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전 한 여인이 소포로 보내온 바디크림이 있었다. 포장도 뜯지않아 그대로였던걸 뒤늦게야 발견하고 가끔 샤워 후 바르곤 하는데 그리 강하다고 못느꼈던 향이 꽤 오래 지속되기에 밤새도록 내게서 맴돈다. 이젠 그녀의 이름도 모르겠고 연락처도 없지만 그녀가 보내준 향기는 여전히 내게 남아서 그때의 그녀 마음을 생각케 한다.
2 ..안 차리겠다고 다짐했던 제삿상은 결국 엄마가 살아계신 동안은 차리기로 했다. 이번 설날은 영도가 떠나고 처음이라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서운해서 내가 차리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못박으셨다. (나 죽기 전 까지는 차려야지 뭘..) 하...괜히 말했네. 며느리 생활 정리해서 이젠 좀 편해지나 했더니 친정집 와서도 부엌떼기네.
3 ..엄마랑 밥 먹으며 군청앞의 순댓국집 아가씨 얘기가 나왔다. 예전에 왈숙아지매가 영도를 소개시키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던 아가씨여서 나는 일부러 그집에 가서 순댓국을 먹으며 그녀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 내 몸무게를 감안해서 그녀의 무게를 짐작하자면 .. 족히 85키로는 넘을 듯? 나는 너무 생뚱맞은 아지매의 제안에 웃음이 났다. 내 생각엔 영도한테 말 꺼냈다간 제정신이냐고 눈흘김 받을 일이었다.
엄마, 남자에겐 어쨌거나 이쁜게 우선이래.. 착하고 살림 잘하고 똑똑하고 이런건 둘째 문제고.. 우선 첫인상부터 호감이 가야 뭘 더 지켜보고 말고 할 일이지. 허벅지가 영도 허리만 한 여자를 영도가 좋아라 하겠어?
4 ..부동산 문제로 상의를 할까해서 오랜만에 김씨에게 전화를 했다. 어지간해선 전화도 안하는 김가야가 전화를 해왔으니 그는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나는 그간 염려해준 것도 고맙고 하여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제안했더니 대뜸 지금...식당으로 가서 밥먹자는 거에요? 요즘 누가 식당에서 밥을 먹어요? 다들 집밥을 해먹어야죠. 이런 시국에 어딜 돌아다녀요.? 가야씨 제 정신이에요?
가만..이 사람이 나보다 10년인가 12년이 연상인데. 코로나로 아주 큰 걱정이어서 식당도 못가고 그저 집에서 혼자 밥 해드신다 이건데.. 내가 한마디 하면 20마디로 대꾸하는 사람이라 가능한 전화도 피하는 사람인데 밥 한 끼 먹자는 제안도 저리 겁먹고 벌벌 떨기에 순간 전화를 끓고 싶어졌다. 얼마나 건강히 오래 살고 싶으신건지 원...
(네..알겠습니다. 그럼 코로나 다 사라지면 그때 뵙죠..내후년쯤에나 뭐..^^ 잘 지내세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쓸데없이 말 많은 남자. 질색이다..
5 ..욕실 거울이 그 무슨 세제를 써도 얼룩이 안 지워져 오븐 크리너까지 동원해서 뿌려보았다. 살짝 한 방울이 내 손등에 떨어졌는데 바로 화상을 입어 쓰라리고 아팠다. 이거 들이켰다간 죽겠구나..싶었다. 순간 20살 시절에 농약을 먹고 죽어버린 태열이가 생각났다. 여자친구가 자기 눈앞에서 택시에 깔려 죽는걸 본 이후 꿈에 그녀가 자꾸 나타난다더니 며칠 가지 않아 제초제를 마셨다고 했다. 기도가 다 타들어가 가래가 끓어도뱉어낼 수조차 없댔는데. 보름 정도를 고생하다가 태열이는 눈감았다. 언제 죽음이 닥쳐와도 뭐 그러려니 하고 수긍해야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이런 식의 숨막히는 죽음은 정말 달갑지 않겠다.. 수술실에서 깨어나며 가래를 못 뱉어내 몸이 뒤틀리게 답답했던 기억이 아직도 소름끼치게 싫다. 독극물 복용으로 죽는건 아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