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추앙’이라는 낱말의 뜻을 찾아보았다. '높이 받들어 우러르다'는 뜻이다. 주로 성인, 영웅,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로 생전보다는 사후에 쓰는 말이다.
평상시에 사용할 일이 없는 이 낱말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 사회에 운석처럼 떨어진 느낌이다. 주인집 딸로 과묵한 염미정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한 술 더뜨는, 아니 아예 말을 잃어버린 사람같은 구씨에게 맥락없이 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서로 말을 섞은 일도 없고, 마음을 주고 받는 사이는 더욱 아닌데 대뜸 그녀가 말한 것이다. “나를 추앙하세요!” 그 생경한 낱말을 들은 구씨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추앙? 나 더러 널 추앙하라고?” 적당한 용어를 쓴 것이 맞아, 하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구씨에게 미정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예, 날 추앙하세요!”
그 뜻을 알듯 모를듯, 낯설고 어색한 낱말 ‘추앙’이 등장하면서 드라마는 갑자기 반전을 맞는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말없는 구씨가 하는 행동이 ‘추앙’을 담고 있다는 것이 조금씩 미묘한 감동을 자아내며 다가오는 것이다.
한 예로 미정이의 모자가 바람에 개천 반대편에 떨어졌을 때 구씨가 도움닫기를 해서 그 만만치 않은 거리를 날아가듯 뛰어넘어 가져다 준 것이다. 왜 그랬느냐는 미정의 말에 ‘추앙한 거야.”라고 짧게 대답하는 구씨다.
퇴근하는 미정이를 전철역에서 기다리는 것도, 미정이와 함께 밤길을 걷는 것도, 미정이의 말을 따라 들개들 가까이에 가지 않는 것도, 한 가득 방을 채우고 있던 소주병을 치우는 것도, 함께 서툴게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나 라면을 끓여주는 것도 다 미정을 향한 말없는 ‘추앙’인 셈이다.
미정은 구씨의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곳으로 왔는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묻지 않는다. 질문에 곤란해 할 줄 아는 미정이의 ‘추앙’ 방식이다. 동사무소 직원이나 형사처럼 서로에 대한 정보를 묻지 않는 관계가 형성이 된 것이다.
많은 경우 대사는 생략되고 우주인들처럼 느리게 걸어다니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답답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추앙’ 중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되지만 구씨가 떠날 때까지도 이름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모른다. 구씨를 향한 그녀의 ‘추앙’은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이제는 고지식한 ‘신뢰’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정의 그러한 태도는 속박 속에 살아온 것이 분명한 구씨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된다.
추앙은 미정이가 한 말처럼 명령이나 규칙을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동의를 거쳐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스마트폰 없이도, 아무런 만남이 없이도 서로를 추앙하려는 마음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교류되는 것을 지켜본다. 보이지 않는데 보인다. 아,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구나, 알게 된다.
아내를 졸지에 떠나 보낸 아버지는 잔소리만 늘어놓는 아내를 늘 공기 취급하고, 어느 한 순간도 그녀를 높여 우러른 일이 없지만, 그래서 무시만 당하다가 삶을 마친 것 같았지만 '추앙받아 마땅한' 여인이었음을 깨닫는다.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남편과 자녀들에게 '추앙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표현을 못해 후회되지만 사실은 마음으로 ‘추앙’하는 존재였다. 그녀의 유골을 도저히 납골당에 둘 수 없는 이유다.
그러고보면 출연자들 모두가 질식할 것 같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해방’의 길을 찾는 이들이다. 일도, 차도, 만남도, 이혼도, 시한부 남자 친구의 병간호도, 시기도, 질투도, 클럽활동도, 싸움도, 장사도, 사기도, 도망도, 침묵도, 술도, 상사와 관계도, 심지어는 불륜까지도 다 나름대로 해방의 길을 찾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길이 아닌 것 같다. 구씨의 방에 늘어가는 빈소주병처럼, 길이라 여겼던 것들은 모두 꽝이 확인된 복권처럼 허허롭다. 사원들의 행복을 위해 클럽활동을 장려하는 일을 맡았던 여과장이 늘 행복한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보니 슬플 때조차 웃는 듯한 표정이 지어져 고민이라는 것처럼, 추구하는 행복에 부작용이 따라오는 것 같다.
우리의 활동 무대는 마치 불문율이나 있는 것처럼 서로를 낮추어 보고, 쯔쯧거리며, 한숨을 쉬며 답답해 하는 일은 있어도 이웃을 높여주는 일, 높여주어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없거나 어색하다. 칭찬에도 서툴고 인색한 우리인데 추앙이라니!
가당한 말이 아닌 것 같지만 바로 그 일이 다만 죽은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사용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남을 높이기보다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그도 모자라 짓밟아버려야만 하는 경쟁 사회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그 높임이 아닐까? 이름이나 지위, 능력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질문해 오고 있는 것 아닐까?
종교단체나,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그 추상적인 낱말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마음을 품고 대할 때 누군가를 살맛나게 해줄 수 있는 그 도구를, 만병통치약과 같은 그 낱말을 누가 봉인해 버렸는가? 그 낱말에 흐르는 해방의 힘을 무엇이 막아버렸는가? 작가는 묻고 싶은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 낱말의 해방을 통해, 서로를 폄하하는 일이 다반사가 된 우리 모두가 서로를 높이며 자유케 하는 해방으로 나갈 수 있다는 소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망을 가져오는 그 열쇠가 바로 내 입과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닌가? '감사해요, 사랑해요."라는 인삿말처럼, '추앙'을 표현하는 삶을 어색하게나마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내를 추앙하고, 남편을 추앙하고, 부모를 추앙하고, 자녀를 추앙하고, 친구를 추앙하고, 이웃을 추앙하는 일이 곧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을 추앙하는 일의 시작이 아닐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당신, 너무도 존귀하고 소중한 당신, 아버지의 완전한 계획 속에 있는 당신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에게 엄지 척에 환한 얼굴로 "멋지구나. 대단해요.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틀림없이 잘 해낼 거예요!"라고 추앙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만날 그 누군가는 얼마나 복이 될까? 어떤 답답한 사정이 있을지라도 해방으로 이끄는 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일이 오늘 누군가를 추앙하는 나를 통해 시작될 것이라고 작가가 말해 오는 듯 하다. "오늘 너무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