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처럼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시장에서 사 온 한치 말린 것이 생각 이상으로 소금덩어리였다.^^ 여러 차례 씻어서 에어 후라이어에 넣어 말렸으나 마찬가지였다. 속에 있는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소금에 절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금에 푹 절여 말린 생선 특유의 고리한 염분 냄새가 집 안에 진동했다. 나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버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아내가 나서서 안에 있는 것들을 제거하고 씻었다. 다시 에어 후라이어에 넣어 건조하니 바삭바삭한 튀김처럼 되어 그런대로 먹을 만 해졌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 아니었다. 내 사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바람을 나누며, 의견을 묻는 일을 통해 전혀 다른 길이 열렸다. 이전에는 알 수 없던 새로운 인도였다. 감사했다.
8시 30분에 마닐라의 누가병원에서 있을 OCT(Optical coherence tomography ) 검사를 위해 아침 7시 15분에 집을 나섰다. 은퇴비자카드 갱신을 위해 은퇴청까지 다녀올 생각이었다. 경비원의 배려로 마을을 통과하는 지름길을 사용할 수 있었다. 가지고 있던 마스크를 감사의 표시로 건넸다. 남부 고속도로에는 평소보다 차가 많아서 9시 넘어서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내는 자신이 검사를 받고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은퇴청 일을 보고 오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병원 앞에 내려주고 나는 그대로 은퇴청으로 갈 수 있었다. 은퇴청 일은 한 사람이 가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적절한 제안이었다.
서류를 접수하던 아그네스에게 은퇴비자 카드 갱신을 1년 하는 대신에 2년 하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큰 기대 없이 말했다. 규정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던 그녀가 돌연 태도를 바꾸더니 사유서를 써서 책임자가 승인하면 2년을 받을 수도 있다며 예외 조항을 귀띔해준다. 감사했다.
신청서와 사유서를 제출하고 기다리는데 담당자가 오지 않았다. 의사를 만날 시간 안에 아내에게 가는 것이 촉박하겠다 싶어 아내가 병원에서 기다리는 중이라 이번까지는 1년을 하겠다고 하니, 아그네스는 직원에게 응급 상황이라며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서류 처리를 도와준다. 감사했다.
한 3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담장자가 와서 사유서에 승인을 했으니 2년 갱신 비용도 지불할 수 있다고 한다. 두 해 동안은 은퇴청에 안 가도 되니 외국 생활에 이처럼 가벼워지는 일이 쉽지 않다. 이내 2년 치 비용을 지불하고, “2024년 11월 만료”라는 붉은 글씨가 적힌 은퇴비자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감사했다.
답례 차 가지고 있던 마스크를 선물하고 나오던 길에 여행 허가서 발급을 문의하니 온라인 시스템이 문제가 생겨 직접 사무실에 와서 발급받아야 한다고 한다. 왕복 4시간 거리다. 사정을 얘기하고 다른 길은 없겠느냐고 물으니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며 연락처를 준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처리한 셈이다. 감사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통화했다. 의사와의 약속이 1시였는데 11시 30분쯤 된 때였다. 먼저 식사하고 의사를 만나자고 하니 바로 아내의 순서가 되었다고 한다. 의논하지 않았으면 함께 의사를 보지 못할 뻔했다. 주차하고 올라가 의사를 함께 만날 수 있었고, 시(Sy)는 아내의 상태가 '베리굿!'이라고 하면서 3개월 후에 다시 OCT 검사를 받아보자고 한다. 감사했다.
가볍고 평안한 마음으로 시장을 보고, 통닭구이 한 마리를 사서 집에서 가져간 밥과 함께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니 2시쯤이다. 평소 같으면 병원에서 의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까지 처리한 것은 매우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입을 다물고 의논하지 않은 채 그들의 일정이나 규율을 따라 움직였다면 이처럼 물 흐르듯 일들을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잠 20:18) 지혜는 같은 상황 속에서 가장 좋은 길을 찾아내며, 비협조적인 상황들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조정하는 힘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를 위해 할 일은 단순히 입을 열어 나의 상황이나 바람을 곁에 두신 누군가와 나누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의견을 묻는 것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고,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주변의 누군가에게 나를 도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그 누군가가 바로 주님이 나를 도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일 수 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 이를 통해 주님은 우리가 상황의 탑승자가 아니라 운전자가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