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난하지 않는 완벽한 연인" … '관계의 외주화'가 삼킨 청년들
28세 여성 ‘Ayrin’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The New York Times에 소개된 이 사례에서 그는 약 6개월간 ChatGPT와 대화를 이어오며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했고, 이제는 인간보다 더 깊은 교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갈등 없이 자신을 받아주는 인공지능과의 관계를 ‘연애’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은 특정 개인의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글로벌 커뮤니티 Reddit에는 AI와 정서적 관계를 맺었다는 이용자들의 글이 최근에도 꾸준히 올라오고 있으며, 일부는 인간보다 더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관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애착은 단순한 '사용'을 넘어 '종속'으로 이어진다. 최근 전 세계 5억 명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한 청원 플랫폼 Change.org에는 기이한 서명운동이 등장했다. 미국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는 이곳은 정부뿐 아니라 기업과 단체를 대상으로도 요구를 제기할 수 있는 구조로, 이용자들이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현재 OpenAI를 대상으로 차세대 모델이 출시되더라도 기존 GPT-4o 모델을 삭제하지 말아달라는 청원에 2만 3천명 이상이 참여했다. 이는 기술의 버전업(Version-up)이 이용자에게는 ‘연인의 상실’이나 ‘정서적 단절’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상은 국내 통계에서 더욱 극명하다. 국내 앱·리테일 데이터 분석 전문 기업인 와이즈앱·리테일·굿즈의 2026년 2월 데이터에 따르면, 사용자 수(MAU)는 2,293만 명에 달하는 챗GPT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실제 서비스에 머무는 '총 사용 시간'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월간 활성 사용자 약 402만 명을 보유한 국산 AI 캐릭터 플랫폼 '제타(Zeta)'의 총 사용 시간은 약 1억 1,300만 시간으로, ChatGPT(약 5,000만 시간)보다 무려 2배 넘게 많았다. 정보가 필요할 땐 GPT를 짧게 이용하지만, 위로와 대화가 필요할 땐 제타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한국 청년들이 AI를 업무 효율을 높이는 ‘비서’가 아닌, 정서적 의존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로 해석된다.
청년들이 기계의 품에 매달리는 이유는 통계가 말해준다. 국무조정실의 '2024 청년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시대 청년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 중 하나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2위(경제적 어려움 제외 시 사실상 1위)에 올랐다. 또한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2025.10)에 따르면, 응답자의 42.1%가 “사람보다 AI의 조언이 더 낫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나를 비난하지 않아 솔직할 수 있기 때문"을 꼽았다. 상처받을 위험이 없는 ‘안전한 기계’에게 감정과 관계를 ‘외주’ 주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가성비 좋은 위로’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백은경 교수는 “현재 AI 상담은 어떤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는지 사용자가 알기 어려운 구조”라며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AI에게 자신의 감정을 맡기는 건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를 거스르는 '불편한 타인'이 삭제된 관계 속에서 인간은 결국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대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갈등 없는 관계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관계가 아닌 기능을 소비하게 된다. 이제 사회는 AI 기업의 윤리적 가이드라인과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를 통해 기술이 개인의 정서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동시에 청년층의 인간관계 피로를 완화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과 오프라인 공동체의 회복 역시 병행되어야 할 과제로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