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낡은 듯한 오렌지빛 차양아래 격자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귤빛 조명,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모습이 보이고
담장을 가득 덮은 넝쿨, 앞에 놓인 낡은 벤치.
어느 사이에 AGIO를 스쳐간 세월이 어스름 속에 고풍스럽다.
한때는 자주 드나들던 집, 처음 갔을 때 가본 적도 없는 아일랜드의 어느 펍을 연상했다. 무엇보다도
제라늄 화분의 붉은 꽃이 격자창문과 어울리는 운치가 좋아 보여 집에서 키워보기도 했던 기억 .
집의 격조 따라 그랬을까, 하늘같은 선생님과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다고 느껴졌던 문단의 선배들과도
잔을 부딪히며 나누었던 황금빛 독일 맥주의 알싸한 맛, '무엇과 무엇을 가미하여 어떻게 조리했다'는
긴 설명문의 메뉴에 당황했던 시간,
커다란 화덕에서 갓 구어낸 피자의 담백한 맛.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은은하게 비추던 조명처럼 어느새 슬그머니 꺼져 버린 듯, 남은 게 없다. 우리는 다만 만남의 즐거움과 달그락거리던 포크소리, 맞부딪치던 술잔과 떠도는 버터냄새 같은 것에 취해 그 시간을 향유했을 뿐인가.
한때는 그곳에서의 만남이나 약속이 특별했던 적도 있었다. 취향저격이라고 할까. 그 집의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얼핏 봐도 조금은 쇠락한 외관과 손님을 부르는 듯 서있는 메뉴판 거치대가 당당하던 모습과 달라져 보인다.
세월도 세월이지만 이 집도 코로나의 유탄을 맞았을 것이다. 예전엔 쉽게 갈 수 없을 것 같이 특별해 보이던 장소였다.
어스름 저녁, 문득 그 집 앞을 지나며 지나간 날들을 생각한다. 한때나마 호사처럼 누리던 시간들, 반가운 얼굴들. 이제 영영 볼 수 없게 된 누군가도 떠오른다.
우리 삶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추억으로 발걸음을 붙든다. 불빛 따스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오래 전 일을 소환해보는 시간,
아직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AGIO가 있어 그 시간들이 잠깐 화양연화처럼 아련하다.
첫댓글 이복희 선생님 멋져요!
너무도 많은 영상이 이어지며. 보이는것 같아요.
마치 제가 그추억들을 공유한 사람이라도 되는듯요. 잠안오는밤 저도 아련한 추억을 더듬어 보렵니다.
코로나 한창일 때 인사동에 나갔다 그집앞을 지나면서 느꼈던 감정입니다.
멋진 분들이 많이 모이던 장소라 풀기 없어진 모습이 짠해서 말입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찾을 수 없어 오래 전 사진을 올렸더니 영 아니네요. ㅎㅎ
가끔 아는 척 해주셔서 저는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