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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중반, 필자는 동남·동화·대동·경기·충청은행 등 5개 은행의 사무총장·회장을 맡아 퇴출의 부당성과 소액주주 구제, 은행원 고용 승계를 위해 한쪽으로는 거리에서 집회를, 다른 한쪽으로는 법정에서 투쟁을 병행했다. 상고심을 앞두고 만난 대법관 출신 이용훈 변호사는 무료 변론을 맡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법리로만 보면 소급입법과 과잉금지 원칙 위반이어서 당신 쪽이 이겨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경우에도 기각될 것이다. 지금은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요구가 법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초법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92만 명의 주주와 1만 4,000명의 은행원을 대표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전에 적힌 조문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해 필자는 미국의 힘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이재명 정권과 민주당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그 쓰라린 경험이 더 가혹한 현실로 되돌아올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든다.
IMF 외환위기의 실상 — 법 위에 군림한 준초법적 질서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원·달러 환율은 800~900원대였다. 그해 12월 단 한 달 만에 환율은 장중 2,000원 가까이 치솟았다. 달러로 빚을 조달한 기업들은 앉은자리에서 상환 부담이 두 배 이상 폭증했다.
국내 종금사들은 해외에서 6개월짜리 단기 자금을 빌려다 수년짜리 장기 대출로 운용하고 있었다. 만기가 되면 자동으로 연장된다는 과신 위에 세워진 구조였고, 그 믿음이 무너지는 데 불과 수 주가 걸렸다. 고금리 신용경색으로 흑자 기업조차 단기 차입금을 회수당해 연쇄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기의 배경에는 내부 구조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부 학자들과 저술(쑹훙빙, 『화폐전쟁』 등)은 국제 투기자본이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단기 자금을 일시에 회수하고, 이후 IMF 창구를 통해 혹독한 구조조정 조건을 관철시킨 흐름을 하나의 '설계된 구조'로 보는 견해를 제시한다.
다만 주류 학계는 국내 정책 실패·대외부채 구조·신용등급 하락이 결합된 복합 위기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어느 시각이 맞든 한 가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1998년 2월 미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본국에 전송한 비밀 전문에는 "한국이 IMF 및 미국의 요구를 철저히 이행하는가"가 그해 최우선 정책 목표로 명시돼 있었다는 점이다.
형식상 국내 법 질서는 유지됐지만, 실질적으로 IMF·미국의 조건이 사법과 행정을 압도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 금융자본은 평가절하된 원화 덕에 국내 우량 자산을 헐값에 취득했다.
▐ 1997~1998년 IMF 외환위기 주요 지표
지표 위기 전 위기 정점 결과
원·달러 환율 약 850원 장중 약 2,000원 기업 달러부채 2배 폭증
금리 연 10%대 연 20%대 단기차입 회수 → 흑자기업도 도산
가용 외환보유액 약 305억 달러 39억 달러(최저) 사실상 국가부도 직전
공적자금 투입 — 약 200조 원 세금으로 금융권 구제
실업률 약 2%대 7%대 이상 중산층 붕괴·빈부격차 확대
당시 정부는 IMF 구제금융 조건 가운데 하나였던 금융구조조정을 위해 경영평가를 실시했다. 원래라면 국가 산업화 자금의 창구 역할을 해 온 제일은행·서울은행 같은 대형 은행이 1차 대상이었지만, 이들 은행이 거래하던 대기업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부실이 적던 신설은행 동남·동화·대동은행에 경기·충청은행까지 묶어 퇴출 대상으로 삼았다.
필자가 한일은행에서 옮겨간 동남은행은 교통카드 도입, 인터넷 상거래 결제시스템 구축 등 개혁적인 시도를 하던 은행이었지만, 정부는 경영평가 과정과 기준을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몸집이 작은 은행들을 희생양으로 내세운 셈이다.
그 결과 국내 은행들은 기업금융·투자금융보다는 가계대출 중심의 리테일 뱅킹에 치우치게 되었고, 결국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주택담보대출에만 매달리는 전당포식 영업”이라고 비판할 정도의 구조가 굳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당시 정부가 단행한 금융구조조정은 소급입법과 과잉금지 원칙 위반 소지가 뚜렷했다. 그러나 법원은 "국가를 위한 법적 안정성"이라는 명분 아래 모조리 기각했다.
이것이 IMF 체제의 현실이었다. 그 대가는 92만 주주와 1만 4,000명 은행원은 물론, 1998년 한 해에만 실업자 약 149만 명, 실업률 약 7%로의 급등과 함께 기업 부도(도산) 22,828건,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의 약 두 배에 이르는 참혹한 피해를 일반 국민이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결국 한국의 대통령과 정치인, 관료들이 미국에 찾아가 구걸하다시피 구제금융을 요청한 뒤에야 비로소 국가부도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1998년과 다르다. 외환보유액은 4,280억 달러로 대폭 늘었고, 변동환율제가 정착돼 있으며, 금융기관의 건전성도 그때보다 강해졌다. 그러나 이 방어력이 유지되려면 전제가 있다. 미국과의 동맹 신뢰,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협력 지위,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상적 작동이다. 이재명 정권이 지금 이 전제들을 하나씩 허물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재명 정권이 하는 일 — IMF의 기억은 사라졌는가
미국은 6·25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한국을 지켰고, 자유무역 체제 안으로 이끌어 오늘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1998년 IMF 위기 때도 한미동맹이 공고했기에 구제금융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은 겉으로는 친미를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친중·종북 기조가 정책 결정을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다수 동맹국에 호르무즈 해상연합 참여를 요청했을 때 한국의 대답은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관망이었다. 주요 동맹국들이 이란전쟁 공조 의사를 밝히는 시점에도 한국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미 관세 인하를 위해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대미 투자를 자청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특별법 입법은 미루고 있다. MOU(양해각서)는 법적 구속력 없는 의향서에 불과하다. 약속은 크게 하고 이행은 미적대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다.
▐ 이재명 정권의 한미동맹 훼손 우려 행태
영역 주요 행태 (보도·발표 기준) 동맹 신뢰 영향
군사·안보 한미일 훈련 거절·호르무즈 관망·9·19 합의 복원 추진·국방비 1.3조원 미지급 미·일 단독 훈련 확대, 동맹 신뢰 훼손 우려
외교·친중 방중 4요4답 의혹, 서울-평양-베이징 고속철 검토, 중국인 무비자 일방 허용 미 국무부 왕후닝 경계 선언, 선관위 의혹 주시
통상·투자 3,500억 달러 대미투자 MOU 후 특별법 미입법, 핵잠수함 협상 지연 트럼프 거래적 동맹관 하 관세 재인상 협박
선거·투명성 선관위·A-WEB 중국 배후 의혹, 망분리 해명 논란, 전자개표기 검증 거부 황교안 전 총리, CPAC에서 미 보수진영에 수사 촉구
사법·거버넌스 검찰청 폐지·대법관 증원·법왜곡죄 강행 — 삼권분립 훼손 우려 민주주의 거버넌스 훼손은 미국이 안보리스크로 간주
※ 표의 '주요 행태'는 보도·공식 발표를 기준으로 정리했으며, 일부는 의혹·검토 단계임.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동맹국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요건은 선거의 공정성과 사법부의 독립성이다. 황교안 전 총리가 CPAC에서 미 보수진영에 선관위·A-WEB 문제의 수사를 촉구했고, 미 국무부 존 밀스 차관보가 왕후닝을 전 세계 선거 개입의 핵심 인물로 지목하며 한국 선관위의 사이버 취약성을 공식 제기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정권이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 동맹의 자격을 내려놓는 것과 다름없다.
구조적 취약성 — 이미 시작된 청구서
한국은 에너지·안보·식량·공급망 거의 전 분야에서 미국의 협력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구조다. 수입 원유의 69.1%가 중동에서 도입되며 그 95%가 호르무즈를 통과한다(한국무역협회, 2025년). 이란전쟁으로 호르무즈가 사실상 봉쇄된 지금, 한국이 공공차량 5부제를 35년 만에 부활시키고 샤워 시간 단축을 권고하는 현실이 그 취약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은 평시부터 대미 에너지 자산에 직접 투자해 왔고, 전쟁 발발 직후 이데미츠 코산이 미국 LNG 자산에 5억 달러를 즉각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전 준비 덕분이다.
한국의 비축유 방출 규모는 2,250만 배럴로 일본(7,980만 배럴)의 28% 수준에 그쳤다. 여기에 반도체·첨단산업에서는 칩4(Chip4) 동맹과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의 공급망 협력 지위가 흔들릴 경우, 에너지 위기보다 훨씬 광범위한 경제적 타격이 현실화될 수 있다. 이것은 IMF식 구제금융보다 더 무서운 '고사(枯死) 압박'이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정권이 대미 투자 확대와 외교 접촉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동맹은 위기가 닥쳤을 때 전화 한 통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평시의 신뢰 투자, 안보 협의체 참여, 투명한 선거 시스템이 쌓여야 비로소 미국이 한국을 우선 협조 대상으로 고려한다. 500조 원짜리 투자를 자청하면서 특별법은 미루고, 호르무즈에는 관망하는 행태가 지속되는 한, 신뢰는 쌓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30년 — 일본은 버텼지만 한국은 다르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일본의 자산버블이 붕괴됐고, 잃어버린 30년의 서막이 열렸다. 그러나 일본은 기축통화에 준하는 엔화 보유국이고, 막대한 해외 자산과 거대 내수를 갖추고 있었기에 30년을 버틸 수 있었다.
한국은 그 기초체력이 없다. 한국의 정부·가계·기업 부채를 모두 합한 총부채는 6,500조원으로(비금융부문 신용)’, 2024년 3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약 2.5배(248%) 수준이다. 여기에 비기축통화국이고, 가계부채는 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며, 에너지·식량 자급률은 최저 수준이다.
만약 미국과의 갈등이 고착화되면서 환율 1,600~1,700원대 장기화, 에너지 비용 급등, 공급망 배제가 동시에 작동할 경우, 일본이 30년에 걸쳐 겪은 것을 한국은 훨씬 짧은 시간에, 훨씬 혹독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고다.
원·달러 환율은 3월 27일 1,511원을 넘어서 1,600원을 향해 고공행진 중이다. 참고로 2025년 연평균 원·달러 환율은 1,422.16원으로, 1998년 외환위기 연평균(약 1,398원)을 이미 넘어섰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외환보유액과 변동환율제 등 방어 기제가 강화됐지만, 정치·외교 리스크가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키우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미 현실이 된 위협도 있다. 2026년 3월 11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을 포함한 16개국을 대상으로 무역법 301조 조사를 공식 개시했다. 명분은 '구조적 과잉생산 및 불공정 무역 관행'이며,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 560억 달러(2024년 기준)가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조사 대상은 자동차·철강·반도체·선박·석유화학·기계 등 제조업 전반으로, 한국 총수출의 84%를 차지하는 영역이다.
기존 상호관세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301조는 관세율 상한이 없고, 품목별 차등 제재와 교차보복(예: 김치를 조사하고 화장품에 관세 부과)까지 법적으로 허용되며, 의약품 약가·온라인플랫폼·클라우드 보안인증(CSAP) 등 비관세 분야로도 언제든 확장할 수 있다.
업계가 "미국의 요술 방망이"라 부르는 이유다. USTR은 무역법 122조 관세 시한이 끝나는 2026년 7월 하순 이전에 조사를 마무리하는 단축 일정을 예고했다. 122조 시한 만료와 동시에 301조 기반의 새 관세 체계가 들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
▐ 한미동맹 이완 시 미국의 합법적 압박 수단과 충격 시나리오
압박 수단 직접 충격 연쇄 파급 우려
무역법 301조 제재
상한 없는 품목별 관세·교차보복·비관세 영역 확장 가능 (2026.7 시행 예고) 자동차·철강·반도체·석화 등 총수출 84% 직격 대미 수출 급감, 기업 투자 심리 위축, 고용 충격
관세 25% 이상 재인상 수출 기업 마진 급감 환율 상승, 투자 위축, 고용 감소
칩4·IPEF 공급망 협력 배제 반도체·첨단산업 수출 차질 코스피 급락, 외국인 자금 이탈, 기술 고립
에너지 공급망 조율 소외 LNG·원유 현물 조달 비용 폭증 전기요금·물가 상승, 산업 경쟁력 약화
방위비 대폭 인상 압박 재정 부담 가중 적자국채 추가 발행, 신용등급 하락 우려
환율조작국 지정 대미 무역 흑자 빌미로 추가 제재 원화 추가 하락 압박, 외국인 투자 회피
※ 위 시나리오는 한미관계 이완이 장기화될 경우의 위험 요인이며, 확정된 전망이 아닌 리스크 분석이다. 301조 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며 결론은 2026년 하반기에 나올 전망이다.
가슴 아픈 것은 이 피해를 이재명 정권과 민주당의 소수 권력자들이 아닌 좌파 우파 구분없는 일반 국민이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98년에도 정책 실패의 원인을 제공한 자들은 권좌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92만 주주와 1만 4,000명 은행원과 수십만 노동자가 청구서를 받았다.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친중좌파 정권 아닌 대안세력의 대동단결과 선거 투명성 복원
한국에는 지금 두 가지 과제가 동시에 필요하다. 하나는 현 정권이 초래한 한미동맹 훼손과 친중 경사를 바로잡을 대안 세력의 집결이다. 국민의힘도 내부의 친중·모호 세력을 배제하고 자유민주주의 보수 세력으로 재편돼야 한다.
동시에 자유와혁신당, 전광훈·전한길, 청년 중심의 자유대학생연합으로 대표되는 시민사회 세력이 대동단결해야 한다. 분산된 역량으로는 이재명 정권의 입법독재와 사법장악에 맞설 현실적 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선거 투명성 복원이다. 선관위·A-WEB 중국 배후 의혹을 국제 감시기구와 함께 검증하고, 사전투표 망분리 실태를 전면 공개해야 한다.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동맹국에 기대하는 기본 요건이 공정한 선거다. 이 문제를 회피하는 정권은 동맹의 신뢰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다.
조선 말기 명성황후가 청·러·일 사이에서 끝없이 줄타기하다 결국 국권을 잃었듯, 전략적 모호성은 단기 균형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최악의 취약성을 만든다.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 미국으로부터 받아온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정학적 이유만으로 미국이 언제까지나 한국을 같은 방식으로 대우해 줄 것이라는 안이한 믿음이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는 적성국만이 아니라 캐나다·멕시코·쿠바는 물론 그린란드와 유럽 NATO 국가들까지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란·베네수엘라 사례는 그 끝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이 동맹이 아니라 감시·관리의 통제 대상국으로 전락한다면, 우리가 누려온 번영은 다시 오기 어렵다.
이승만 대통령이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한미동맹은 한번 균열이 깊어지면 쉽게 복원되지 않는다. IMF 당시 이용훈 변호사(후에 대법원장)는 "지금은 미국이 법 위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다시 현실이 되는 날, 이번에는 누가 92만 주주와 1만 4,000명 은행원을 대신해 청구서를 받게 될 것인가.
IMF를 겪고도 그 교훈을 잊은 정권의 대가가 이번에는 훨씬 광범위하고 혹독할 것임을, 필자는 이 글로 경고한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출처 : 파이낸스투데이(https://www.fntoday.co.kr)
https://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09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