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김응숙
서쪽하늘의 붉은 빛이 사라지고, 구름은 짙은 회색으로 물들었다. 산등성이가 먹물에 젖듯 어둠에 잠기는 시간, 한 떼의 새들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산기슭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날갯짓이 어둠의 장막 너머로 사라지자 하늘은 잠시 공연이 끝난 무대처럼 텅 비어 버렸다. 그때 1부가 끝난 무대에서 2부의 공연을 시작하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둠보다 더 짙은 날개를 펼치며 또 다른 한 떼의 새들이 산기슭으로부터 날아왔다. 박쥐 떼였다.
박쥐 떼는 학교 운동장을 끼고 반대편 산비탈 쪽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운동장 구석의 전봇대에 매달려 있는 백열전구가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화단가에 앉아 친구들을 기다렸다.
큰 도로에서 한참을 올라와야 하는 산등성이에 조그마한 학교가 있었다. 중학 과정을 가르치는 비인가 학교였는데,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어서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기다란 두 동의 교사가 있었다. 나는 그 학교의 야간부 학생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낮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한 독일계 교육재단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는데, 선생님들은 우리를 2부 학생이라고 불렀다. 어둠이 내린 하늘을 날아오르는 박쥐처럼 우리는 수업을 받기 위해 저녁마다 산비탈을 올라왔다.
밤에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여러모로 박쥐의 생태와 닮아 있었다. 우선 박쥐의 날개처럼 새까만 교복을 낮에는 벽에 박힌 못에다 걸어두었다. 그 모양새가 영락없이 천장에 매달린 박쥐같았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스며들면 교복을 차려입고 박쥐처럼 집을 나서곤 했다. 물론 공장에서 일을 하거나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거나 간에 낮에는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도 박쥐와 닮은 점이었다.
오해를 산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렇다. 박쥐는 모기나 나방 같은 해충을 먹이로 한다. 자연의 생태계에서 곤충의 수를 억제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세간의 박쥐에 대한 평판을 생각하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우리들도 그랬다. 어린 나이에 주경야독을 하는 셈이었는데 알아주는 이가 별로 없었다. 밤늦게 하교하다 보면 불량학생 취급을 받기도 일쑤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쥐와 닮았던 점은 천장에 매달려 지내는 박쥐처럼 우리도 낮에는 거꾸로 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세상에서는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아이가 되었다. 신발공장에서,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받은 월급으로 누워있는 엄마의 약값을 대고 세상을 한탄하는 아버지의 술값을 댔다. 쌀을 사고 간간이 밀린 동생들 공납금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박쥐처럼 날갯짓을 하며 학교로 모여 들었고 아이들로 돌아갔다.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는 백열등에 의지해 우리는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웃고 떠들었다.
거의 천적이 없는 박쥐는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릴 만큼 유전적 변이를 거치지 않고 이 지구상에서 오랫동안 생존해왔다. 그들은 겨울잠을 잘 때 뿐 아니라 낮에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몸 밖의 기온보다 조금 낮은 체온을 유지한다고 한다. 스스로 뜨거운 피를 식힘으로써 태양을 향해 치닫고 싶은 날개를 잠재우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쥐는 자신의 힘으로 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이다. 박쥐의 앞발은 진화를 거듭해 날개가 되었다. 엄지를 제외한 발가락들이 점점 길어지고, 물갈퀴처럼 자라난 피부가 그 사이를 연결해 망토 같은 날개가 만들어진 것이다.
박쥐는 왜 앞발을 날개로 진화시켰을까. 포식자들에게 쫓겨 나무 꼭대기에 이른 한 설치류가 생존을 위한 비상을 꿈꾼다. 태양이 비추는 낮의 하늘은 색색의 깃털을 가진 새들의 무대일 뿐이다. 어디에도 이들을 위한 안전지대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절망의 순간에 밤의 비상이라는 획기적인 의식의 전환이 찾아온다. 마침내 포식자도 새들도 깊이 잠든 밤, 흐르는 달빛에 낮은 체온으로 굳어졌던 관절을 녹이며 박쥐가 힘껏 날개를 펼친다. 달과 별들로 수놓인 밤하늘에 수많은 꿈의 궤적을 그리며.
요즘 모 T.V 방송에서 방영하는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도전하는 무대이다. 지난주에는 말을 더듬는 청년, 사업 실패로 피신 중인 아버지를 둔 여고생, 집안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산업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젊은이가 출연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박쥐의 날갯짓을 본다. 생존을 위해 차갑게 식혀야만 했던 그들의 열정이 그 인고의 깊이만큼 절묘한 노래가 되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노래가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큰 울림이 있는 것은 절망의 순간에도 꿈을 놓지 않고 비상을 꿈꾼 박쥐를 닮았기 때문이리라.
박쥐의 날개를 벗은 지 오래 되었다. 하얀 칼라의 여고생 교복을 입은 두루미도 되었다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백조도 되어가며 대명천지의 하늘을 날기 위해 무던히 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문득 먹이를 얻기 위한 한 낮의 날갯짓 너머로 여전히 벽에 박힌 못에 걸려있는 박쥐의 검은 날개가 보인다. 나는 다시금 절망을 딛고 달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박쥐가 되고 싶어진다. 그 뜨겁고도 신비로운 비상이 그립다.
오늘도 현란한 몸짓의 하루해가 목젖 같은 산봉우리 사이로 넘어가고 산기슭이 어둠으로 깊어진다. 비록 낮의 무대에는 오르지는 못했지만 달빛을 조명 삼아 밤의 하늘에서 힘찬 날갯짓을 하는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절망의 순간은 지나갔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 너머를 꿈꾸는 것은 박쥐들의 특권이다.
첫댓글 김응숙 작가님 글 참 좋아합니다. 학창시절 박쥐처럼 거꾸로 된 세상을 살았더라도
지금은 지식도 풍부하고 글 잘쓰시는 작가님 이세요. 늘 건강하십시요.
거의 일 년이 지난 이 밤, 추억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댓글을 만납니다.
제가 이제 답글을 단들 님께서 보시련만은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 한 자 남깁니다.
이렇듯 보이지않는 격려를 늘 생각하겠습니다.
님께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