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식물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그동안 우리 집에 온 화초마다 시들어가고, 작아져가고, 빛을 잃어가고, 말라가는 과정을 밟았으니 면목이 없다. 새로운 화초를 사 올라치면 "곧 같은 전철을 밟게 될 줄 알면서도 사 오다니 화초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니냐?"는 눈총도 받았다. 물도 더 자주 주고, 영양제도 줘보고, 빛이 적당한 곳에 놓아두기도 했으나 결과는 늘 비슷했다.
며칠 전 아내가 현관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와서 이것 좀 보세요!' 한 달 전 분갈이 한 화분의 화초가 잎마다 너무도 푸르디푸른 빛을 띠고 크고 싱싱하게 자라 있었다. 아내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분갈이를 해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다니!
일단 문제에 대한 답은 분갈이 었던 셈이다. 화초가 건강하지 않아서나, 소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지의 문제였다. 당장 화초 가게에 들러 분갈이용 흙을 몇 부대라도 사 올 마음이 들었다. 더 많은 화분이라도 키울 수 있겠구나, 하는 가벼운 흥분도 일었다. 변화는 그렇게 뜻밖의 사건을 통해 불쑥 왔다.
누군가의 성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환경대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그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일일까. "원래 키가 작다. 원래 재능이 없다. 원래 아이큐가 낮다. 원래 게으르다. 원래 의욕이 없다. 원래 그렇다. 해도 안 된다… "해서 포기해 버린 사람들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무를 탓하는 대신에 성장에 알맞은 환경인가를 살피는 것이 내 일이라는 것을 알겠다.
얼마 전 산마리노에 살았던 막빈에게 연락이 온 일이 있었다. 생후 7개월 무렵에 부모가 떠나버려 친척집에서 자란 그는 중학생 나이가 되어가는데도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조차 없어 어린 동생들에게도 바보 취급을 받았다. 친척을 설득하여 제리를 통해 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시켰으나 얼마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학업을 따라가기에도, 어린 반 친구들의 따돌림을 견디기에도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너무도 연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나익이라는 지역으로 이사한 후 연락이 끊긴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제 23살이나 되었단다. 막빈에게 나를 생각나게 하신 분이 주님이셨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싶어 막막한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의 삶의 분갈이를 위해 기도한다.
아브라함의 이주는 하나님의 분갈이였을 것이다. 야곱이나 요셉의 이주도 그렇다. 겉보기에는 바로의 궁이 가장 좋은 환경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움직이셨다. 그를 통해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옮기셨다. 하나님의 분갈이가 아닌가. 그 분갈이를 통해 얼마나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트리니다드 할머니의 분갈이는 이사였다. 다렐이나 폴의 분갈이는 대학이었다. 패트릭의 분갈이는 의대진학이요, 다이렐, 안드레, 알렌의 분갈이는 유피(University of the People)였다. 제리의 분갈이는 유피(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대학원이었고, 라쌀대 교수직이었다. 우리 친구들을 위한 분갈이는 도서관이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지나온 세월 동안 수 많은 하나님의 분갈이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의 성장을 위해 가장 좋은 환경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이셨다. 좋은 만남이나 책뿐 아니라 실패나 병, 사고 등 원치 않은 상황을 통해서도 일하셨다. 물리적이고, 정서적이며, 영적인 분갈이다.
지금도 주님은 시들어가고, 작아져가고, 빛을 잃어가고, 말라가는 무덤과 같은 환경을 생명이 충일한 환경으로 바꾸신다. 우리의 성장을 도우신다. 죽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베푸신 은혜다. 죽음을 죽이신 부활의 능력이요 그 은총의 나타남이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각자에게 알맞는 분갈이를 통해 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를 일으키고 계신다. 필요한 영양분을 받고 마음껏 자라나도록, 지어주신 모습대로 자라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살도록 성실한 농부처럼 일하신다. 부활 생명을 가진 자들마다 그 손에서 완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