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희, 치희 부분에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화희의 후손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가 왕후가 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송양의 딸이 죽은 후에 낳은 해명, 무휼, 여진 등은 누구의 소생입니까?
고구려 왕조 실록 박영규 작가는 제 2의 송비로부터 그 왕자들을 생산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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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문에서 먼저 해야 될 것은 의문의 시작인 내가 화희에 대해 쓴 부분을 다시 검토해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인물열전 부분.
골천세력과 화희는 삼국사기 유리명왕 3년 7월 기록 이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유리명왕 사이의 자식이 이후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와 골천세력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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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표현이 다르지요.
화희가 왕후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화희에 대한 기록은 오직 유리명왕 3년 7월의 것 뿐입니다.
그녀는 왕후가 아닌 그저 계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녀의 자식이나, 또는 골천세력이 계속 권세를 얻었다면, 추존이란 형식을 빌어서라도 그녀가 왕후가 되었다고 기록되었겠지요.
그럼 송양의 딸이 죽은 후에 낳은 해명, 무휼, 여진 등은 누구의 소생입니까? 고구려 왕조 실록 박영규 작가는 제 2의 송비로부터 그 왕자들을 생산하였다고 하는데..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해봅시다.
나는 <화희> 부분이 아닌 <송양>부분에서 이 문제에 대한 아래에 보듯 의문점이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 유리명왕의 왕비가 된 그의 딸은 유리명왕 3년에 죽는데, 이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유리명왕이 늦게 본 3남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다물국왕 송양의 딸 송씨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송양왕의 여러 명의 딸들이 유리명왕과 결혼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송양왕의 성씨를 송(松)씨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제2의 송비가 있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유리명왕 3년에 죽은 송씨로 추정하거나, 아니면 송양왕의 또 다른 딸이 유리명왕과 결혼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유리명왕 3년에 죽은 송씨가 대무신왕의 어머니라면, 대무신왕의 나이가 착오가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또 다른 송씨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여인은 골천인의 딸인 화희가 아니라, 송양왕의 달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든 기록만으로 추정한다면, 대무신왕은 화희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일찍 죽은 도절, 해명, 여진의 경우는 누가 어머니인지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도절과 해명의 경우는 유리명왕의 첫째, 둘째 아들이며 태자로 봉해졌던 인물이기 때문에 유리명왕 3년에 죽은 송씨의 아들일 가능성도 분명 있습니다. 특히 도절은 좀 더 분명히 송씨의 아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유리명왕이 극히 사랑했던 아들이니까요. 죽은 송씨를 생각해서 좀 더 사랑을 주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해명의 경우는 반반인데, 송씨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기질도 도절과 달랐고, 유리명왕이 그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요. 만약 해명이 화희의 자식이라면, 그가 죽은 후, 골천 세력이 몰락했을 가능성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해명이 졸본에 계속 남은 것은 졸본 근처에 있던 골천세력과 연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으니까.
여진의 경우는 태자도 아닌 만큼, 화희의 자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해명과 여진 모두 죽은 만큼, 화희의 자식이 왕의 성공못했기 때문에 화희는 이후 왕후의 추존 등을 받지 못했다고 봐야겠지요.
특히 대무신왕은 분명히 화희가 아닌 송양왕의 외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 2의 송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제 2의 송비의 소생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적 이해를 위한 여러 추론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