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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평설>
따뜻한 영성(靈性)과 생명의 외경(畏敬)
- 황윤현 시인의 시적 형상화와 사모곡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1. 병상의 잠언과 시적 작위(作爲)
모처럼 시집평설에 앞서 한편의 시는 ‘창조주께 드려지는 맑은 영혼의 기도’이기에 화자(persona) 나름의 차별성을 지닌 「따뜻한 영성(靈性)과 생명의 외경(畏敬) - 황윤현 시인의 시적 형상화와 사모곡」의 해법의 통로는 영적 작업과도 맞물려 있다. 일단 독실한 신앙인이며 존재감이 빛나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서 일관성을 지닌 그 자신의 삶은 감사하게도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지혜로운 교시(敎示)이기에 동시대의 공간에 처한 충직한 독자라면 저마다의 기억에 배경지식(schema)을 필히 간직할 일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초조와 심리적 불안감에 밤잠을 설친 끝에 중환자의 병상에서 그나마 생일을 맞는 노쇠한 모친을 위하여 마음의 선물로 묶어내는 시집의 편집구성은 「제1부 황혼 앞에서, 제2부 한 달의 일기, 제3부 회복의 나날, 제4부 격리의 계절, 제5부 수필(6편)」의 면면은 결(結) 고은 모직물로 치밀하게 직조된 모정의 정겹고도 밝은 음조의 ‘엇노래’편이다.
현재 월간 『모던포엠』의 자문위원과 「모던포엠작가회」서울지회장으로 활동 중이며 빛나는 대한민국건축문화대상의 수상경력을 지닌 황윤현 시인이 모친과의 소중한 인연의 매듭을 ‘사친(思親)의 정(情)’으로 엮어내는 따뜻한 감성의 투사(透寫)는 월간 『모던포엠』 전형철 발행인의 지적처럼 ‘요즘 세태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참으로 애틋한 가족사(家族史)임’에 틀림없다. 작금에 포스코의 황경노 전회장이 오랜 투병 중인 아내의 쾌유를 눈물겹게 소망하며 간행한 헌정시집 『아내, 그 아름다운 이름』(모던포엠, 2019)과 맥을 같이하기에 정성껏 묶어 상재(上梓)하는 시집 『곤지곤지 죔죔』(모던포엠, 2022)에는 갸륵한 효심의 간절함이 느꺼워 눈물 또한 묻어있다.
차제에 존엄한 생명외경심이 수용된 시편에서 점차 교감의 폭과 시의미의 그물망은 ‘언제 이리 마르고 약해지셨나요? 바스러질 것 같은 몸에 조바심’이 주어지기에 “제 앞에서는 항상 아름다우셨고/제 앞에서는 항상 강하셨고/제 앞에서는 세상 누구보다 현명하셨습니다(어머니의 노을)” 예시와 같이 ‘항상’이란 어휘의 반복도 그렇지만, 자기관리에 철저한 모성의 지도력에 관한 관심의 특이한 일면은 효박사이며 사)푸른 세상 송병훈 이사장의 “시란 곧 효(孝)다. 삶의 행태가 효(Hyo)다.”라는 지론과 일맥상통하기에 더없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 ‘계단 내려가시며 무릎 아프다는 1934년 함경남도 출신인 모친을 시적 대상물로 관망하며’ “몸살기 있다 하자/온열매트를 깔아주는 아내/몸 따라 마음도 온열이다(어머니의 아랫목)”의 보기처럼 “치열했던 삶의 흔적 때문인지/세월을 더해 어린애가 되어 가시는 어머니/당신 앞에서는 어린이가 되리/오늘은 어른이 날, 늙은 어린이의 날(어른이 날)”에서 심적 교감은 보다 확장되어 “건강을 회복하셔서/아버님 곁을 지켜 주시는 어머니/두 분의 모습이 아름답네요(아버님의 생신)”에서 그 공감대의 형상화는 아득한 정신풍경의운명적 매듭이기에 못내 아련한 심사(心事)다. 또 하나 “시는 체험이다.”라는 마리아 릴케의 역설처럼 사유의 존재로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은, 생명기표에 의한 영혼의 울림으로 시적 상상력을 작동시켜주는 그 자신의 경우와 같이 이데아의 본질을 내포한 시어(詩語)의 한계성을 대응할 때 서정적 미감은 응축되어 한층 더 빛난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 자신이 ‘동공반응이 사라진 모친의 위증(危症)인 정황’을 「시작 노트」에서 “어머니 쓰러진 후에 몇 번 책을 내려고 시도하다가 포기한 것도 자꾸 나를 할퀴게 되기 때문이었음”에서 쉽사리 파악된다. 점차 낮은 산자락이 푸름에 젖는 이 생명의 계절에 “궂은 장맛비 이겨내고 함초롬 피어난 나리꽃/세월 가도 가도 아름다울/내 어머니 닮은 꽃(어머니의 나리꽃)”의 보기나 “살풋 남풍이 불어오는 봄의 전조/계절조차 외면하는 동토凍土,/그곳은/꿈속에서도 그리워하시는/내 어머니의 고향(입춘의 아침)”, 그리고 또 다른 시편인 “봄볕 아래 피어난 표정에 덜컥 숨이 멎거나/꽃이 피거나/표정 때문에 별이 생기고/우주가 작아져 손 안에서 설레는 봄(그냥, 봄)”을 통해 ‘하늘에는 별, 지상에는 꽃’이라는 시의미를 끊임없이 모색하여 칙칙한 어둠의 그늘을 말끔 걷어내는 눈물겨운 정신작업에 그 자신의 내면인식은 더없이 명료할 따름이다.
특히 황윤현 시인의 시적 구도(構圖)의 이행은 ‘일상적인 개아(個我)→가족(父母)→열린 우주(종교적 대상)’의 연계층위로 ‘나(個體)→부모(坤地)→창조주(宇宙)’와 잇닿은 삼각대위(三角臺位)의 합체이다. 까닭에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사람과 만물이 서식하는 땅의 이치도 동일화 되어 천지간의 어우러짐의 조화도 예감할 수 있다. 그 점은 시편 <가족>에서도 밝혀지지만 ‘아버지는 江이었다 1930년 강원도 철원 産임’을 되 뇌이며 “고석정과 도피안사로 원족遠族 갔던/유년시절을 회상하며/지금은 없는 상사리 증조할아버지 산소에서/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그리움의 江(미수 헌정 시)”에서도 그렇거니와 “세상 모든 만남을/시절 인연이라 하자//부모 자식 만남도/우주 섭리 속/약속된 시절 인연(시절 인연)”을 통해 필연성은 그 나름으로 유의미하다.
각론하고 연작시 형태로 읊어 내려간 <첫 번째 날-주와 함께>에서의 시사(示唆)하는 바는 다양한 즉물적 대상을 시적 질료로 작동시켜 <서른 번째 날 – 매미. 1>에 잇닿기까지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언어의 의미망은 더없이 다채롭다. 그렇다. “어머니는 일생에서/가장 긴 하루를 잘 버텨주셨다//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전에 없이 초조한 모습을 보이신다//주여,/제 어미와 아비를 지켜주소서.(새로 태어나심, 첫 번째 날-주와 함께)”의 보기나 또는 “서편 하늘 눈썹달/곱기도 하다//내 어머니 눈썹같이/가느스름한/그래서 더 고운(열 번째 날-이 아름다운 세상)”의 시편도 그렇지만 “이름 석 자 의미처럼/진솔한 삶의 여정/복 많았던 내 어머니//이렇게 좋은 남편/진실한 평생 사랑/복 중의 복이셨네(열네 번째 날 - 李眞福여사 삼행시)”에서 또 다시 입증되는 것은 ‘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빛나는 이름’인 어머니(母性)에 관한 순수한 사랑이고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지금(now), 여기(here)’는 그 자신의 일관된 관심사로 ‘천상을 지향해 열려있는 동공(瞳孔)’ 또한 지극히 개아적인 동일화의 양상이다.
2. 묵언 뒤 응시와 천상의 층계 오르기
각론하고 그 두렵고 불확실한 의구심도 말끔 씻어낸 온전한 믿음은 소망의 빛으로 전이되기에 끝내 은혜의 축복이다. 여기서오웬의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의 깨어남에 보다 충실하여 감동의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는 관념의 일탈에 비춰 시학교수인 랜섬(J. C. Ransom)의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作因)이다.”라는 역설은 고통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진실한 연고로 “우리가 덧없이 흘려보낸 오늘은 앞서간 어제의 그들이 그렇게 소망하던 내일이었다.”는 소포클레스의 생명외경은 보다 더 엄숙한 것이리라.
특히 표제시격에 해당되는 <네 번째 날-곤지곤지 죔죔>은 심적 자극을 가해 암울한 현재성을 극복하려는 의중이랄까? 지극히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유년의 메르헨(Märchen)적 자잘한 기억의 편린(片鱗)마저 아득한 의식의 심연에서 끄집어내어 전통놀이에 담긴 육아의 지혜로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땅의 이법도 깨닫게 된다.’는 짓시늉말 ‘곤지곤지(坤地坤地) 죔죔’의 반복에 ‘모친을 회상하며 시를 쓰면 자꾸 눈앞이 흐려진다.’는 화자의 시작동기가 새삼 회감(懷感)되어 울컥 비장감이 차오른다.
칠 개월 박이 아가/중환자실 증조 할미 면회 왔네/재롱에 재미 들려/곤지곤지 죔죔//
귀엽다, 귀엽다 하시더니/흰 망사 고깔모자 쓰고/주무시기만 하네//
엄니, 그만 일어나셔요/언제 아팠냐는 듯/눈 반짝 뜨고 깨어나는 겁니다//
절 따라 해 보셔요/귀여운 아가처럼/곤지곤지 죔죔//
그렇게/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곤지곤지 죔죔//
곤지곤지 죔죔//
-<네 번째 날 – 곤지곤지 죔죔> 전문
이처럼 시의 큰 틀 짜기와 맞물린 또 다른 그 자신의 시편 <열다섯 번째 날 – 어머니의 발톱>을 통해 영원자존자인 엘로힘(Ellohim)에게 드려지는 경건한 간구의 기도는 ‘주무시다 뇌지주막하 출혈이 일어나고, 두 번의 응급 수술로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지만, 15일째 의식 없이 누워만 계시는 어머니, 치유의 은총(恩寵)을 내려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이어지는 중환자실’의 가슴 저미는 정경의 클로즈업은 눈물겹다.
각론하고 그 자신의 시집에서 시각적 효용성이 주어지는 시편 중 비교적 2연 5행의 호흡이 짧은 형식으로 처리된 <스물일곱 번째 날>은 시의 부제처럼 그 ‘희망’은 끝내 ‘절망인 죽음의 그늘’에서도 ‘유일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에 의한 생명외경의 경건성의 잇닿음이기에 “詩는 말을 앞서는 그 무엇/매일의 일기가 남고 詩를 잃어버린다/죽음의 그늘을 걷어낸 기적의 단초/하루를 더해가며 희망이 움튼다//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스물일곱 번째 날 – 희망)”에 생명의 끈을 피멍든 손일지라도 결코 늦출 수 없다. 그렇다. 끝내 “하관할 땅보다 더 깊이 묻혀있던 효심은 긴 세월/땅속에 머물다 기어 나와/짧은 날을 목 놓아 우는 매미가 된다.(서른 번째 날 – 매미. 1)”에서 진정한 시의미의 일깨움은 마치 ㅍ프란시스코 교황의 ‘살아있는 자만이 춤출 수 있다.’는 일깨움 또한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결코 별개일 수 없다.
차제에 수치로 36.5는 건강한 사람의 정상체온이다. 어디까지나 온전한 믿음을 지니고 확신한 일에 처한 신앙인이기에 그 자신의 “어머니는 37일째/주님과 데이트 중이시다/평생의 짐을 내려놓고/안온한 휴식을 즐기신다/엄마가 된 후 가장 편안한 휴식을(36.5)”에서 또 하나의 역설(paradox)이지만 고통과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함 속에서도 <가을 햇살에 담긴 행복>을 만끽할뿐더러 체험신앙에서 비롯된 온전한 믿음과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놀라운 사실은 그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다. 현실적으로 여호와가 이 땅에 창조한 소중한 생명체는 ‘스웨덴의 가문비나무나 미국의 침엽수가 아니라, 바로 ‘서로에게 빛을 나눠주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꿈을 상실한 소외된 타자에게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시상을 응축시켜 놓은 그 존재감은 깊은 절망의 투병에서도 시련을 극복하는 소망의 기도와 생명의 은총으로 읊어낸 눈부심이다. 그 같은 실제는 “62년을 같이하다/홀로 외로운 아버지/병상의 어머니는/차라리 평안하실지도 모른다/어머니를 대신하여/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든다(메리 크리스마스)”의 보기에서나 또는 “거짓을 진실로 만들 수 있는/오직 한 분/꼭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은/차갑게 언 손을 지켜주고(겨울밤의 기도)”도 물론이거니와 ‘이 봄 속에 은총이 있어’ “봄날 햇살 창을 넘어 화사함을 병실에 전하고/잔잔한 복음 성가 은혜로운데/가장 귀한 내 어머니/새근새근 봄의 품 안에서 주무신다(봄이 머무는 병실)”처럼 뜻깊게 확증되는 것은 소외된 인간관계성을 회복하는 신비한 영성의 일깨움이다.
까닭에 불교의 동종선근설(同種善根說)을 가늠치 않더라도 그 자신의 잠재의식에는 부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에 ‘주병선의 <칠갑산> 부르는 어설픈 부친의 육성에도 모친의 꼭 감은 눈꼬리에 물기 어린다.’라는 무채색의 정신풍경화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아침저녁으로 곁에 머무는 아버지/아내를 살리기 위해 버티시는/노구의 8개월이 가혹하다(아버지의 노래)”는 피울음은 병상을 힘겹게 지키는 부친에 대한 안타까움과 맞물린 동병상린(同病相燐)이 “매미 울어대고 나리꽃 함초롬 피어 아름다운 날/어머니와 함께 그 꽃을 보리라//행복으로 그 꽃을 보게 되리라.(나리꽃은 다시 피어나고)”는 그 간절함이 끝내 눈부신 존재의 꽃을 피워내는 끈질긴 생명력이다. 또 하나 기호로 처리된 시제(詩題)의 표징성의 일례로 ‘경기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 155-8번지 보바스 기념병원국제병동 1층 로비의 커피숍’이 시적 전경(全景)으로 클로즈업된 “L cafe by B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환자의 부속품이다 나 또한 615일의 내구성을 가진 '이진복 환자의 보호자'라는 부속이다/지게에 아버지를 태우고 금강산을 올랐다는 어느 효자의 얘기를 떠올린다/이곳 대리석 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고 휠체어는 너무 쉽게 구른다(L cafe by B)”는 융․복합처리의 일면이다.
어디까지나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도 오랜 투병생활로 진통을 겪는 모친에 대한 지극함을 푸른 식물성언어로 생명의 충만감에 견주어 “봄이 멀지 않았다/라일락은 어김없이 피어날 거고/엄니와 난 꽃길을 걸을 거고(라일락의 약속)”라는 절박한 기대감이나 “내년에도 애기똥풀/내 손에서 피어날 거고/엄니 눈동자에 피어날 거고/시들었던 웃음꽃 피어날 거고(시들지 않는 꽃)”라면서도 온전히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시편 44 : 23)’라는 말씀의 절대의지 뒤에 “꿈속의 엄마는 언제나/머언 뒷모습이다/자꾸만 작아지는 모습이다//눈앞 어머니는 매일이/고운 얼굴이다/언제나 유리창 안이다//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기도)”의 시편이나 ‘이제 그만 환란을 거두어 가주소서’라는 긴장감이 심층적으로 수용된 “새벽 예배에서 기도드렸다/이 환란의 의미를 저희가 어찌 알겠냐고/당신이 뜻하신 대로 이끌어가시라고/다만 긍휼히 여겨 주시라고(눈 내린 날의 기도)”라는 절절한 간구는 목이메인 그 자신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묻어나 못내 처연(悽然)하여 느꺼운 심정이다.
이와 같이 따뜻한 영성과 엄숙한 생명경외심을 그 자신의 시편에 견주어 심층적으로 분할․통합하는 과정에서 천상의 층계 오르는 확고한 신앙심과 순수서정성의 동일화 현상은 차별성을 지니기에 이채롭다. 한편 그 자신의 시편이 안겨주는 역동적인 파동의 적절성이야말로 ‘비공인 된 입법자이며 작은 신의 대언자’에게 견고한 고독 앞에서도 깨어난 시의식과 성스런 기탄잘리(Gitanjali)로 역사의 정체성을 확장하되 알맞은 정신기후의 조성에 애씀의 땀을 흘리며 경건한 믿음을 유지하라는 일깨움이다.
어디까지나 ‘시간은 언제나 이별의 방향으로 흐르는데 어머니와 하나로 이어져 단절의 슬픔을 간직한 흉터’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시각적 효과를 살려낸 다음의 시편은 한층 더 그 구도처리가 모더니티(modernity)하여 신선한 분의기(情調)다.
병원 울타리가 준비할 시간을 마련해주어도/하나의 집착으로 세상은 좁아지고/
쳇바퀴 도는 일상에는 나태가 흥건하다/
배꼽이 자꾸/안으로 숨는 것은/슬픔에 대한 면역이/부끄러워서다/
단절의 흉터/상실의 흉터/자립의 흉터/태의 기억을 봉인한/배ㆍ꼽이라는 이름의//
-<흉터>에서
이처럼 그 자신의 시문집 구성의 별책부로 구분지어도 무난할 것이나 「제5부 수필」부분에서 한층 그 격조가 특이한 단상(斷想) <투명인간>은 자랑스럽게도 2017년 12월 『문학시선』 공모대상의 수상작이다.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비교적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임은 글 마무리인 “손주들에게 "이 할미가 호박잎 따다 팔면 된다 그랬지?" 하시며, 앙증맞은 작은 손에 용돈을 쥐어주는 상상은 얼마나 따뜻하고 정겨운 것인가. 아들과 나는 앙금처럼 남을지도 모를 탁한 잔상 대신 흐뭇한 상상을 사들고 온 것이다. 매주 금요일은 노쇠하신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 영양제를 맞춰 드리는 날이다. 아들과 나는 서둘러 번잡한 거리를 빠져나온다. 조금이라도 빨리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여우비 내리는 초가을 오후.(투명인간)”에서 다시금 확증되지만 ‘여우비 내리는 초가을 오후’와 같은 수사적 기법처리는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빛나는 존재감의 차별성을 지닌 따뜻한 서정성의 동일화 일면이다.
3. 영혼의 파동과 엄숙한 생명외경
모름지기사회·심리·음악학 등에 걸쳐 해박한 지성으로 비판이론을 주창하며, 미학의 발전을 역사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한 요소임을 주창한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는 시의 본질인 서정시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질과는 상이하게도 양적 진화라는 측면에서 서정시는 여전히 시의 본질이다. 비록 개인사지만 황윤현 시인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정황에서 병상의 노모를 위하여 정성껏 써내려간 ‘사모곡’을 축(軸)으로 윤무(輪舞)하며 모처럼 기획한 시집 『곤지곤지 죔죔』은 다소 유한적이고 허망한 삶도 일단 감동의 회복과 상처 깊은 영혼치유의 심려로 인하여 그 역동성이 빛난다. 그렇다. 인간은 자기흔적을 남기는 존재이기에 「전도서」의 가르침은 ‘허공, 무념, 무상’ 또한 당위성이 주어짐에 새삼 묵언으로 관망할 점이다.
까닭에 시적 상상의 자유로운 교감을 거쳐 빚어낸 그 자신의 시편은, 마침내 안식할 처소가 없어 방황하는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존재의 뿌리’인 가정(home)이라는 엄숙한 현상 앞에서 신선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아울러 한 편의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생명의 재해석인 연유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 심리는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의 형성과정에 있어 내면인식과 결부된 시적 응시에도 일체의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일단 전체적으로 심도 있게 지적하였듯이 그 자신이 호흡하는 삶의 처소에서 절대자에게 드리는 ‘온전한 기도와 느낌, 그리고 체취’는 응당 신앙인으로서의 감당할 느림의 미학은 공의를 밝히는 불(燈)이며, 생명의 기표이다. 또 하나 자명한 것은 ‘소중한 운명적인 만남과 조화로움, 그리고 경건한 종교성’은 그 자신이 삶의 문제 앞에서 ‘얼마만큼 고뇌하는가?’라는 물음의 해법이다.
각론하고 <그날의 기억>, <대학 병원의 좌절> 또한 지극히 미셀러니(miscellany)적인 <9월 14일 아침> 병상의 단상은 “주무시던 어머니가 뇌동맥 출혈을 일으키셨다.”의 전조(前兆)에서 한순간의 불안감과 초조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까닭에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 두개골 일부를 떼어낸 상태로 흰 망사모자를 쓰고 튜브를 통해 채 제거하지 못한 뇌 속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와 윗목 언저리에는 수술 때 흘러나왔을 피딱지가 굳어있었고, 세 개의 모니터가 바이털사인을 표시하고 인공호흡기는 규칙적으로 작동하며 어머니의 호흡을 유지해주고 있었다. 살아나셨다. 다시 태어나신 것이다. 내내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반전)” 이 같은 예문도 그렇지만 2019년 대한중환자의학협회 주관, 제2회 전국수기공모전 대상수상작인 <밀어 올려진 삶>에서 입증되듯이 슬픔은 예고 없이 찾아드는 불청객이다.
또 한편 가을의 초입, 몹쓸 꿈이라도 꾸신 걸까? 주무시다 뇌출혈을 일으키신 어머니. “생사의 경계에서 죽음의 강으로부터 삶의 가파른 언덕으로 환자들을 밀어 올리는 천사들의 날 선 긴장과 수고가 있는 곳. 가족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가슴을 훈훈하게 데워주는 곳. 중환자실의 내 어머니는 그렇게 언덕을 올라 기적 같은 삶을 찾으셨다.(밀어 올려진 삶)”의 보기처럼 중환자실에서 투병생활로 생사의 간극을 좁혀가는 모친에 대한 지극정성의 간병은 신선한 충격이다. 까닭에 불안감이나 어두운 그림자는 ‘증오, 시기, 불투명’ 등의 부정적 요인을 씻겨내기 위한 시의식의 변주를 탐색할 일이다. 짐짓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사회적 생태론의 창시자 머레이 북친의 지적처럼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무너트려야 한다.
이와 같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담백한 그 자신의 품격은 고통을 눈뜨게 하는 빛나는 응결체이다. 모처럼 서정성이 내재된 단상(斷想)에 수용된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감각적 표현에 내면인식의 중량감이 더해짐은 목가적 서정성이 한층 가미된 탓이다. 지극히 역동적인 창조적 활력(gold-brain)으로 생명외경의 존엄성을 끊임없이 일깨워 눈부신 존재의 꽃을 피워내는 그만의 행위는 눈물겹다. 한편 현재적 삶을 지배하는 크고 작은 갈등구조가 감당키 힘겨운 참담함으로 엄습할지라도 공동체인식(inter-being)의 막중함을 감내하며 대처할 바다. 간혹 역풍 속에서도 찢어진 그물코를 다시 깁는 건강하고 헌신적인 행위와 시련 앞에서도 소망의 닻줄을 움켜잡는 삶의 주체로서 깊은 상처치유의 적극모색은 또 하나의 감동이다.
결론적으로 ‘최소한 비공인 된 입법자’라면 ‘꽃은 비에 젖지만 꽃의 향기는 비에 젖지 아니하듯’ 응당 그 자신은 순전한 믿음을 올곧게 떠받드는 신앙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직하게 담당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임(고후 2:15)”을 수락하고 삶의 현장에서 맑은 영혼을 다독이되 자연의 이법에 거역함 없이 모성의 지극함을 진지하게 풀어낸 결과다. 까닭에 황윤현 시인만의 차별성과 식별력을 지닌 감성적 육성이 더해져 나직하게 읊조린 혈흔(血痕)같은 시적 감응과 일체감은 시너지효과를 얻어낸 창조적 행위로 가늠된다. 이처럼 지나친 수사적 기교와 언희(pun)를 배제한 지극선과 극명한 영성은 한층 빛나는 존재감은 신의 은총마저도 합리적 해법에 의해 매혹적으로 안겨주고 있다. 모쪼록 그 나름으로 맑은 영혼의 소유자에게 있어 평자의 각별한 기대치라면 영성의 신비로움을 확증하고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온전히 수행하는 믿음 안의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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