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슬이
"찾았다“
소파 위에는 기저귀 가방, 장난감, 또 잡다한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윤슬이가 그 속에서 용케 그림책을 찾아낸다. 잘했다고 칭찬하는 내 목소리가 유난히 드높다. 어린것에게 보내는 격려인지 아첨인지 알 수가 없다.
“따다따”
저도 모르게 내 말을 흉내 내는 혀 짧은 소리. 윤슬이는 할아버지를 향해 뒤뚱뒤뚱 걸어간다. 그 불분명한 소리를 다시 들어보려고 암만 '찾았다'를 연발해도 오불관언이다. 그 녀석의 관심과 오감의 반응은 분초를 다투며 달라진다.
태어난 지 14개월이 조금 넘었을까.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것은 이미 다 형성되어 있지만 아직은 아기다. 하지만 존재의 아우라 만큼은 어른과 비교할 수가 없다. 집안의 모든 질서는 이미 그 녀석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다.
동생 내외가 맞벌이 하는 딸의 아이를 맡아 육아를 전담했다. 제법 누리고 살던 퇴직 후의 여유는 일단 유보. 할머니는 류머티스가 있다. 할아버지도 몸이 약하고 소극적이며 조용한 사람이다. 그런 성격이나 건강상의 문제들은 어느새 잊어버렸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다. 여전히 손가락도 쑤시고 어깨나 허리도 아플 것이다. 뒤늦게 배우는 클라리넷 연습이라도 할라치면 쫓아와 방해를 해도 그만이다. 가끔이나마 즐기던 둘만의 여행도 접은 지 오래다.
음악이 나오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뼉을 친다. 흥겨움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곡조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디든 손을 뻗는다. 그리고 기어이 가져야 한다. 집안의 모든 물건은 다 만지고 싶고 손에 잡고 싶다.
어른들이 그 어린 것 앞에서 재롱을 떤다. 까르르 웃는다. 몇 번은 그렇게 웃지만 금방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한 번 써먹은 재롱은 이미 재미가 없어진 모양이다.
그 녀석 비위를 맞추려고 어른들은 온갖 이상한 소리도 서슴지 않고 괴상한 몸짓도 마다 않는다. 그러면 까만 두 눈으로 한참을 보다가 웃기로 작정하기도 하고 외면해 버리기도 한다. 그 해맑은 웃음 하나 보려고 어른들은 필사적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애교를 떨어도 안기고 싶은 사람에게만 안긴다. 지 할애비나 할미, 어미나 아비에게 안겨 있다가 다른 누군가가 손을 벌리면 목을 그러안고 몸을 찰싹 붙이며 고개를 파묻은 채 온몸으로 방어한다.
콩알만 한 게 제법 꾀도 부릴 줄 안다. 거실에서 놀다가도 주방 쪽이 궁금해서 못 견딘다. 주방엔 할미가 일을 하고 있다. 그럴 때 녀석은 아무에게나, 즉 나에게도 손을 벌린다. 가끔 만나는 나는 그러니까 ‘아무나’에 다름 아니다. 여간해서 곁을 주지 않으니 몹시 아쉽던 차에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냉큼 안아준다. 그러면 얼른 몸을 뒤채여서 주방에 가까이 서 있는 다른 어른을 향해 두 손을 벌린다. 그렇게 두어 번 건너서 기어코 제 할미에게 가고야 만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검은 포도알 같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그랬다가도 제 마음에 흡족하다 싶으면 하얀 젖니를 드러내고 깨득깨득 웃으면 집안엔 반달도 뜨고 초승달도 뜬다.
엄마가 밥을 먹이면 다소곳이 받아먹을 수가 없다. 지가 숟가락질을 하고 싶은데 누굴 어린애로 아는지 엄마는 자꾸 떠먹이려 한다. 소리 지르고 몸을 비비 틀어 의사표시를 한 뒤 드디어 숟가락을 넘겨받는다. 엄지와 검지로 숟가락 끝을 겨우 붙들고 열심히 음식을 담는다. 겨우 밥알 몇 개를 담는데 성공하면 비스듬하게 입으로 가져가지만 그나마 볼에 몇 개 붙고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별로 없다. 그래도 열중해서 숟가락질을 한다.
하나의 작은 인격체, 윤슬이를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든다. 모든 인간들이 저 무위의 시간을 거쳤으리라. 벌써 지각은 발달해 있지만 저 뒤뚱거리는 걸음마처럼 아직은 바로 서지 못하고 새순처럼 보드라워 위태하기까지 한, 그래서 하는 일 모두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가득한 시간,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울고 웃고 보챌 때만 좀 눈치 챌 수 있다고나 할까. 아직 마음은 없고 본능이 지배한다. 어쩌면 온전함을 지향하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태초의 혼돈이 저랬을까.
오직 세심한 손길과 사랑, 끝없는 관심을 자양분 삼아 자라기만 하면 되는 순결하고 복된 그 시간이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그런 기억이란 전혀 없이 그저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렵기만 하여 마음속엔 잡초만 무성하다.
아이는 그런 어른들을 위한 선물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되살려 잃었던 본성을 찾게 만들어주는 선물.
조카손녀 어린 윤슬이를 바라보면서 얻는 기쁨도 크지만 마음 한구석에 살짝 그늘이 드리운다. 살아본 자의 비겁한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들려오는 무서운 소식, 삶 곳곳에 숨어있는 함정,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절감케 하는 자연의 위력….
하지만 아이는 잘 자랄 것이다. 그 아이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삶의 모든 길목에서 만나는 온갖 경험들이 몸과 마음에 굳은살을 만들 때 스스로 자존의 이유들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파심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살아본 자’에게도 때로는 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워 경이롭지 않던가. 어디에서건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윤슬이, 그 이름처럼 늘 반짝이면 좋겠다. 그러나 빛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다시 비춰줄 햇살을 기다릴 줄도 알게 되면 더 좋겠다는 마음이다.
첫댓글 ㅎㅎㅎ
공감 백배!
요즘 윤슬이보다 두어 달 더 된 단아를 돌보며 느끼는 점들이네요.
그전에 읽을 때보다 더 공감하게 되어 혼자 웃습니다.
미옥샘을 우리로부터 잠시 삣아간(?) 그 귀여운 주군 이름이 '단아'에요? ㅎㅎㅎ
이쁘긴 참 이쁜데....
가끔 만나며 느꼈던 아이에 대한 상념들, 써봤는데
그 아이가 벌써 여섯 살이네요.
미옥샘의 세월도 금방 가겠지요?
명색이 수필카페, 너무 글이 잘 안 올라와 올렸습니다^^
ㅋㅋ 그냥 웃지요. 복희샘이 갑자기 보고 싶은 건. ㅎㅎ 설아가 고 3이 되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지요.
지금도 제 짝사랑은 여전해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설아 학교로 점심시간에 맞춰서 찾아간답니다.
물론 사전 약속을 카톡으로 전하고 오케 사인 받고 가지요. 딱 5분 짧으면 1~2분 포옹하고 눈맞추고 사랑해. 몇 마디 주고 받으면서 대금을 치루지요, 주머니 사정이 후하면 신사임당 한 분, 그렇지 않으면 세종대왕 서너분으로요.
친구들이 설아에게 대화(?) 가 되는 젊은 할머니가 있어서 좋겠다고 부러워한다네요. ㅎㅎ
어디 가겠어요? 설아사랑. 조카들을 많이 사랑해봤지만 추억으로만 남고
이제 이모할머니, 고모할머니가 되어 그 앞에 붙은 이모, 고모의 존재로는 맘껏 이뻐하지도 못해요.
윤슬이는요, 내가 그 아이랑 놀 때 아마 제법 상대가 되는지 나랑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잘 못 보고 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