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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시인 소개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남으로 띄우는 편지
마음의 액자
20분
늦게 온 소포
집 짓기
손바닥에 빗물 고이네
산에 가야 맛을 알지
팥빙수 먹는 저녁
보고 싶은 마음
쑥무덤
횡단보도
사랑니
물메기국
묵언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풋고추
남해 멸치
남해 가는 길 -유배시첩 1
뿌리가 뿌리에게
별에게 묻다
거룩한 구멍
돈
남해 금산 큰 새
아버지의 귀향
기러기 나라
수연산방에서 -『무서록』을 읽다
먼 길 온 사람
반달
빗살무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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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시인 소개
1963년 (만48세) | 토끼띠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한국경제신문사 문화부 차장
제10회시와시학상 수상
시집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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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리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고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시집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랜덤하우스중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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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띄우는 편지
봄볕 푸르거니
겨우내 엎드렸던 볏짚
풀어놓고 언 잠 자던 지붕 밑
손 따숩게 들춰보아라.
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
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
이 바람 끝으로
옷섶 한 켠 열어두는 것
잊지 않으마.
내 살아 잃어버린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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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액자
멀리 있는 것이 작아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이 커 보이는
원근법의 원리 이미 배웠지만
세상 안팎 두루 재보면
눈에 멀수록 더 가깝고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요
오늘처럼
멀리 있는 당신.
어느 날 문득 내게로 오는 것이
돈오돈수(頓梧頓修)의 유리 거울이라면
끊임없이 가 닿기 위해
나를 벗고 비우는 일이
원근보다 더 애달픈 사랑이라는 걸
마음의 액자 속에서
비로소 깨달은 오늘.
시집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랜덤하우스중앙.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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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아침 출근길에
붐비는 지하철
막히는 도로에서 짜증날 때
20분만 먼저 나섰어도......
날마다 후회하지만
하루에 20분 앞당기는 일이
어디 그리 쉽던가요.
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
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
노랗게 달궈놓은 길 옆에 앉아
꽃 피는 모습 들여다 보면
어스름 달빛에 찾아올
박각시나방 기다리며
봉오리 벙그는데 17분
꽃잎 활짝 피는데 3분
날마다 허비한 20분이
달맞이꽃에게는 한 생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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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 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몇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늦게 온 소포, /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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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기
뒹구는 것이 어디
슬픔뿐이랴, 내가 흙이 되어
무심한 바람 따라 흩날리고 밟히다가
진실로 낮은 곳 골라 허리 바로 세우면
한 세상 밝게 비출 집 한 채로
빛나는 것을. 그대 내 몸속
잘디잔 뼈, 떼 뿌리 엉긴 살점까지
물 받아 거푸집에 섞으면서
어둠 먼저 담을 치고
빈 터에 기둥 하나 밀어올린다는 것이
그렇구나, 떠도는 자갈들도
함께 일어나 몸 부비고 소금 땀
쓰리던 관절 마디마디 따뜻해져
그리움, 콧등 찡하게 물무늬지는데
젖은 흙 더욱 찰지게 다지며
목반자 먼 끝으로 하늘색 지붕 올릴 때
막막한 겨울 추위 목놓아 울음 울던
바람벽도 찬찬히 묶어
댓돌 반짝거리게 닦다 보면
못다한 말뿐이랴 걱정 많던 그날의 사랑
출렁거리며 다시 돌아와
겹격자 멋 낸 창틀 슬픔으로 색칠하는
저 흰빛, 신새벽 찬 별 속에
온몸 집이 되어 서 있는
그대.
늦게 온 소포 /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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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에 빗물 고이네
중학교 때
손바닥 내밀고 매맞던 일
손보다 얼굴 더 화끈거렸지.
서소문 공원
실직당한 비둘기 떼
줄지어 서 손 내미는데
펼칠수록 작아지는 세상이여.
누군가에게 손 벌린다는 것
밥을 기다리는 동안
손 쓰린 손금 위로 햇볕
잘게 부서지고
이럴 때 손은 가장 뜨거운 그릇.
모락모락 식판 곁으로 가문비나무
입김 뿜으며 다가앉네.
발갛게 익은 손 식히려고
하늘 가리는데 고마워라 찬비
일제히 비술 받으러
흙들이 손을 모으네.
식판 위에 통통
떨어지는 빗소리
발끝까지 찌르르
타는 봄날이 지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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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야 맛을 알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육백팔십 미터
보리암 정상 금산산장
아침 먹다가
'산중에 웬 볼락어 고기?'
'아, 까짓거. 릴 낚시로 한 코만
잡아댕기면 금방 올라오지요.'
해수관음보살 닮은
산지기 총각 농담 한 코에
산 바다가 마주보며
하, 하, 하,
웃습니다.
그러고 보니
황태국물도 대관령 넘어야
노랗게 제 맛 든다고
높은 곳에 올라 본 고기들끼리는
그 맛 아는가 봅니다.
볼락어 저도
볼록볼록 따라 웃습니다.
현대문학, 3월호
삶과 꿈의 앤솔러지 좋은시 200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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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빙수 먹는 저녁
흰 눈가루처럼 백설기처럼
부드러운 얼음이 소복하게 쌓이는 밤
둥근 유리그릇 안에서 그대는
뽀얀 우유와 연한 오렌지 조각 어루만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풀고
팥고물처럼 우리 이렇게 달디단 눈빛으로
한 백 년쯤 녹아갈 수 있다면
오늘같이 더운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송글송글 닦아주며
달뜬 마음도 식혀주며
한술한술 서로 입에 넣어주다가
빈 그릇 밑바닥에 얼굴 비춰보면서
시원하지 참 시원하지 다독여주면서
한 그릇 더 시킬까 마음 써주면서
오순도순 손잡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 사각사각 눈 내리는 겨울밤까지
이 길 오래오래 이어지길 빌면서
내일 또 내일 내년 후 내년
이 시려 찬 것 더 못 먹는 날까지
손가락 걸고 자박자박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랜덤하우스중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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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마음
휴대폰 없이 산에서 지내는 동안
하늘색 공중전화가 있는
절 마당까지 뛰어갔다가 동전은 못 바꾸고
길만 바꿔 돌아올 때
보고 싶은 마음 꾸욱 눌러
돌무지에 탑 하나 올린다.
늦게 온 소포 /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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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무덤
눈강에 뗏목이 뜨고
물안개 저리 맑으니
쑥꽃 필라나 진갈매 바람 언덕
아지랑 강물 딛고 봄 짙어오는데
돌무지 햇볕 여무는 곳에
휘파람새 칼새 멧새
잃어버린 슬픔들 모여
뼈 없이 묻힌 자리
강바람 추스르며 새들이 닿는구나.
아직도 못다 묻은 삼단 머리 고운 옷깃
쑥부쟁이 낮게 쓸며 함께 닿아
몸 누이누나. 살아생전
띠집 한 채 그립던 이여.
날 저물면 횡혈식 적석봉토
번듯한 당초집 짓고 봄 잔디 풀밭으로
따뜻한 이불 덮으리니
쑥무덤 꽃잎 따라 부디 꿈길 밟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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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너 두고
돌아가는 저녁
마음이 백짓장 같다.
신호등 기다리다
길 위에
그냥 흰 종이 띠로
드러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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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세상 너무 환하고 기다림 속절없어
이제 더는 못 참겠네
온몸 붉디붉게 애만 타다가
그리운 옷가지들 모두 다 벗고
하얗게 뼈가 되어 그대에게로 가네
생애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대 빈 곳 비집고 서면
미나리밭 논둑길 가득
펄럭이던 봄볕 어지러워라
철마다 잇몸 속에서 가슴치던 그 슬픔들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
빛나는 뼈로 솟아 한밤내 그대 안에서
꿈같은 몸살 앓다가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
내 알지만 햇살 너무 따뜻하고
장다리곷 저리 눈부셔 이제 더는
말문 못 참고 나 그대에게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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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메기국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뺕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 팔 때 깜쪽같이 없어졌지
아들아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 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두레밥상
빈 둥지 올려다보며
껍질 몰래 삼키던 그 모습에
목이 메던 풍경이 있었네
해질녘까지 그 자리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시와사람 /2007.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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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
뜨겁다.
손, 놔라.
오래 견뎠다가
그대 처음 만난 날.
늦게 온 소포 / 민음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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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왕산에 가보셨나요
용평 발왕산 꼭대기
부챗살 같은 숲 굽어보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더니
전망대 이층 식당 벽을
여기 누구 왔다 간다, 하고
빼곡이 메운 이름들 중에
통 잊을 수 없는 글귀 하나.
`아빠 그 동안 말 안드려서
좨송해요. 아프로는 잘 드러께요`
하, 녀석 어떻게 눈치챘을까.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는 걸.
늦게온 소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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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고추
풋고추 된장 찍다가
무심코 보니
아하!
너도 몸에 칼 댄 적 있구나
배꼽 아래 세로로
실밥 뽑은 자리
푸르게 멍까지 들었네
흰 접시
침대
몸 풀고
올려다보던 당신
닮았네
늦게온 소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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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멸치
너에게
가려고 그리
파닥파닥
꼬리 치다가
속 다 비치은 맨몸으로
목구멍 뜨거게 타고 넘는데
뒤늦게 아차,
벗어둔 옷 챙기는 순간
네 입술 네 손끝에서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오 아름다운 비늘들
죽어서야 빛나는
생애.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문예중앙 시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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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가는 길
-유배시첩 1
물살 센 노랑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적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알몸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앵강은 서포(西浦) 김만중이 만년에 유배 살던 남해 노도(擄島) 앞 바다 이름이다.
늦게 온 소포 / 민음사
시평 / 제2호 / 햇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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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뿌리에게
깊은 것은
어디서나
믿음이 됩니다.
시안 / 2006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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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게 묻다
천왕성에선
평생 낮과 밤을
한 번밖에 못 본다.
마흔두 해 동안 빛이 계속되고
마흔두 해 동안 또
어둠이 계속된다.
그곳에선 하루가
일생이다.
남해 금산 보리암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
좌선대 등뼈 끝으로
새까만 숯막 타고 또 타서
생애 단 한 번 피고 지는
대꽃 틔울 때까지
너를 기다리며
그립다 그립다
밤에 쓴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아침
우체국에서 여기까지
길은 얼마나
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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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구멍
한 입이
밥을 먹고
말을 뱉고
혀를 놀려
죄 짓는 동안
또 한 입이
밥을 삭이고
말을 거두고
혀를 오므려
용서를 비는구나.
유심 / 201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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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랜던하우스 중앙, 2005 / 반경환 명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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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큰 새
남해 금산
기막힌 38경 외에
산까마귀 하나 더 있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산 저 산 까악까악
사람 불러세우는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잔, 불콰해진 그가 취나물을 비
비다 말고 한 소식 들려준다. 이 산에서는 까마귀가 길조
래요. 까치는 죄다 파먹잖아, 곡식이며 열매며 속이 궁금
해서 못 참는거라. 그런데 까마귀 곡식 해치는 것 봤어
요? 사람이 그 속 모르고 재수없다 자꾸 타박만 주니......
하루 종일
고구려 벽화 속 삼족오(三足烏)처럼
산에 깃든 사람의 마음
잊지 말라고, 가슴속 귀한 것
부디 놓지 말라고
꽈악 꽉 밑줄 그어가며
일깨우는 산까마귀.
늦게 온 소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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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귀향
송화강 물빛 여기 와서 푸르거니
한번 떠난 땅 돌아오는 길이 더 낯설다.
모시밭 한구석에 담을 치고
밤새워 터 밟다가
아직 찬 북방의 별
그대를 생각한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억새 들판
마른 강가에 두고 온 것들이
여기서도 시리디시린
그리움 될 줄이야
날 밝기 전까지
나 집 짓는 일 미뤄두네.
새벽 물안개 속으로 지친 몸 풀고
뼈 씻어 헹구던 곳
끝없는 슬픔의 깊이로
별빛 푸르른 우물 하나
먼저 놓는 일
남아 있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문예중앙 시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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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나라
‘달 밝은 가을 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집으로 간다.
지난 겨울 어린 보리 잎 쪼아 먹고
날갯죽지 파릇해진 선배들도
줄지어 퇴근한다.
두고 온 깃털이나, 떠나보낸 부리들
먼 곳에서 흔들리며 춥지 말라고
바빠 바삐 둥지에 닿아
온몸으로 군불 지피는 사람들.
온돌이 조금씩 데워지는 동안
깨금발로 처마 끝 바라보는 모습 뒤로
거울 속 나무 기러기 한 쌍
찡긋하며 마주 보고 눈을 맞춘다.
경향신문 / 아침글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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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에서
-『무서록』을 읽다
문향루에 앉아 솔잎차를 마시며
삼 면 유리창을 차례대로 세어본다
한 면에 네 개씩 모두 열두 짝이다
해 저문 뒤
『무서록』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일에 순서가 따로 있겠는가
저 밝은 달빛이 그대와 나
누굴 먼저 비추는지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누구 마음 먼저 기울었는지
무슨 상관 있으랴
집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 앞서거니 뒤서거니
뒤에 앉은 동산도 두 팔 감았다 풀었다
밤새도록 사이좋게 노니는데
시작 끝 따로 없는
열두 폭 병풍처럼 우리 삶의 높낮이나
살고 죽는 것 또한
순서 없이 읽는 사람이
먼 훗날 또 있으리라
시읽는 기쁨 3(정효구지음) / 작가정신.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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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온 사람
혼자 강물 기대선 그대
남루한 등 뒤로 무리지어 떠나는
저 새떼 보아라
험한 세상 그리운 노래 따라
춤추며 흔들리며 끼룩끼룩
흩날리다 어둠 걷히는 강 저편
눈부시게 금비늘 은비늘 떨구며
가는구나.바삐 지나온 길
물살 재재거리는 모래톱에 꿇어
밤새도록 무릎 닦아 참회했으나
깃발 없는 둑길 가득 갈대꽃만 흐드러지고
새들이 떠난 자리
캄캄하게 기다리며 남아 있는 그대
이토록 오래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이었을까
눈 떠보면 발아래 와 부딪히는
물소리 들판 한가운데로
두고 온 모든 것들이 깃 치며 살아나는 소리
툭 툭 꽃잎 털며 마침내 그대 일어설 때
보는가 숨죽여 엎드렸던 잡풀들 사이
펄럭이며 달려와 우리 앞에 서는
이 깊디깊은 눈물 끝간 데 없는
우리들의 귀로(歸路).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랜덤하우스중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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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심장이
나의 반을 두들기면서
두근두근 몸 전체를
뛰게 만들듯
바스듬히 옷섶 열고
가슴 한 켠 보여주는 당신
밤과 낮 다른 곳에서도
우리 이렇게 절반씩 몸 맞추는
참 좋은
초가을 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 문예중앙 시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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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의 추억
청동 바람이
종을 때리고 지나간다.
화들짝 놀란 새가
가슴을 친다.
좌로 한 뼘쯤
기운는 하늘
별똥별이
내 몸속으로
빗금을 치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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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참 감미로운 시집
데미님
감사합니다
제 치부책에 옮김니다!
데미님 이제 겨울 입니다
그곳먼곳 독일에도 겨울은 다시 찿아오지요
건강하세요
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