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막내 주은이는 가족 중에 자기 주장이 가장 뚜렷하다. 가장 어리지만 최종 결정권자요, 대장이었다. 외식으로 닭튀김을 먹자고 우리의 뜻을 모은 후에도 주은이가 '피자'라고 하면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피자를 먹으러 갔다. ㅎㅎ 그 부분을 존중하다 보니 부모의 의견이 종종 받아들여지지 않은 때도 있었다. 주은이가 초등학교 때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가족이 함께 보았으면 했다. 다들 좋다고 하는데 주은이는 싫다고 했다.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 말 한 번 들어주라', 사정했다.
어렵게 영화를 보게 됐으므로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주은이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던 주은이가, 아니 내키지 않은 표정이던 주은이가 점점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영화이지 않는가? ㅎㅎ 영화 도중에도, 마지막 부분에서도 주은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영화를 마치자마자 내 품으로 파고들면서 말했다. “아빠, 고집 피웠던 것 미안해. 너무 좋은 영화야.” 주은이가 자기 생각 너머에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그 후로도 아빠나 엄마의 의견이 주은이의 것보다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때는 어김없이 그 영화가 등장했다.
주은이가 지난 4월에 친구 두 명과 산티아고를 다녀왔다. ‘서른,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브이로그를 유튜브에 올렸는데, 얼마나 뜻깊은 시간을 보냈는지를 본다. 다녀와서는 평생에 좋은 선물이었다고, 자신의 삶은 산티아고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했던 여행은 아니었다.
친구가 처음 산티아고 여행 계획을 나누자 주은이의 반응은 “거길 왜 가?”였다. 한 마디로 고려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산티아고를 다녀오는 것이 주은이에게 매우 값진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으나 같은 반응이었다. “거길 왜 가?”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주은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뭐,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고?” “그래, '사운드 오브 뮤직'보다 더 나아!” 화성처럼 멀리 있던 산티아고 여행이라는 주제가 주은이의 생각 속으로 침입하듯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만만치는 않지만 가면 좋은 이유들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마음도 열리기 시작했다. 산티아고가 그 마음에 씨앗처럼 심기더니 점점 자라났다. 마침내 반드시 다녀오고 싶은 곳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친구와 미국에서 온 친구, 이렇게 어려서 필리핀에서 만난 세 소꿉친구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기로 뜻을 모았다.
그 여행에는 스위스가 포함돼 있었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알프스의 하늘을 난 것은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했다. 나는 그곳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실제 무대인 것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주은이가 가져온 선물은, ‘에델바이스’가 새겨진 나무로 된 잔 받침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트랩 대령이 가족과 함께 부르던 노래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국화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가진 계획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증표였다. 무엇보다도 자기 주장이라는 성장의 장애물을 치워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크고 놀라웠다.
지난달,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요청하자 트리니다드 할머니는 그간 정이들대로 든 집을 떠나는 것은 못할 일로 받아들이며 크게 슬퍼하고 낙심했다. 산마리노는 3.000개가량의 연립주택이 들어선 곳이지만 이사할 집을 찾기도 막막한 상황이었다. 교회는 '더 좋은 곳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선포하고 기도했다. 실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집이 나타났고, 할머니의 조현병도 큰 차도를 보여 손녀인 다이렐과 한 시간씩이나 얘기 나눌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예전처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빨래, 청소, 음식 등의 집안 일을 하실 정도니, 거의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셨다. 온 가족 안에 매일 감사가 그치지 않는다.
잠언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아버지는 간절함을 넘어 숫제 사정하신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잠 7:1,2) 신실하신 아버지의 약속이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33)
하나님은 더 나은 계획을 가지고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우리 아버지시다. 다이렐의 옛집과 지금의 새집처럼, 좋으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가시는 우리의 삶은 전과 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내 좋은 생각 내려놓고 순히 이끌리면 경험으로 알게 되는 전혀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다. 풍성한 감사와 기쁨의 삶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