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빤냐 존자의 일요법회 강론: 복을 짓다 (불기 2562년(2018) 3월 18일)
오늘 강론의 주제는 ‘복을 짓다’입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아나률(Aniruddha, 阿那律) 존자가 있습니다. 아나율 존자는 후기 불교에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지혜의 눈이 가장 밝다고 해서 천안제일 아나율 존자라고 부릅니다. 아나률 존자는 밤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해 시각을 잃었습니다. 시각을 잃은 아나율 존자가 어는 날 헤진 가사를 꿰매려고 하니까 바늘귀를 꿸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지혜의 눈이 밝아도 육안이 없으면 꿸 수가 없죠. 혼자서 바늘귀를 꿰려고 애를 쓰던 아나율 존자가 ‘누가 이 바늘귀를 꿰어서 복을 지을 사람이 없을까?’라는 혼잣말을 합니다. 그 혼잣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아나율 존자에게서 바늘을 거두어서 바늘귀를 꿰고 가사를 기워주죠. 아나율 존자는 그 분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고 떨리는 목소리로 “저는 바늘귀를 꿰어 줘서 복을 지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더 지을 복이 뭬 있어 바늘귀를 꿰어 주시고 가사까지 기워 주십니까?”라고 아나율 존자가 말을 하자 “나보다 더 복 짓기를 좋아하는 이는 없다.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짓는다.’라고 말씀하셨죠.
부처님의 전생이야기가 523편인가가 있습니다. 이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다 이런 이야기로 채워져 있죠.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복을 짓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짓죠. 부처님의 <자타카> 이야기는 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실천한 이야기입니다. <자타카> 이야기를 서원행이라고 이야기 하죠. 부처님의 <자타카>는 전부 다가 서원행입니다. 서원행 이야기로 채워져 있죠.
60년대 남베트남에는 고딘디엠(응오딘지엠 ( 베트남어: Ngô Ðình Diệm / 吳廷琰 오정염 ) 이라고 하는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고딘디엠은 폭압적인 독재 정권이었습니다. 고 딘디엠은 본래 천주교 주교입니다. 천주교 주교인 고딘디엠을 미국이 꼭두각시로 대통령을 만들었죠. 철저히 미국의 이익에 봉사했고, 철저히 남베트남의 민중을 배신했습니다. 고딘디엠의 폭정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베트남 불교의 최고의 지도자, 당시 임제종의 종정이었던 틱꽝득(Thich Quang Duc 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 석광덕 , 1897년 ~ 1963년 6월 11일)은 광장에서 많은 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의 몸을 불태우죠. 틱꽝득은 자신의 몸이 불타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고딘디엠은 소신한 틱꽝득의 시신을 탈취해서 화장하죠. 그러나 틱꽝득 신장은 타지 않습니다. 고딘디엠의 동생의 부인은 틱꽝득의 시신을 통돼지구이라고 조롱했죠. 남베트남의 민중이 봉기해서 고딘디엠 정권이 무너지고, 고딘디엠은 처형됩니다. 미국의 기만이 전 세계에 폭로됐고 결국에는 남베트남이 멸망하는 기폭제가 되었죠. 지금 베트남의 중앙은행은 틱꽝득의 심장이 금고에 소중하게 모셔져 있습니다. 베트남 정부는 틱꽝득의 심장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죠.
부처님의 서원행이라고 하는 것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생명, 평화, 평등, 정의, 인권,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틱꽝득이 고딘디엠 정권에 맞서서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를 것도 생명, 평화, 평등, 정의, 인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고딘디엠이 바로 이 다섯 가지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고딘디엠의 폭압된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고문해서 죽였죠.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도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결국은 생명의 문제고, 평화의 문제고, 평등의 문제고, 정의의 문제고, 인권의 문제죠. 내가 고(苦)를 사회 불평등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것도 그겁니다. 사회 불평등이 이 다섯 가지를 이 다섯 가지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들, 미투니 갑질이니 다 여기서 초래한 것들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항상 쳇바퀴 돌듯이 제 자리 걸음을 하게 되어 있죠.
해마다 조류 인플루엔자가 겨울철이면 기승을 부립니다. 조류 인플루엔자가 기승을 부리면 모든 닭들을 생매장 시키죠. 소가 구제역에 걸리면 소를 생매장합니다. 여러 해 전에 대한민국에 구제역이 창궐해서 수십만 마리의 소를 매장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매장한 장소를 직접 가봤습니다. 거기에는 100미리 파이프 몇 개만이 꽂혀 있죠. 나는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렇게 생명 평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왜 해마다 수백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매장되고, 수십만 마리의 소가 생매장 돼도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감기가 걸려도 치료를 합니다.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다고 해서 생매장 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은 생매장 합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이런 고사가 있습니다. 어떤 장군이 한 나라를 포위해서 공격을 하죠. 그런데 그 장군의 아들은 그 나라의 충신으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나라 왕이 자기를 공격하는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서 말을 하죠.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네 자식을 죽이겠다고. 그런데도 장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왕은 그 자식을 죽여서 국을 끓여서 그 아버지에게 보내죠. 그의 아버지는 그 국을 태연하게 먹습니다. 그 국을 태연하게 먹었다는 말을 들은 왕은 그만 놀라서 항복을 해버립니다. 적국을 멸망시킨 장군이 돌아오자 왕은 그에게 최고의 관직을 주려고 하죠. 그 때 옆에 있던 한 신하가 왕에게 말합니다. 제 자식을 삶은 국도 태연하게 먹을 수 있는데, 전하인들 못 먹겠습니까? 왕이 생각해보니 제 자식도 먹는데 왕을 못 먹을 리 없습니다. 모든 실권을 박탈해 버렸죠.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태연하게 생매장하고 수십만 마리의 소를 태연하게 생매장할 수 있는데, 그런 사회에서 인간이 존중받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인권과 정의가 존중받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데, 평화와 평등이 그저 남의 동네 이야기죠. 왜 수행합니까? 왜 기도 합니까? 결국은 수행과 기도도 다섯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이고, 더 좋은 삶을 위해서입니다. 더 좋은 삶을 위해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수행하고 기도하는데, 정작 생명과 평화와 평등과 정의와 인권은 그저 딴 동네일처럼 생각합니다. 나만 해탈하면 되고, 나만 평화로우면 됩니다.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평화로우면 됩니다. 속류화된 천박한 불교가 지금 불교가 되었습니다. 지금 불교에서 부처님의 서원행은 눈을 씻고 찾으려고 해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트남의 불교지도자 틱꽝득은 스스로의 몸을 태워서 다섯 가지를 민중들에게 선물했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기 전에도 서원행자였고, 깨달은 후에도 서원행자였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기 전에도 서원행을 실천하는 분이었고, 깨달은 후에도 서원행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아나율 존자가 바늘귀를 꿰어 복 지을 사람이 없을까 했을 때에 부처님께서는 바늘귀를 꿰어서 가사를 기웠습니다.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짓는다라고 했습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복을 짓는 거, 그것이 수행이고, 그것이 기도의 정신입니다. 인도에서는 불교도를 바우또와라고 그랬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서원행을 따른다고 하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서원행을 따른 것, 그 따른 사람들이 바우또와, 불교도입니다.
아무리 가사를 입고 있어도 서원행을 하지 않으면 바우또와가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님께서 말법 세상이 되면 나의 가사를 훔쳐 입은 자들이 밥벌이를 할 거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무엇 때문에 말법 세상에 나의 가사를 훔쳐 입은 자들이 나를 팔아 밥벌이 한다고 하셨겠습니까? 서원행을 하지 않으면 설사 가사를 입고 있어도 나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사자락을 잡고 나의 그림자를 밟는다 하더라도,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 어떤 사람이 나와 천리를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그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했죠. 우리가 복을 많이 지어야 됩니다. 나만을 위해서 복을 짓는 게 아니라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많이 지어야 합니다.
글 깨나 읽은 사람들은 기복 불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한국 불교는 기복 불교도 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복 불교래도 제대로 하면 부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부처님도 나보다 복을 짓는 일을 좋아하는 이는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나도 복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나도 복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복을 짓는다면 기복 불교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깨닫기 이전에도 서원행이고, 깨달은 이후에도 서원행입니다. 바우또와는 서원행자를 말하는 겁니다. 서원행자가 바우또와고, 서원행자가 깨달은 사람입니다.
일본의 선사 카이센은 오다 노부나가의 칼날 아래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스스로는 오다 노부나가가 불태운 대웅전에 걸어 들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죠. 카이센은 불타는 대웅전에 걸어 들어가기 전 마음이 고요하다면 불속이라도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安禪不必須山水 滅得心頭火自凉 안선불필수산수 멸득심두화자량) 틱꽝득이 자신의 살아있는 몸에 불이 붙어 타는데도 미동도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카이센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폭압적인 고딘디엠을 그 방법 밖에는 무너트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첫댓글 기네요
나중에 시간나면 찬찬히 보겠습니다
혜천스님은 언젠가 무심정사 방생가셨던 성지순례..춘천맞지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일체중생들을 위하여 복을 지시는 부처님
고맙습니다
사진을 보다가 놀랬습니다.
왜?
글을 읽고서야 이해가 되네요.
나와 남이 행복하기 위해서
서원 행자가 되어야함을 공부하게 해 주심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소한 일도 복짓는 것이라~
감사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무탈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ㅡ나모붓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