명 깊게 읽은, 시조의 형식을 주역으로 풀어낸 쾌도난마의 논문이었다.
시조의 삼장은 천․지․인이요, 각 장 4소절은 춘․하․추․동이요, 삼장 12소절은 12달이다. 그러면 시조는 자연이며 소우주가 아닌가. 소우주라면 세상에 담아내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시조는 기․승․전결의 기막힌 우리 민족사이며 개인의 인생사이기도 하다.
교수는 6번째 시조집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은 문학관을 전개했다.
작품의 질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양도 무시할 수가 없다. 문학 작품은 독자와의 소통이 중요하 다. 작품에 부드러운 맛이 있어야한다.
작품을 읽으면 무슨 뜻으로 썼는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의미 전달이 안되고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의미 전달의 문제만으로 시를 본 것은 아니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고 쉽게 읽을 수 있고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한다. 더욱이 우리 문학의 시조에 있어서랴.
목은 이색은 시만도 6000여수에 달했던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그에게 시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으며 제자를 가르칠 때도 시로 강론했고 정사를 말할 때도 시로 말했다. 참으로 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필자가 교수의 시조를 읽으면서 목은 이색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필자는 시조의 예술성에 높은 비중을 두었지 대중성에는 별다른 방점을 두지 못했다. 문학 행위에는 작품이 있고, 세계가 있고, 작가가 있고, 독자가 있다. 여기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문학의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필자는 가장 중요한 독자들과의 소통, 시조의 효용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수는 이러한 소통의 효용성을 중요시했고 또한 그렇게 썼고 그렇게 읽었다. 많은 시조에 가려 명시조들이 숨어 있을 뿐이지 그의 시조는 또 다른 차원이면서 깊이가 있고 품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개인과 가족의 일상에서부터 사회, 국가에 이르기까지, 과거에서부터 현재, 미래를 뛰어넘는 그의 시조는 공시적이면서도 통시적이다. 우리가 몇몇 작품의 시조를 갖고 시인 전부를 재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2.
필자는 그의 여섯 번째 시조집 『아버지의 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땅』은 그의 개인사이자 가족사이다. 이는 남들의 개인사, 가족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살아온 여정을 시조로 쉽게 읊는다는 것은 존경스러운 일이다. 감명이란 이렇게 나중에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되짚어보게 한다.
『아버지의 땅』은 필자에게 우매함을 일깨워준 시조집이었다.
늘그막에 등 따시던 고향 노래 부르고 싶다
어머니가 지어주던 바지 저고리 다시 입고
내 손주 재롱 부리듯 춤이라도 추고 싶다
논두렁 밭두렁 길 마냥 헤매던 어린 시절
선녀가 타고 내려온 무지개 잡겠다고
팔 벌려 다가가 안으면 한 아름 잡히던 허공이여
천자문 가르쳐 주던 서당 선생님 보고 싶고
보름달 떠오르던 그분의 외동 따님
밭머리 아지랑이처럼 하늘가를 맴도네
- 「고향노래」전문
농암 이현보는 명절이나 생일 때면 어린 아이처럼 부모님 앞에서 때때옷 입고 춤을 추며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효의 아이콘인 농암을 생각나게하는 시조이다.
못다한 효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 그 얼마였겠는가. 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이 새삼 그리운 것이다. 어머니가 지어주시던 바지 저고리를 다시 입고 그 앞에서 춤을 추고 싶다는 노교수. 효도하고 싶어하나 기다려주지 않는 부모님. 천자문 가르치던 서당 선생님도 보고 싶고 그분 외동 따님도 보고 싶은데 그 강물에 다시는 발을 담글 수가 없으니 파도처럼 밀려오는 회한을 어찌할 것인가. 세월을 돌려놓을 자가 어디 있으며 세월을 막을 자가 어디 있는가. 우탁은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고 그리 읊지 않았던가.
노교수의 회한은 「아버지」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흙에서 나고 자라 흙 파먹고 사시다가
그 흙이 너무 좋아 흙산으로 가시었나
당신의 마음씨처럼 둥그렇게 모은 봉분
먼동이 트일 시간 어여어여 소를 몰고
밤이면 지게 위에 달을 지고 오던 그분
반기던 대문짝만이 삐꺾삐꺽 울고 있소
손때 묻은 낮과 호미 녹이 쓴 채 걸려 있고
뒤란의 오동나무 작년처럼 푸르른데
무심한 소쩍새 소리가 밤하늘을 찢는다
- 「아버지」전문
당시 시절만도 우리나라는 농경 시대였다. 농사짓는 것 밖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흙에서 자라,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먼동이 틀 때면 어여어여 소를 몰고 가고, 밤이 되면 지게 위에 달을 지고 오셨다. 이제는 사립문만 삐꺽삐꺽 울고 손 때 묻은 낮과 호미가 담벼락에 녹 쓴 채 걸려있다. 뒤곁 오동나무는 예대로 푸르른데 무심한 소쩍새 소리는 밤하늘을 찢는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를, 노교수를 대신해 소쩍새가 울고 있으니 회한에 찬 지금에 와 뉘우친들 무엇하겠는가. 그나마 마음을 위로해주는 시조라도 있으니 이 아니면 노교수는 어찌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이렇게 작품은 시인이 살아온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교수는 다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를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는 속상하면 부지깽이 두드렸다
피아노 건반 치듯이 부엌바닥 두드렸다
아궁이 타는 불처럼 속이 타서 검은 날
아궁이 쑤시다가 바가지로 눈물 쏟고
부엌 바닥 두드리면서 한 많은 노래 불렀다
소쩍새 우는 소리를 반주 삼아 불렀다
아버지 등허리에 붙어살던 지게처럼
어머니 손바닥에 달싹 붙던 부지깽이
버리려 내던졌을 때 내던져진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부지깽이」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두드렸다. 아궁이를 쑤시다가 바가지 같은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부지깽이를 내던지고 가셨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그랬을까 싶다. 보릿고개에서 ‘솥적다, 솥적다’ 우는 소쩍새 울음은 어머니에겐 얼마나 처연하게 느껴졌을까.
소쩍새는 봄에 운다. 소쩍새가 울 때쯤이면 양식이 떨어지고 보릿고개가 닥친다. 보릿고개가 닥 치면 조반석죽도 여의치 않아 풀뿌리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하지만 당시에는 그것마저도 취할 수 없어 누렇게 부황이 들거나 굶어 죽는 사람도 허다하였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시절의 생활상이야말로 그토록 비참하고도 절박하였던 것이다.
- 김광수의 「나그네가 전개한 진정의 풍경」에서
아버지는 평생 지게와 함께 어머니는 평생 부지깽이와 함께 살아왔다. 삶이 아버지는 지게였고, 삶이 어머니는 부지깽이였다. 아들인 노교수에게 아버지는 지게를 내려놓고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내던지고 훌훌 길을 나섰다. 못 견디게 그리워 아들은 그 나이에 되어 이제사 사부곡, 사모곡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숙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아내와의 이별은 노교수의 찬가슴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그립고 생각나면 사랑 시조 읊어보고
그러다가 잠이 들면 꿈 속에나 다시 만나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 쏟아 붓는 은하수여
개미 쳇바퀴 돌 듯 백화점 안 돌아다니고
아이들 옷가지며 남편의 먹을 거리
수북이 사오시던 날 함박꽃은 피었다
지금은 어디 계시나 그림자도 찾지 못해
깊은 잠 누워계신 대신면에 달려가서
당신의 암을 뽑듯이 잡초 뿌리 캐준다
- 「아내에게」전문
세상에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커서는 아내를 만나 자식을 낳고, 자식을 키워 시집 장가 보내고, 마지막에는 영원히 부부는 서로 이별하게 된다. 생로병사는 또 무엇이고 인명재천은 또 무엇인가. 이를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내가 있는 병원」에서 노교수는 ‘아내는 무슨 죄로 열 달째 갇혀사나/생명을 단축하는 주사기 꽂아놓고/추억을 반추하면서 건너는 세월의 강’이라 읊었다.
불치의 병, 암을 앓고 있던 아내를 산으로 보내야했던 노교수. 참담한 마음을 꿈에서라도 만나 못다한 이야기를 쏟아 놓고 싶은데 이제는 그림자 자취조차 없다. 무덤가에서 잡초를 뽑는 노교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 시조를 읽으면 정철의 장진주사를 읽는 것 같아 처연하기 짝이 없다. 사람의 마음을 울려주는 것은 별 것 아다. 진솔이며 진실 그 하나면 족하다.
3.
원용우 시인은 서울대 국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다 경상대학을 거쳐 한국 교원대에서 정년, 현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이다. 1975년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등단, 한국시조사랑 이사장을 거쳐 현 한국시조협 고문으로 있다. 23권의 저서와 90여편의 논문이 있다. 시조집 『한강변의 봄맞이』외 6권의 시조집이 있으며 『맛있는 문학기행』외 5권의 수필집이 있다. 『황산시조문학상』학술상, 『경기예술 대상』등 20여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눈 감으면 오히려 세상이 환히 뵌다
눈 뜬 장님이 너무 많은 우리 이웃
뻘건 걸 하양이라고 우겨대는 어리석음
옛 어른들 눈 감고 귀 막고 사신 그 뜻
허유가 영수가에서 귀를 씻던 고고한 삶
두 눈을 크게 뜨고 봐도 골동품이 되었다
공해에 찌든 음식 밥상 위에 널렸다
혼자서 고고 척 아무리 살아봐도
그 밥을 먹지 않고는 넘지 못하는 늦가을날
-「늦 가을에」
시인은 가족에서 사회로 눈을 돌렸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면서 생긴 현대사회의 모순에 대해 메스를 가하고 있다.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따라잡지 못해 생긴 부정 부패의 온갖 행태를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수 시인의 말로 대신한다.
시인의 의도는 전도된 가치관과 왜곡된 풍조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갖가지 폐단을 없애려면 모든 사람의 의식이 변해야 하겠지만 우선 위정자를 비롯하여 사회 지도층에 있 는 이들이 올바른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익보다는 공익을 위하여 헌신하며 희생적 모습을 보 여야 한다는 취지를 묵언으로 역설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수의 ‘고개 이야’기는 그의 가족사에서 정치․사회사를 총망라하고 있다. 차라리 대 서사시이다. 유년의 고개에서부터 육이오 고개를 넘고 피난 고개를 거쳐 유학, 4.19, 5.16, 군대, 대학,유신,시조,석사,박사,시위,5공,교원,민주화, 올림픽,운동권 고개 등 우리의 아픈 민주화 고개인 현대사를 고스란히 시조에 담아내고 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뒤를 돌아보며 지난날을 반추하고 있다. 유년 고개에서부터 숱한 질곡의 역사를 거쳐 최근의 운동권에 이르기까지 현대사 고개 이야기를 시조로 써내려갔다.
노교수의 『전쟁고개』를 잠시 낭송해본다.
피난 갔다 돌아오니 마을은 온통 잿더미이고
그나마 안 탄 집은 군인들로 북적대고
고향에 돌아왔어도 발 붙일 곳 없는 페허의 땅
누구는 의용군 가서 영영 생사 모르고
누구는 국군에 가서 전사 통지서만 돌아오고
남북이 갈라지듯이 갈라셨던 마을 청년들
아낙네 끌려가서 우군에 겁탈당하고
남정네는 끌려가서 밤마다 방공호 파고
그 언제 멈출지 모를 포성만 지축을 흔들었다
- 「전쟁고개」
한편의 다큐이다. 현장의 그날이 생생하게 기록되어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의용군으로 가서 생사를 모르고 전사 통지서만 돌아왔으니 마을 청년들도 남북으로 갈라지듯 갈라섰으니 민족의 참담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대학고개에서는 이희승 선생님께 선비 기질을 배웠고 정병욱 교수님에게는 학문의 세계를 맛보았다. 시조는 이우종 선생을 만나 시조도에 입문했다. 거기에서 시조를 고려의 청자보다 더 고결한 배달의 얼을 전수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수많은 고개를 넘고 넘었으니 오늘 날의 찬란한 시조 이론과 창작의 업적을 이룬 것이 아닌가. 무슨 회한이야 남았겠느냐만 그래도 끝없이 남는 것이 예술가들의 욕망이며 자신의 몫이기도 하다.
세상에 시조 한 수 낚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시조 한 수 낚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운 오후
잡으려는 물고기는
끝내 물리지 않고
시간만 줄줄이 묶여
허연 뼈를 드러낸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낚시질해 보지만
정성으로 부족한 지
헛입질 하고 있다
빈 망태 들고 앉아서
저녁해를 바라본다
- 「어느 오후」
예인들의 느끼는 심정은 이런 것일 것이다. 좋은 시조 한 수 입질하기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다.
교수의 첫시조집 후기에서 ‘건방진 이야기 같지만 하나의 신앙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어느 한 구석 빈자리를 채워주는 평신도라도 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쓴 「시조의 길」에도 ‘내가 가는 길은 자나깨나 시조의 길, 시작은 있었지만 끝 안보이는 구도의 길/밤 새워 기도하다 감격의 눈물 흘리고’ . 시인에게 시조는 하나의 신앙이다.
일상 생활이 시조이고 역사가 시조이고 문화 유적이 시조이고 그가 가는 곳이면 다 시조가 된다. 종횡무진 장소면 장소, 과거면 과거, 현대면 현대, 사회, 정치, 경제 등 아니 거친 곳이 없다. 시인이라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색이 시를 사랑하듯 시인도 그렇게 시조를 사랑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스치치 않은 데가 없으니 김삿갓이라면 어떨까 싶다.
4.
머리 맡에 두고 싶은 시조, 오래 오래 읽고 싶은 시조 몇 수를 낭송해본다. 단시조는 이렇게 품격이 있고 맛깔스럽다.
뒤란의 장독대엔/ 장 항아리 다섯 개// 어머니 정성이 담긴 크고 작은 그 모습//만삭의/잉태한 오남매 찍어둔 사진이다
- 「장독대 」
무엇이 급하신지 뒤돌아보지 않고//떠나신 어머니가 가슴 답답하셨나//구름문 열어젖히고 얼굴 잠깐 내미셨네
- 「낮달」
얼굴을 가리우고 응아 소리 못 지르고//어머니 뱃속에만 자리 잡은 우리 아기//어엿한 대한의 아들로 출생신고 바란다
- 「이어도」
먹고 싶지 않아도 나이는 자꾸 먹고//쓰고 싶지 않아도 흰머리 쓰고 산다//기울고 싶지 않아도 비스듬히 기운 세월
- 「늙음」
이 해도 인생처럼 조금씩 기울어져 가고 있다. 온 산천이 붉게 물이 들고 조금 있으면 우수수 낙엽들은 세월의 빈자리로 떨어질 것이다.
원교수의 팔순 기념이 훈훈했으면 좋겠다.
- 시조문학,2016.겨울호,140-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