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은 유사 크론병이었다. 주치의는 늘 스트레스를 주의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 방법을 끝내 모른 채 20년간의 언론사 편집기자 생활을 울며 겨자 먹기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또 위급한 상황이 왔을 때 나는 병원에 입원하는 대신 지인이 운영하는 함창의 한 카페 건물에 딸린 문간방에 머물렀다.
예민하고 온갖 잔병을 두루 갖춘, 서울을 떠나 살아 본 적 없는 내게 함창이란 소읍은 낯선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우주였다. 함창 버스터미널에 내릴 때면 배낭을 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건 두려움이기도 했고, 설렘이기도 했다. 처음 마주한 한 소읍의 버스터미널은 투박하고 음침하고 불편했다.
건물 외벽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내부는 가을 한낮임에도 어둑어둑했다. 무릎 담요를 깊숙이 덮고 무료하게 앉아 있는 매점의 아주머니는 이방인이어서인지 퉁명스러웠다. 그런데 적당히 불편하고 적당히 시니컬한, 어떤 '거만한' 느낌이 조금씩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목덜미를 스치는 맑은 가을바람, 새우 눈을 뜨고 바라봐야 하는 너무 밝고 환한 하늘과 흰 구름, 지나치게 한적한 거리, 느리게 걷는 사람들, 그리고 카페 한쪽에 마련된 두 평도 안 되는 허름한 온돌방. 거기서 나는 여느 특급호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꿀 같이 깊고 단 잠을 잤다.
아침이면 핸드폰 알람 대신 재재거리는 새소리에 영화의 주인공처럼 흥미로운 기분으로 눈을 떴고, 밤이 되면 창으로 흘러드는 은근한 달빛이 소리 없는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를 맞으면 아침부터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산책에 굶은 사람처럼, 산책이 업인 사람마냥 수시로 마을을 산책했다.
어느 날은 산책길에서 어린 시절 외갓집의 기억을 소환하는 다듬이 소리에 이끌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시골집 마당 안으로 무작정 들어가기도 했다. 그 집 마당엔 빨랫줄마다 광목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는데, 그 흰 광목천에 한참을 뺨을 대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뛰쳐나온 일도 있다.
어디를 가나 예스러운 것들이 널려 있는 함창 읍내는 그 자체로 흡사 전시장이나 박물관 같다. 귀퉁이 한쪽이 무너지고 빛바랜 벽들, 온갖 꽃이 만발한 마당이 예쁜 집들, 한 집안의 흥망성쇠를 짐작케 하는 폐가들, 캔버스의 색을 옮겨놓은 듯 갖가지 빛깔의 낡은 담벼락들, 팥소가 기막히게 맛있는 찐빵 가게, 이발소, 구불구불 이어진 정다운 골목길들, 초가집 지붕위의 늙은 호박들과 게으른 고양이들까지.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함창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은 함창역이다.
무인간이역인 함창역에서 나는 햇살에 온돌처럼 데워진 돌 벤치에 배를 깔고 누워 가을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책을 읽거나 무념무상에 젖곤 했다. 무인간이역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과 하얗게 봉해진 옛날 매표구의 흔적 등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시골 간이역사만의 톡톡 튀는 정취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명작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을 함창에서 게으르게 놀며 생각했다. 내가 잊고 있던 것들에 대해,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불편하면 외면하고, 익숙하고 낡은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구불구불한 산길보다 산허리를 잘라 뚫은 터널을 지나는 고속도로를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애용한다. 가는 길이 쉽고 빠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쉽고 빠른 길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병들을 얻고, 대신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귀농을 준비하는 예천 출신의 한의사 친구는 말했다. "사랑하는 누나가 오래 병석에 있다가 하늘나라로 갔어. 의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참 무력했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결국 아무리 의료기술이 발전한다 한들, 이 복잡하고 오염된 환경에선 어느 누구도 질병, 특히나 정신적인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지" 그러면서 그는 첨단의료 기술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느림과 환경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어린 자녀가 있음에도 자가용도 팔고 대중교통만을 이용했는데, 자신부터 환경을 위해 작은 실천이라도 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건강 때문에 사직을 한 나에 대한 그 친구의 처방도 독특했다. "잡고 있는 것을 놓으면 돼.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가족이든 건강이든, 다 놓아버리면 돼. 그리고 가끔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 한 잔씩 하고!"
함창에 머무르며, 나는 친구의 그 처방이 명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태생적으로 저질체력인 나는 여전히 자주 아프다. 하지만 위급상황이 아닌 한 병원에는 거의 가지 않는다. 대신 나는 걷기 중독자가 됐다. 시도 때도 없이 걷거나, 가방 하나 둘러매고 훌쩍 함창이나 영주 등 주로 소읍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나면 방가득 채워지듯 기운이 난다. 그 출발점이었던 함창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힘들 때면 슬며시 꺼내보곤 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심사평>
"돋보이는 가족애·삶의 고뇌 묻어나는 작품에 눈길"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공모전을 통하여 경북의 관광지와 평범한 시골마을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었다.
작품들의 글 솜씨의 수준은 다양하였다.
어떤 것들은 문체와 글의 구조가 뛰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글솜씨의 수려함도 중요하지만, 탐방한 여행지에서 느끼는 진솔한 감회를 어떻게 형상화하는데 집중하여 작품을 보았다.
직접 탐방한 여행지에서 느낀 감회에다가 가족애가 돋보이거나 삶의 고뇌가 묻어나는 작품들에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더욱 많은 여행자들의 다양한 체험이 반영된 작품을 기대한다.
아울러 올해 대상과 금상을 비롯한 입상자들의 경우 이러한 심사기준에 합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섬세하기도 하고, 치밀하였다.
그러면서도 가족사적 체험을 결합시키는 솜씨도 대단하였다.
다시 한번 입상하신 모든분들께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장 양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