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파괴 ***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 히브리서 2장 14-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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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의 불빛이 비추는 어둠은 무엇보다도 "죽음의 어둠"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죽음의 위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우리의 기대의 배경을 이루는 어둠입니다.
죽음은 어느 유명한 고대의 상징이 가리키듯이 우리의 생명의 실을 끊는 가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얽혀서 우리의 실존의 무늬를 이루고 있는 실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존재를 늘 관통하면서 우리를 형성해 가는 힘입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은 그의 삶에 내재된 죽음의 현존,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을 향한 용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념의 흔적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본문에 의하면, 죽음의 이런 무서운 현존은 인간을 한평생 죽음에 대해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워하는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한 그때 우리는 상황에 적합하게 행동할 만큼 자유롭지 않으며 우리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심상과 상상이 우리를 내몰아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두려움은 무엇보다도 "미지의 것"(the unknown)에 대한 두려움이며, 미지의 것이 갖고 있는 어두움은 두려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사람의 얼굴은 젖먹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부모와 교사의 알려지지 않은 의도는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어떤 상황이나 새로운 과제가 갖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의미는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절대적 미지인 죽음에 대해 절대적으로 해당됩니다. 죽음의 어두움 속에는 아무런 빛도 없고 그 안에서는 모든 상상력이 소멸됩니다. 그 안에서는 모든 행위와 통제가 중단됩니다. 그 안에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납니다. 죽음은 가장 필요한 개념인 동시에 가장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두려움이 거기에서 힘을 얻어내는 - 심지어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까지 압도했던 - 두려움의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고, 우리의 유한성의 무한한 지속을 상상하거나 바랄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그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는 구약성경의 족장들과 관련된 말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바, 삶과 관련된 성취와 만족과 피곤의 느낌이 있지 않은가요?
"흙에서 흙으로"는 자연스러운 법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째서 낙원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저주로 사용되는 것일까요?
분명히 죽음에는 우리의 일시성에 대한 인식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우울 이상의 심원하고 신비로운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죄의 삯"(롬 6:23)으로, 또한 죄를 "사망이 쏘는 것"(고전 15:56)으로 칭하면서 그런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문 역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14절), 즉 죄와 악의 조직화된 힘에 대해 말합니다. 죽음은 비록 모든 유한한 존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그와 동시에 자연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며 마주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그런 의식이 그의 위대성과 위엄의 일부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는 자신의 삶 전체를 살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의식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즉 그를 그의 삶 이상으로 고양시키고 그에게 자신의 영원성에 대한 느낌을 제공하는 질문을 하도록 만듭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기도 합니다.
죽어야 하되 동시에 불멸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사망이 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또한 어째서 마귀가 죽음의 권세를 갖고 있는지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멸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두려움을 낳는 것은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본래적이고 벗어날 수 없는 죽을 운명 너머에 있는 우리의 영원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우리가 영원으로부터의 사악한 분리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분리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동안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우리의 죄책의 결과인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유한성에 대한 지식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또한 우리의 무한성에 대한, 우리가 영원을 위해 지음받았음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영원을 잃어버렸음에 대한 지식 역시 보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의 노예인 것은 우리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죽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찾아온 영원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가 그로 인해 우리의 유한성을 잃어버리는 마술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의롭게 되었으므로 죽어야 마땅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판결입니다. 그 판결은 "우리"(we)가 행한 무언가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분명히 우리는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원 자체(Eternity itself)가 행한 그 무엇,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능력을 지닌 자를 정복하셨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분의 실재 안에서 우리가 듣고 볼 수 있는 그 무엇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성탄절에 무언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예언들과 성탄절 이야기들을 들을 때 과연 죽음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당신이 이제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굴복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당신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견딜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죽음- 일반적인 죽음이나 다른 누군가의죽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죽음-의 심각성과 관련해 영혼 불멸에 관한 그럴듯한 주장을 함으로써 자신을 속이려 하지 마십시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런 주장들보다 훨씬 더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는 죽음에 맞서는 오직 하나의 주장이 있을 뿐입니다. 그거은 바로 죄에 대한 용서와 죽음의 권세를 갖고 있는 자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our eternity)을 회복하기 위해 일시적 존재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영원하신 분"(the Eternal)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동시에 불멸합니다.
모든 인간은 일시적인 동시에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심판을 받는 동시에 구원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분이 죽음의 살과 피와 두려움에 참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입니다.
* 폴 틸리히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 중에서 " 죽음의 파괴"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5Be1nEri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