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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도장(관인) 발견과 부여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의문 제기 | |
번호 : 694 글쓴이 : 김용만 |
조회 : 139 스크랩 : 0 날짜 : 2003.05.21 16:02 |
서진(265-316)과의 교섭 산물인 관인(官印)이 내몽고 지역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윤용구(魏晋隋唐代 石刻의 韓國史 자료와 그 이해 - 한국고대사 연구회 2003년 5월 10일 발표 논문)는 출토지점이 대흥안령 북부의 탁발선비가 남하하여 후한이래 주된 교섭 창구인 상곡군 寧城의 오환교위부로 이어지고, 또한 송눈평원과 송화강방면의 숙신-물길등이 시라므렌하를 거쳐 중국과 교섭하는 교통로의 결절점인 점에 주목하고, 부여가 수렵유목민과 마찬가지로 농안, 장춘방면에서 요동현도군이 아니라 서진하여 상곡군 쪽으로 교섭한 흔적은 아닌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윤용구는 이와 관련한 사료로 북송 장군방의 운급칠첨(北宋 張君房 『雲笈七籤』) 卷108에 인용된 前漢 劉向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列仙傳에 瑕丘仲 영(하북성 선화현)人也 賣藥於영百餘年 人以爲壽 而因地動舍壞 仲及里中數十家屋臨水 皆敗 仲死 民或取仲尸 棄水中 收其藥賣之 仲被裘而從 詣之取藥 棄仲者懼 叩頭求哀 仲曰 非恨汝使人知我爾 吾去矣 後爲夫餘胡王驛使 復來至영 北方謂之謫仙人 이란 자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번역해 보면 - 하구중은 영 땅 사람이다. 영에서 백여년 동안 약을 팔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그를 장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지진이 일어나 집이 무너졌는데, 하구중과 마을의 수십 호는 가옥이 강가에 있어서 모두 파괴되었다. 하구중이 죽자 사람들이 하구중의 시체를 강 속에 유기하고 그의 약을 가져다 팔았다. 하구중이 갖옷을 걸치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약을 돌려 달라고 하자, 하구중의 시체를 유기한 사람은 두려워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애원하였다. 하구중이 말하길, 당신이 나를 사람들에게 알릴까봐 걱정이니 나는 떠나겠소 라고 하였다. 나중에 부여 호왕의 통역관이 되어 다시 영에 왔다. 북방 사람들은 그를 일러 귀양 온 선인이라고 하였다.
** 전에도 이야기 했던 바가 있지만, 부여왕은 일찌기 한나라에 왔던 적도 있었고, 중원의 여러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여의 위치를 장춘, 농안,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한 만주 중북부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윤용구의 발표에서 소개한 부여관인의 도장의 발견 위치를 생각해보면, 부여가 보다 서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요서 북부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은 미흡한 자료이지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되어서 소개합니다. (이 글은 앞서 소개한 한국고대사연구회 자료실에 올라온 윤용구 교수의 논문을 보고 쓴 글입니다. 단, 이날 윤용구 님의 발표를 듣지 못해서 그분의 견해가 어떤 것인지 모른체, 단순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