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봤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전철에 올라 자리에 앉자 마자 보이는 광경.
깨끗하게 껍질이 벗겨진 통통하고 윤기나는 삶은 계란 한 개가 통째로 막 그녀의 손 안에서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삶은 계란이네?'
무심히 그러다가
'아니 삶은 계란을 전철에서?'
화들짝 놀라 맞은 편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무릎에는 있는대로 주둥이가 벌려진 배낭 한 개가 놓여 있다.
계란을 다 먹은 여자. 배낭 속을 뒤지고 있는데 물병을 번갈아 세 개나 들었다 놓는다. 텀블러, 프라스틱 물통, 그리고 보온병으로 보이는 것들은 크기가 중짜는 될 것 같다. 병 하나를 들어 물을 마신 그녀는 또 배낭 속을 마구 뒤지더니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낸다.
이번에는 그 속에서 꺼내든 비닐팩. 배즙이라고 써있다.
다행히(?) 통로엔 사람이 별로 없어 그 모든 광경을 흥미있게 지켜볼 수 있었다.
한 손에 배즙을 든 그녀. 다시 배낭 속 다른 주머니를 여는 눈치다. 이번에는 뭐가 나올까.
지켜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서슴없이 꺼내든 커다란 가위. 망설임도 주저함도 남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여자는 가위로 비닐팩을 얌전히 잘라낸다. 가위질이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흘러넘치지 않을만큼 신중하다.
서두르지 않고 한 손으로 가위를 다시 집어넣더니 배즙을 마신다. 마치 집안 식탁에 앉은 듯 무리가 없이 편안해보인다.
전철은 쉼없이 달리고 도대체 몇 정거장이나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좀 멀리 가는 터라 맘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루할 새가 없다.
빈 비닐팩과 잘라낸 조각을 조심스럽게 배낭 구석에 챙겨넣는다. 이제는 끝났겠지 하는 순간 또 무언가 나온다. 약봉지다. 사각의 투명봉지 속에 하얀 알약 몇 개가 보인다. 천천히 약봉지를 찢어내더니 입안에 털어넣고 물병을 꺼낸다.
다시 배낭을 뒤적거리기를 한참, 식사도 끝났으니 이제 배낭을 닫으려니 했더니 또다른 주머니를 꺼낸다. 컴팩트를 열고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화장을 고치려나 보다. 그런데 다시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갑자기 귓전의 머리카락을 힘껏 뽑아낸다. 아니 족집개까지? 거울에 흰 머리가 한 올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얼굴을 고치기 시작한다. 바르는 동작도 역시 전문적(?)이다.
삼십대 중반, 젊은 여인의 저 태연하고 당당한 태도. 강적이다.
전철에서 강적을 많이 봤지만 저 여인은 최강이다.
사람들이 많이 타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지고 내 호기심도 막을 내렸다.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놓고 구경하는 나, 그 배낭에서 이번에는 뭐가 나올까 궁금하기까지 한 관객이 있었으니 그녀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설마 이런 걸 보고 관음증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2)
하필
내가 앉아있는 내 앞에 서서 그녀는 마주 선 젊은이의 입술에 수도 없이 화살키스를 날린다.
마치 새의 부리처럼, 상대의 부리를 톡톡 건드리듯이.
그 광경이 눈에 보이는 순간, 부자연스러워지는 내 시선. 안 쳐다보려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지
쓸데없이 궁금해져 또 슬쩍 눈길이 간다. 화살키스를 훔쳐보는 화살시선이다.
어떻게 생겼을까. 얼핏 보기에도 연상연하커플. 여자의 계속되는 입술세례에 남자는 동요가 없다.
한 번 신경이 쓰이니 앉아있는 게 불편하다. 마침 내릴 때가 되어 일어서며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는 못마땅한 웅얼거림을 내뱉는다. 왜 아직도 그런 풍경에 속이 뒤집힐까.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련만.
전철로 이동하는 그 잠깐의 시간, 아니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타고도 한 계단 차이를 두고 마주 서서 포개지는 젊은이들, 그 짧은 순간조차 참을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정념을 공감하지 못할 만큼
나는 늙어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이제 설 데를 잃어버린 낱말 하나가 떠오른다. 풍기문란!
고딩인지 중딩인지 분간할 수 없다. 바깥날씨는 초겨울의 차가운 날씨. 전철 문이 열리자 두 소녀가 빈 자리로 가서 앉는데 둘 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얼굴은 가부끼 인형처럼 하얗게 분칠을 했다.
한 소녀, 너무도 짧은 교복스커트가 아슬아슬하다.
'어휴 춥겠다.'
패딩점퍼 속으로 교복이 보인다. 아마 상체만 따뜻하면 그만인 모양이다. 다리가 시퍼렇게 얼든 말든.
그런데 옆 친구는 더 가관이다. 신고 있는 검정 스타킹이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다 뜯겨서 형편이 없다. '저걸 어째?'
여분 스타킹이라도 갖고 있으면 주고 싶어진다. 바라보는 내 맘이 조마조마한데 그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뚫어진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 넣어 자꾸 잡아당기고 있다.
똑같이 새빨간 입술은 아랑곳없이 조잘조잘, 쉴 새가 없다. 스타킹에 전선이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우리 세대.
여기저기 찢어지고 너덜너덜한 청바지가 패션인 것처럼 그새 뚫어진 스타킹도 유행이 되었나?
하루에도 몇 번씩 여자들은 화장을 고친다. 식사 후 립스틱을 다시 바르며 정리하는 일은 예의에 속한다. 하지만 전철에서 본격적으로 화장이라는 대공사(?)를 거침없이 벌리는 젊은 여인이 점점 늘고 있다.
화장품 파우처를 가방 위에 펼쳐놓고 얼굴에 수도 없이 분첩을 두드리는데 거의 무아지경이다. 꼼꼼히 손거울에 비쳐보며 마치 퍼즐조각을 맞추듯 빈틈을 메워 나간다. 눈을 치뜨고 아이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칠한다. 용하다. 전철의 덜컹거림에도 비뚫어지지 않는다.
누가 보는 자리에서는 립스틱 하나도 못 바르는 사람의 눈에는 경이 그 자체다.
임산부, 표 안 나는 초기 임산부를 위해 마련한 핑크빛 좌석. 비어 있을 새가 없다. 심지어 그 옆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굳이 그 자리에 앉는, 심지어 젊은 남자들. 앉으려다 멈칫 지나치는 쪽은 오히려 여자들이다. 아저씨도 나이 든 사람도 청년들도 무심하기만 하다.
안내 방송이 나와도 오불관언. 건너편에 앉아 레이저 눈빛을 암만 발사해도 소용없다.
무엇으로든 어떻게든 부끄럼이 많았던 시절은 이제 구세대 유물이 되었나보다.
사람들이 아니고 전철이 부끄럼이 없어졌다는 편이 나을까?
첫댓글 잘 읽고 빌려갑니다
아공!
공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 걱정하는 우리는 구세대라고 치부하고 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