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오산,화성의 1일 나들이
2010.4.10.토요일
흰 쌀을 말에 끼얹었다는 세마대에도 봄은 내려 앉았다.
2010년 4월10일 토요일 화성시 융건릉에서 건릉 가는길
지난번 남겨둔 수원화성과
그 인접지역의 문화재를 찾아 떠난다.
*수원화성(창용문,팔달문), 오산시(세마대지), 화성시(융건릉, 용주사)
오늘은 지난번에 관람못한 수원화성 창룡문에서 팔달문까지 돌고
이어서 오산과 화성에 숨은 문화재를 돌아보기로 한다.
8시 45분에 홈에서 출발, 창룡문을 향해 달린다.
잔뜩 찌프린 잿빛 하늘이 정신까지 혼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찬란한 우리문화재를 만나러 간다는 기쁨으로
흐릿한 날씨도 아랑곳없이 마음은 이내 깃털 날아 오르 듯 오른다.
막힘없이 한시간여 달리다 보니 어느새 창용문에 닿게 되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담은 차창밖의 동북공심돈 모습이다.
너른 주차장이 보인다.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군데군데 주차되어 되어 있었고
주택가 골목에도 일렬로 쭈욱 주차되어 있었다.
드넓은 수원화성에는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 되었다.
특히나 외국인 구룹관광객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많이 띈다.
주차장 사용료는
소형이 기본인 3시간에 2천원,10분당 2백원,1일은 만원이다
여기가 연무대 화성열차 시발점이다.
들어오는 열차를 타려고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중이다.
연무대(동장대)로 오른다.
화성 동장대 [華城東將臺]
경기도 수원시 화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있는
조선시대 장대(將臺: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
외국인관광객들의 모습이다.
연무대라고도 한다.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 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할 만한 요충지이다.
연무대 안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멀리 동북공심돈이 보인다.
성따라 쭉 걸어 갈 곳이다.
연무대 뒤켠의 영롱담이다.
영롱대 담 안에서 만난 휴대용 화포
동북공심돈 방향으로 걸어가는 성을 지키는 군관들의 모습이
성벽과 잘 어우러져 절묘한 그림을 자아낸다. 사극드라마 한 장면이다.
성벽 원총안에서 바라본다.
동북공심돈 앞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서성대는 사람들을...
목표지점을 향해 길따라 걸어간다.
동북공심돈
올라가 볼까요?
정문으로 들어간다.
위층으로 가기 위해 가파른 계단으로 오른다.
수원화성과 수원시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통쾌함과 시원함이 발목을 오래 잡는다.
시야를 멀리두며 경치를 즐긴다.
재빛 하늘에 짓눌린 조밀한 수원시내가 숨막히게 느껴온다.
그러나 내려다 보는 시선은 시원하다.
원총안에서 내려다 본다.
바람이 어느쪽으로 불고 있나요?
관람을 마치고 동북노대쪽을 향해 걸어 오다가
뒤를 돌아보며 가족 나들이 풍경을 담는다.
동북노대에서 발길 멈춘다.
부자지간의 정겨운 나들이 모습도 담아 본다.
이어서 창용문을 향하다 오른쪽 성 안으로 고개 돌리니
아름드리 벚꽃나무가 더러더러 꽃을 틔우고 있었다.
봄바람에 수줍어 피어나지 못한 연분홍빛 몽우리에 더욱 매료된다.
벚꽃나무의 한 부분을 이곳에 옮기며 갓 피어난 아름다운 꽃자태에 취한다.
봄꽃에 취해 걸어오다 화성 동쪽대문인 창용문에 이른다.
창용문 내부를 가로질러 간다.
창용문의 여러 풍경들을 본다.
옆계단의 노란아이들이 무채색 하늘가에서
사랑스럽게 계단 오르는 모습이 밝게밝게 눈에 띈다.
반듯한 창룡문..후면에서
창용문 앞에서 배드민턴을 즐기는 단란한 한 가족도 만난다.
목조건물인 동일포루를 향하여 워킹
봉돈에 이른다.
여긴 위험하다며 오르지 말라고..조기 하얀판이 바로 그 경고문이예요.
또 걷는다.
온돌방이 있는 동남각루...
아궁이에 불때면 굴뚝으로 연기가 빠지면서 방이 따끈따끈
보기만 해도 몸이 따끈히 데워지 듯 한다.
생각만 해도 몸에 따뜻한 기운이 흐른다.
참 특색있는 기능적인 각루다.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이곳에도 담겨있다.
노란 개나리꽃이 길손을 반긴다. "개나리꽃아, 반갑다 안녕?"
성벽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여기서 일단 끝이다.
성곽 아래 바로 천변앞에서 만난 남수문터 해설판
팔달문을 가려면 여기서 지동시장앞 지동교를 건너 팔달시장을 가로질러 간다.
지동교 밑을 내려온다.
천변 풀밭에서 비둘기들이 한가로이 먹이를 찾아 먹고 있다.
우측 붉은 길로 쭈욱 오르면 화홍문이 나온다.
천변의 이 물은 방화수류정이 있는 화홍문 밑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다.
돌 위에서 오른쪽 다리 들고 있는 비둘기의 스탑동작이 시선을 끈다.
다리 건너 팔달문를 가기위해 팔달시장을 가로 지른다.
북적대는 아주 큰 시장이다. 저어기 팔달문 지붕이 보인다.
뒤를 돌아본다.
다리 건너기직전 지동시장이 잡힌다.
지동교를 사이에 두고 지동시장과 팔달시장이 이지역 명물인 듯 하다.
성곽과 시장...문화재와 삶이 공존하는 곳
팔달시장통이 요란스러워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서 오십시오"
시장통을 벗어나니 번화한 차도 가운데 팔달문이 떡 버티고 있다.
공개가 안되어 차도 건너 도로에서 바라만 보았다.
팔달문 동종..이미지출처:문화재청
팔달문앞 복잡한 인도 한쪽에 게시된 해설판..사람들 손에 찢기고 긁히고
팔달문 2층 누상에 걸리어 있었던 이 종은
원래 조선(朝鮮) 숙종(肅宗) 13년(1687)에 화성군(華城郡) 만의사(萬義寺)에서
주성(鑄成) 봉안(奉安)하였던 것으로
높이 123cm, 구경 75cm의 육중한 대종(大鐘)이다. 전형적인 전통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종은 음통(音筒)과 단룡(單龍)의 종뉴(鐘유)아래에 안으로 약간 오무라든
종신(鐘身)을 연결한 형태인데, 전체적인 비례와 공간의 구조가 안정감 있으며,
세부적인 묘사 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즉, 음통은 용의 꼬리가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그 상단(上端)에는 활짝핀 꽃을
생동감 있게 장식하였으며, 종신에는 2열원문범자(二列圓紋梵字)의 상대(上帶)와
연화당초문(蓮華唐草紋)의 하대(下帶)를 둘렀다. 상대(上帶)에 붙여서
사실성 있는 풀무늬(草紋)의 4유곽(乳廓)과 연꽃을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종복(鐘腹)에 명문(銘文)을 둘렀다.
또한 이 종은 이보다 1년 전(1686)에 제작된 통도사(通度寺) 종루종(鐘樓鐘)과
크기만 다를 뿐, 활짝 핀 연화장식의 음통표현, 가운데 1개만 돌출시킨 종유(鐘乳),
보살상 및 유곽대(乳廓帶)와 상·하대(上·下帶)의 문양 등 모든 부분의 표현 방법에서
거의 흡사하다. 이러한 팔달문 동종은 17세기 후반의 사실적인 범종양식(梵鐘樣式)을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종일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종뉴는
조선(朝鮮) 후기(後期) 조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1976년 7월 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의 정면모습..양쪽으로는 차들이 다니는 차도로 아주 복잡한 길이다.
이 문은 수원성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수원성 안쪽에 있는 여러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며,
발달된 조선 후기의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는 문화재이다.
다시 발길 되돌려 창용문쪽 주차시킨 곳으로 가야 한다.
팔달시장을 다시 들면서 이가게 저가게 두리번 대며 아이쇼핑을 한다.
하루 일정이 빡빡해서 느긋하게 앉아 점심먹을 시간이 없다.
원래는 느긋하게 앉아서 먹기로 했는데 가얄곳이 많다.
세마대, 융건릉, 그리고 용주사..먹는것보다 보는것을 낙으로 알기에
마침 맛있게 보이는 떡이 눈에 들어 온다.
배낭에 넉넉히 골라 담곤 다시 성벽을 오른다. 창용문을 향하여...
하늘가에 매달린 소나무의 솔방울도 담으며
오염이 많이 된 산의 소나무일 수록 솔방울이 많이 달린다고 한다.
생존의 위협을 많이 느낄수록 여유있게 자손을 퍼뜨리려는
종족보존의 본능이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소나무의 생장과정을 살피시며 쉬어 가세요.
*소나무의 생장과정*
소나무의 씨앗은 눈으로 쉽게 구별하기 힘들다. 크기는 참기름 짜 먹는
참깨 정도의 크기이지만, 일부러 받으려 하지않는 이상 산에서 찾기는 어렵다.
씨앗을 심으면 두개에서 5개의 떡잎이 나오며
떡잎은 일반 소나무의 솔잎과 똑같다.
소나무의 떡잎은 일반적으로 보통 2~3개이다. 잎은 한자루에 2~3개 난다.
5개짜리는 오엽송이라 해서 잎이 5개 짜리 소나무이다.
떡잎이 나와서 자라면 본잎이 나오고 봄에 송죽이라는 새순이 난다.
이것은 대나무의 죽순처럼 쑤욱 올라와서 점차 목질화가 된다.
더불어 송죽이 나오는 자리에서 숫꽃이 핀다.
숫꽃의 가루를 송화 가루라 해서 요리와 한방의 약제로도 사용한다.
이건 암 소나무의 암꽃에 날라가서 수분이 되면 솔방울이 된다.
소나무는 은행나무처럼 암나무 숫나무가 따로 있다.
송화가루는 그 양이 어마어마 해서 수분되지 않는 암꽃은 거의 없다.
수분된 암꽃(나올때부터 모양은 솔방울 모양)은 솔방울이 되고
그안에 여러개의 씨앗이 자라나는 것이다.
솔방울은 씨방이다. 씨방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것들은
감,사과,배,귤 등의 우리가 즐기는 과일들이다.
솔방울이 크게 자라서 가을에 벌어지면 소나무 씨앗이 떨어지게 된다.
소나무는 빠르게는 3년생부터 꽃을 피우기도 한다. 일생동안 많은 씨앗을
뿌리지만 정작 자신의 그늘 때문에 자손이 번성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 초본류 처럼 한해살이가 아니라서 언제 죽는다고 하기는 좀 그렇다.
몇백년을 묵은 소나무가 많으니까
솔방울이 많이 열리는 소나무는 건강하지 못한 소나무이다.
큰 솔방울 몇개 열리는, 3년전 잎까지 달려있는 소나무가 가장 건강한 소나무다.
솔방울이 많이 열리는 이유는 자기가 살기 힘들기 때문에 죽기전에
자손을 많이 퍼트리려는 심산에서 그렇다. *출처:전북농원홈에서
봉돈을 다시 지나가면서 봉돈에 잠시 올라가 궁금한 장면 하나 담는다.
배가 출출해온다. 성벽옆에 위치한 남향공원에서
휴대한 커피와 딸기, 그리고 사온 맛깔스런 떡으로 점심을 떼운다.
일정을 쫓느라 잠시 쉬면서 간략히 끼니를 해결한다.
비가 올 듯 시야가 어두웠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승차하곤 화성시에 위치한 융건릉으로 이동이다.
여인들의 핑크빛 봄바람을 차창밖 멀리 성벽에서 만나 한컷 담는다.
개나리꽃 위 성벽에서 봄을 담는 단란한 가족들도 담는다.
융건릉으로 달리다 길을 잘못들어 독산성 세마대지를 먼저 들리게 되었다.
수원화성에서 20분도 채 안걸리는 지척에 위치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드리이브로 올라오니 산림욕장도 시설되어 있었다.
맑은 날이었음 전망이 참 좋을텐데 뿌연 풍경이 내내 아쉬웠다.
차를 주차시키고 보적사로 조금 더 워킹으로 오른다.
보적사 뒷산에 세마대가 시설되어 있다.
해탈의 문을 지나 보적사에 들게 된다.
보적사
독산성 및 세마대지
李大統領閣下 揮毫
세마대지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독산성을 둘러 본다.
하얀 야생화도 만나고...
세마대지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승용차도 만났다.
잔뜩 찌푸린 날씨로 주변이 어두워지니 자동차 빨간 불빛이 선명하다.
주차장에서 만난 봄처녀들... 산수유,진달래,개나리꽃
보적사 일주문을 삐져 나와 화성시 용주사를 물어물어 찾아간다.
용주사 [龍珠寺]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華山) 기슭에 있는 사찰.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創寺)와 동시에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
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都總攝)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後佛幀畵)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 당우로는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호성전(護聖殿)·독성각(獨聖閣)·
명부전(冥府殿)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梵鐘)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發願),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대웅보전
한면의 글을 옮긴다.
용주사 범종각
범종각 내부에 있는 범종(국보 제120호)
용주사 주련
마지막 일정인 융건릉을 향해 부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융건릉...
융릉, 건릉 안내도
진달래꽃길로 들어 선다.
두 갈림길에서 좌측 건릉은 534m, 우측 융릉은 355m 위치에 있다.
융릉(隆陵)을 향해 걸어간다.
元大皇橋 건너 멀리 융릉이 보인다.
원대향교는 정조가 당시 현릉원을 오가기 위해 밟았던 황구지천의 다리를
1970년에 옮겨놓은 것으로 ‘융릉교’라고도 불린다.
융릉(隆陵)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조선 후기 장조(莊祖 : 정조의 아버지=사도세자)와 경의왕후(敬懿王后)를 모신 능
정자각
정자각은 의식이 행해지는 건물
건물 구조가 한자로 丁-자 형태, (중국에서는 한문 ㅡ자 형태라고)
올라가는 계단이 둘 보이는데
왼쪽 근사한 계단은 신(神)이 오르고 오른쪽 초라한 계단은 사람이 다니는길이다.
정자각내의 祭需陳設圖
능은 원래 양주 배봉산(拜峰山)에서 지금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 이라 한다. 능 주위에 둘레돌(護石)을 돌리고 상석(床石)과
장명등(長明燈), 문석(文石)을 세우고 뒤에는 곡장을 두른다.
융릉의 장명등은 명품으로 값으로 따지면 몇 억까지 간다 한다.
장명등 - 분묘 앞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돌로 만들어 세운 등(4각 혹은 8각).
*옮긴글
신도비각(神道碑閣)
곤신지
융릉관람을 마치고 건릉으로 걸어간다.
건릉
신도비각(神道碑閣)
신도비각엔 하나의 비석에 두분을 간소하게 소개
大韓
正祖宣皇帝健陵
孝懿宣皇后左
부<=
부좌=아내를 남편 왼편에 묻음
건릉 수복방
제를 지낼때 사용하는 물품이나 음식을 마련하던 곳이다.
하루 나들이를 여기서 맺음하니 오후 6시다.
허기가 든다. 그러나 홈으로 돌아가기 바쁘다.
점심때 먹고 남은 떡으로 대충 요기하곤 집으로 향한다.
휴우~ 저녁 8시에 도착..하루 잘 보낸시간에 감사한다.
사진촬영및제작찬란한 빛姬金
印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