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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치욕이라고 일컬어지는 1910년의 ‘경술국치’. 일본은 그것을 한일 두 나라가 합친다는 의미에서 ‘한일합방’이라고 불렀으며,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명칭이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던 때가 있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한국이 빠르게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궤변을 펼치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인과 학자들도 존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아무리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더라도, 국권을 잃고 36년 동안 비참한 현실에 놓여있었던 역사를 망강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는 당장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대적 토지 측량을 명분으로 농민들의 땅을 수탈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세운 총독부를 중심으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과 탄압을 일삼았던 것이다.
항일의식을 저지하기 위해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하며,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중들의 침묵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19년 3.1운동은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이에 당황한 일제는 잠시 문화정책으로 민중들을 회유하려 했다.
경술국치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벌여나갔으며, 특히 상해의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이 뚜렷한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총독부의 ‘문화정책’이란 명분 아래, 상대적으로 다양한 문화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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