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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방학 기간 동안 나는 하반하라는 여행 학교에서 페루, 볼리비아로 여행을 다녀왔다. 본래 여행을 다니던 하반하의 정기수 15명과 이번 방학 기간 동안에 합류한 시즌 13명, 그리고 선생님 8명까지. 총 36명이서 함께하는 여행으로, 나에게는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새롭지만 익숙한 시스템 속에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그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내가 이번 여행 동안 만난 스승님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나의 스승은 박찬영이었다. 찬영이는 전부터 하반하에서 연을 이어 온 나의 돈독한 동생이었다. 그런 찬영이를 내가 스승의 모습으로 만난 장소는 바로 조깅을 달리는 트랙 위에서였다.
하반하에서는 매일 아침 다 함께 조깅을 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대부분의 여행지가 고지대이다 보니 건강상의 문제로 조깅을 뛰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행 맨 처음 리마에서 지낸 두 날은 모두 사람들이 다 같이 트랙으로 나와 조깅을 함께 뛰었다. 아직은 낯선 사람들과 트랙 위에서 만나, 몸을 풀고, 달려 나갔다. 나에게 있어 이 시간은 오랜만에 시작하는 일상처럼 익숙한 것이었지만, 반대로 익숙하기에 긴장되는 부분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반하에서 일상적으로 조깅을 뛰던 당시, 나는 정기수 조깅 1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함께 뛰게 된 찬영이는 현재 기수에서 조깅 1등을 달리는 친구였다. 즉, 나에게 이번 조깅은 스스로의 자존심이 달린 승부였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큰 의미를 지닌,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승부 말이다.
이런 승리를 향한 강박은 자연스럽게 트랙 위로 향하는 내게 긴장을 안겨다 주었고, 이와 상반되게 하반하에서는 마치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트랙 위에 올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긴장감으로 들어 찬 나로서는 전혀 무덤덤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사이에 섞여 일정한 속도로 한 바퀴, 두 바퀴 돌다 보니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곤 익숙한 행위에 몸을 맡기며, 익숙한 한 상태로 온전히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집중했다. 숨을 일정하게 고르고, 동작 또한 최대한 힘을 빼되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는다. 속도 역시 일정하게, 마치 매 순간 사진을 찍듯 나의 모든 동작들을 일정한 순간 속에 가둔다. 그렇게 페이스를 형성하고, 나는 변화하지 않는 순간 속에 스스로를 가두며 최소한의 힘으로 순간순간을 지새운다. 나의 체력으로는 불가능이 여겨질 기록도, 이런 방식으로 달려 나가면 가능하다. 마치 그 기록에 맞게 달리는 사람을 연기하는 것과 같고, 연극의 관객은 직접 달리고 있는 나의 몸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일정한 동작, 일정한 숨, 이러한 일정함의 극 속에 스스로를 가두며 내 몸이라는 관객을 속이는 거다. 전체를 보지 않고서 오직 하나로 전체를 지내는 것처럼. 조깅을 달리다 보면 어느샌가 저절로 체화하게 되는 자신만의 시간 선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나는 오로지 앞만을 보고 달려 나가는 내가 된다.
그렇게 의식 저편에서 스스로를 바라보듯 한 상태로 달려 나가고 있다 보니,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등. 내 앞에서 나와 같이 달리고 있는 누군가의 등이었다. 길쭉길쭉한 기럭지에, 참 잘도 나아가는 등. 그 등은 나와 점점 거리를 벌리며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페이스 안에서 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단은 ‘언젠가 따라잡히겠지.’하는 생각으로 등 뒤를 쫓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등과 내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기는 커녕 더 벌어지기만 했고, 그 때문에 일정히 달려 나가던 내 머리 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다. ‘이대로는 잡힐 것 같지 않은데?’, ‘더 빠르게 달려야 하나?’, ‘그랬다가는 페이스가 망가져 버려서 버티지 못하고 말 거야!’. ‘이러다 정말, 지는 거 아니야?’
내가 머리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등과 내 사이의 거리는 점차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스스로의 생각을 깨부수고 나와야만 했다. 생각뿐이었겠는가?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페이스를 걷어내고, 내 정신력으로 몸을 부여잡고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안정적인 걸음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발을 뻗어 나갔다. 그 대가로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마구잡이로 정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내 정신의 나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온갖 상념을 만들어 내고, 그 상념으로 나를 휘두르려 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오직 앞으로 달려 나가는 데 방해되는 것 투성이였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나의 경험과 육체에 새겨진 기억, 익숙한 동작들이 뭉쳐 만들어진 일정한 페이스 뒤에 숨어 관조하듯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었다. 육체에 부과되는 고통 또한 딱 계산된 수준이었으니까. 마치 잘 쌓은 모래성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과거의 내가 쌓아온 육체가 대신 부담하는 식이랄까.
그러나 이 상한선을 뛰어넘는 능력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내가 쌓은 모래성을 깨부수고 지금의 내가 더 노력해야만 했다. 나는 눈앞의 등을 따라잡기 위하여 온당 내가 감당해야 할 모든 고통을 감당하며 더 멀리, 더 빠르게 나아갔다. 말이야 쉽지 정말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대가로 등과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마침내 노력이 보상 받고 승부를 갈아 엎을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허억 허억. 공기를 타고 흐르는 거친 호흡 소리. 나의 숨소리를 들은 등, 찬영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찬영이 역시 마찬가지로 지치고, 거친 호흡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찬영이는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난 날에도 트렉 위에서 내 앞을 달리던 사람들을, 모두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재쳐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응당 노력한 만큼, 승패는 뒤집혀야 마땅한 순간이라고.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찬영이는 나에 버금가는 노력가라는 것. 승부욕에 불타고, 정말 지기를 싫어하는 강골이라는 것. 나는 여태껏 내가 노력하는 만큼 노력하는 사람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나도 나름 악착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노력하는 상대를 만나고 보니 마치 벽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힘쓰면 이에 자극 받아 더 큰 힘을 쓰는 상대. 나는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승선을 넘는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너무나도 명확한 패배란 사실이었다. 이는 내가 여행을 떠나 오기 전부터 줄곧 맞닥트리고 싶지 않아 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각설하고 이 모든 것을 너머 결과를 마주한 나는 지난 나를 되돌아볼 권리를 가졌다. 조깅 1등이라는 타이틀과 자존심, 승부, 긴장, 노력, 상대, 찬영이. 지난날의 내가 계속해서 상상한 그 순간에 서서, 나는 이 순간을 상상해 온 지난날의 나를 비춰 보았다.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 내디뎠던 걸음들, 그리고 그 끝의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이르기까지. 언뜻 정렬 적이면서도 무심한, 그러나 선명한 순간 속에서, 나는 한 풀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나의 온갖 상상으로 덕칠 했던 그 자리에는, 막상 어마무시 한 절망 같은 게 있지 않았다. 진실은 언제나 덤덤히 나에게로 찾아든다. 그 진실을 마주하는 나의 상태에 따라 때론 악마로 보이기도 하고 천사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정말 열심히, 말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력한 끝에 이 자리에 도달했다. 그러니 이 순간이 너무나 선명하게 와닿았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덤덤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진심으로 노력했다는 걸 아니까. 그걸 온전히 알 수 있는 건 그 노력 위에 서있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찾아드는 진실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당당하지 못할 게 없었다. 졌음에도 그 패배가 나를 패배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나는 이 모든 과정 뒤로 웃으며 찬영이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찬영이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의 노력에 진심으로 경외할 수 있었다. 분명히 나는 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 생각하기론, 내 스스로를 용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Epilogue – 다음 날 아침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조깅을 뛰었다. 이번 여행 동안에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조깅이었다. 이날도 역시 나는 온 힘을 다해 뛰었고,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로 패배였다. 물론 온 힘을 다해 뛰었다고 하는 게 정말 나로서 이룰 수 있는 최대라는 건 아니다. 만약에 내 몸을 조종하는 것이 기계적인 AI거나 마라톤 선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조깅을 뛸 때마다 항상 하는 편이고, 그와 비교하였을 때 내가 만든 결과가 어느 수준인지를 항상 따지고는 한다. 신은 왜 우리에게 죄를 지을 기회를 주었는가. 내가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두 날의 조깅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정말 열심히 달렸다. 그랬기에 무려 두 번이나 패배를 겪었음에도 딱히 주눅 들거나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튿날은 찬영이라는 나의 경쟁 상대를 보다 뚜렷이 상정 한 채로 달렸었기 때문에 이 승부의 결과에 승복할 수 있었다. 찬영이 또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내가 아니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조깅을 다 달리고 난 후, 찬영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 바퀴만 더 뛰어보지 않겠냐고. 조금 더 노력해 보지 않겠느냐고. 이에 찬영이는 승낙했고, 거기에 더해 동원이라는 친구 또한 같이 뛰기로 하여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바퀴의 레이스를 다시 달리게 되었다.
“준비, 땅!”
출발 신호에 맞춰 셋 모두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내 나는 하체에 걸리는 어마어마한 부하에 발목을 잡혔다. 정말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다리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게 조금 달린 것 만으로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마치 다리가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했다. 근육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근육 한 올 한 올을 의지로 끌고 가야 하는 느낌. 순식간에 거리는 벌려지기 시작했다. 맨 선두로는 동원이가 치고 나갔고, 그 뒤로 찬영이가, 맨 뒤로 내가 달리고 있었다. 동원이는 멀어서 알 수 없었지만, 척 보니 찬영이 또한 악으로 깡으로 다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악과 깡이 너무나 대단한 것이어서, 찬영이는 제법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갔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로 치고 가려던 동원이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고통의 굴레에서 튕겨져 나온 것이었다. 찬영이와 나는 그런 동원이를 뒤로 하고 오직 서로를 의식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 나와 찬영이 사이에는 제법 먼 거리가 벌려졌고, 이번에도 승부는 나의 패배를 점치는 듯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힘겹게 달려 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찬영이 또한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찬영이를 따라잡아 보니, 찬영이 역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악바리 다해 치고 나갔고, 찬영이도 이에 자극 받아 치고 나갔으나 결국 내 악바리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렇게 찬영이를 따돌린 채로, 나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 나갔다. 경쟁자가 없는 허한 코스. 그러나 등 뒤에서는 무시무시하게 찬영이가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마치 순백의 설원에 발걸음을 내디디듯 한 걸음 한 걸음 땅을 박차며 나아갔다. 이미 두 다리에 남아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유지하듯 지나치게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로, 앞으로 넘어지려는 무게에 맞게 두 다리를 마치 앞으로 던지듯이 박차고 달려 나갔다. 이미 자세고 페이스고 뭐고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날아가 버릴 듯한 정신을 부여잡은 채로, 직선 코스에서 눈앞에 보이는 결승선만을 향하여 나는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결승선에는 여러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끝에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결승선을 뒤로 한 내 등으로, 하반하의 교장 선생님 써니쌤의 말씀이 닿았다.
“오늘의 강자는 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쓰러졌다. 반쯤은 인위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일어나 있을 기운도 없었다. 나는 써니쌤이 남기신 말의 여운을 곱씹으며, 새삼 강자란 무엇인지를 힘 없는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강자란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강한 힘 을 내는 사람이라는 것.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강자라고 말이다. 나는 써니쌤께 들은 말을 내 스스로에게 직접 되새겨 주며,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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