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할머니
넉달 전 우리 앞집에 할머니가 이사왔다. 연세가 87세인데 혼자 사신다. 체구는 조그마하지만 목소리가 힘이 있고 커서 평소 말을 할 때도 쩌렁쩌렁 울리는 느낌이다. 할머니가 건강해 보이니 혼자 사신다 해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할머니는 이사온 첫 날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우리집 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이봐요, 문 좀 열어봐요!”
목소리도 큰데다 문을 쾅쾅 두드리니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 지 긴장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할머니가 집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이사 오는 날이라 아직 밥할 준비가 안되었으니 우리집에서 같이 식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웃하고 밥 한두 끼 나눠먹는거야 별 일도 아니지만 내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할머니가 요청을 하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반찬도 걱정이고 집안 정리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처음엔 불쾌했지만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도 오랫동안 혼자 사셨고, 시어머님도 현재 시골에서 혼자 지내고 있어 늘 마음이 무거웠는데 어머니를 대하듯 잘해 드려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날부터 집수리를 하는 삼일동안 할머니는 우리집에와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가까이에 아들과 조카가 살고 있어 아침식사와 저녁식사, 잠잘 곳은 걱정이 없었다. 집수리 도중에 나를 불러서 무엇을 더 손봐야 하는 지 점검해 보고 인부들에게 지시를 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나는 외출도 삼가고 할머니를 도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부에게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참견도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흡족해 했다.
할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경상도 김천에서 살다가 올라왔다고 소개했다. 이 집도 할머니 소유이고 생활비 걱정은 없다고 했다. 여기가 고향이어서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 전혀 심심하지 않다는 말도 했다. 여행도 자주한다며 그동안 다녀온 곳을 자랑하듯이 길게 나열했다. 나에게 교회에 나가느냐고 물었을 때는 할머니 눈에서 반짝 빛이 났다. 할머니는 교회다니는 취미로 산다고 했다. 얘기를 꺼내면 두어시간은 족히 혼자 말씀을 이어갔다. 나는 옆에서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얘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할머니는 항상 똑같은 말로 마무리 인사를 했다.
“내일 또 올게. 일 봐”
할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지 않는 날엔 집안에서 큰 소리로 혼자 찬송가를 부른다. 노래 소리는 우리집 거실에서도 들린다. 친구들도 자주 찾아온다. 대부분 같은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이라고 했다. 시장에서 생선 한 마리를 사들고 힘차게 팔을 휘두르며 걸어오는 할머니를 길에서 만나면 은근히 기분이 좋다. 약간 흠집이 있어 싸게 샀다며 할머니가 우리집에 들고 온 사과는 내가 가게에서 사온 사과보다 훨씬 달고 맛있었다. 남편은 할머니에게서 과일 고르는 방법을 전수받으란다. 할머니는 혼자 살면서도 외로워하지 않고 잘 웃고 명랑했다.
처음에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할머니의 방문이 불편하고 피곤했다. 내가 외출 준비 중인데도 “조금만 앉아있다 갈게” 라며 집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통에 약속시간에 늦은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넉 달째 계속되다 보니 이젠 ‘그냥 그러려니’한다. 문을 두드리지 않는 날엔 어디 편찮으신가 걱정도 된다. 요즘엔 남편이 퇴근하면 할머니 얘기를 꼭 묻는다. 그동안 할머니와 이런저런 정이 들었나 보다.
며칠전에는 할머니가 이틀동안 보이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러봐도 대답이 없었다. 처음엔 어디 여행가셨나 하고 생각했는데, 택배물이 와도 받지 않는 걸 보자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를 당하지나 않았는지, 편찮으신데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홀로 사는 할머니를 모른체한 냉혈 이웃으로 9시 뉴스에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심했던 나는 할머니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들과 조카랑 인사를 나눴으면서도 정작 연락처는 받아놓치를 않은 것이다. 할수없이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더니 전화번호는 알려줄 수 없다며 직접 확인해보고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관리소직원으로부터 할머니는 김천에 가셨는데 일주일 후에 돌아온다는 답변을 들었다. 왜 여행갈 때는 말씀을 안하고 가는지 섭섭했다.
일주일 후 돌아오신 할머니를 보자 반가움이 컸다. 조용하던 아파트가 또다시 시끌시끌해졌다. 시골 공기를 마시고 와서 그런지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목소리도 여전히 우렁차다. 어저께는 문을 또 쾅쾅 두드려서 나가보니 러닝머신을 들여놨다며 구경오라고 했다. 겨울이라 실내에서 걷기운동을 해야겠단다. '이러다 일 나지' 염려되었지만 아무말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실 일은 없을 것 같다. 연세가 드셨어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할머니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