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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상징
차례
1. 성경에 나타난 수의 비밀
2. 고대인들의 수 개념
3. 게마트리아와 성경해석
4. 히브리인의 수 개념
5.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의 산술 법
6. '아톰'은 하나님 아버지와 결합된 '하나'
7. 성도는 천년의 신앙으로 하루를 산다.
8. 한민족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겼다
9. 창세기1장의 신비한 이중적 대립구조
10. 창세기 족보에 나타난 분리 역사
11. 상. 중. 하 삼층으로 지어진 방주와 구원역사
12. 노아 방주가 3층으로 만들어진 이유
13. 예수가 걸은 삼일은 구원 완성의 길
14. 모리아 산을 향한 아브라함의 삼일 길
15. 모세는 왜 바로에게 삼일만을 요구했나?
16. 한자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17. 삼족토기에 나타난 신앙의 자취
18. 삼일 만에 다시 산다는 부활신앙의 뿌리
19. 망명자 모세의 미디안에서 40년
20. 오순절과 50일간의 숨은 비밀
21. 첫 열매를 드리는 '주의 날'을 상징한 오순절
22. 하나님은 왜6일 동안 창조하셨을까?
23. 일곱으로 맹세하라
24. 인류 구원 역사를 완성하는 일곱 말씀
25. 일곱은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는 민족의 뿌리
26. 한민족이 섬긴 '일곱 별'의 하나님
27. 야곱의 가족은 70명인가 75명인가
28.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70가족
29. 70은 완전하고 충만한 가족의 수
30. 성경과 과학-할례와 8의 의미
31. 오묘한 수의 비밀
32. 모세의 구리 뱀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1. 성경에 나타난 수의 비밀
우리는 목회자들의 설교 중에서 수의 상징적 의미를 들을 때가 있다. 수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미신의 요소가 아닌지 의심할 때도 있다. 그러나
숫자에 대해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간 인간을 매혹시켜 온 숫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수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이
담겨져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와 관련된 힘을 이용해 마법을 행하거나 자신의
기도에 강한 효험을 부여하고자 노력했고 일종의 ‘수비술’(數秘術)로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성경의 숫자 개념 속에는 수치, 수량, 시간 등 표면적인 기능 외에 상징적이고 종교
적이며 신비적인 기능도 포함된다.
*성경에 숨겨진 수의 신비*
성경에는 감추어진 신비한 상징의 세계가 다양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의 상징체계이다.
우리는 간혹 역사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간섭을 인정하면서도 성경과 자연에 나타난 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책으로 성경에 나타난 숫자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전14:10).
성경의 숫자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숫자들은 하나님의 정확한 계시이며, 하나님의 계획적인 디자인을 보여주시려는 성경 기자들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문화 속의 수비 학*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수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특정한 수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 1, 3, 7, 10 등은 인기 있는 숫자인 반면에 4, 6, 13, 18
등은 사용하기 꺼리는 숫자이다.
4는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독음이 똑같고
18은 상스러운 욕설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13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불행의 수로 믿는데, 예수와
열두 제자의 마지막 성만찬과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수에 신비적 혹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수비 학은 서양문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지금 도박이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 사용되는 카드도 초기에는 수비 술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외에 주사위, 주판, 다트 등은 수비학적인 예측, 예언을 위해 사용되었다.
*수학의 근간은 수비 학*
고대 바벨론에서 발달한 천문학은 그리스로 전파돼 새로운 수론으로 발전하였는데 여기서 피타고라스 학설이 탄생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원리를 수로써 풀어보려고 시도했으며, 그의 학파의 수학이론은 수비 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국의 역(易)에도 음양을 각각 나타내는 2개의 추상적 기호를 바탕으로 이원론 체계를 세웠다. 중국의 역은 1에서 10까지의 수에 대해 홀수를 '양'의 천수(天數)로, 짝수를 '음'인 지수(地數)로 나누어 천지를 상징하는 홀수와 짝수가 우주간의 모든 변화를 이루는 원리라고 생각했다. 수학은 그 기원부터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철학적 종교적 이론의 바탕을 이루었고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2. 고대인들의 수 개념
인류 초기 인간들은 수를 셀 때 "하나, 둘, 많다"로 셌는데, '셋'부터는 많은 것으로 이해
했다. 이에 대해 캇시러(Cassirer)는 '수 개념의 인식을 위해 가장 중요한 수는 2라는 숫자
'라면서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이나 빅토리아의 원주민들 같은 원시적인 민족들은 2 이상의
수사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다른 원시 민족들도 1, 2, 3의 수사만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1, 2, 많다'라는 수 개념밖에 없던 고대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손가락 다섯 개를 이
용한 5진법을 발견했다. 그리고 열 손가락에서 10진법,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합쳐서 수
를 세면서 이십 진법이 유래됐다. 엄지로 네 손가락의 마디를 세어 가면서 12진법을 발견
했다. 고대 바벨론 인들은 10이라는 단위 수 외에 60이란 단위도 알았다. 이 60진법은 오늘날 까지도 원의 각도나 시간, 분, 초 등의 단위로 남아 있다.
원시적 고대인들은 수를 작대기로 표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문명이 형성되면서
각 문화와 민족마다 각자 자신들만이 지닌 고유한 수 기호가 생겨나게 됐다. 고대 이집트
는 그림으로 나타낸 숫자를 사용했고, 페니키아인들과 로마인들은 비교적 원시적인 형태의
숫자를 사용했다. 이후 고대 그리스에서는 복잡한 수의 계산을 위해 문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 이집트의 수 **
이집트에는 기하학과 같은 실용적인 수학이 발전했다. 이집트에는 매년 비옥한 토지를 뒤덮는 나일 강의 범람으로 기하학이 발달했다. 매년 나일 강 범람으로 인해 지워진 토지 경계를 새로 정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토지 측량술이 발전했다. 더불어 ‘토지 측량술’이라는 뜻을 지닌 '기하학'이 시작됐다.
이러한 이집트의 수학은 엄청난 10진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의 수 **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숫자는 진흙으로 만든 판자 위에 쐐기 모양의 문자를 새겨서 썼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학과 기하학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예부터 수메르인과
아카드 인들은 10진법, 12진법, 60진법 등을 사용했으며 복잡한 상거래에 실용적 수학
을 널리 응용했다.
바벨론의 수학자들은 네 가지의 기초 산술법 외에 자승과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삼각형, 사각형, 사다리꼴의 면적과 입체도형의 체적을 계산할 수 있었다. 메소포
타미아에서 수 개념은 직관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인 것이 특징이다.
** 그리스의 수 **
그리스인들은 그림을 사용하지 않고 알파벳에다 값을 부여하고 이를 이용하여 알파벳 위에 윗줄을 그어 문자와 구별해 수를 표현했다. 그리스에서의 수학은 실용성보다는 이론적 흥미 때문에 발달했으며, 10, 이 모든 숫자의 기초와 기원이 되고 우주 만물의 기본이 되는 '1+2+3+4'에 의해 산출되었다고 보았다. 다른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같이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 구조의 중요한 특성으로써 서로 반대되는 쌍들의 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 쌍들 가운데는 선과 악, 남성과 여성, 홀수와 짝수가 있다. 선과 남성은 홀수와 연상되고 악과 여성은 짝수와 연상된다.
또한 그리스에서 수는 신성의 개념을 지닌 것으로, 숫자들은 그것들로서 세상을 짜 맞춘 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의 생각들'이라고 보았다.
3. 게마트리아와 성경해석
중세 기독교의 수비학인 '게마트리아'는 문자를 수로 사용하는 방법과 이것으로부터 나오
는 수비 학의 광대한 해석체계를 말한다. 즉 게마트리아의 본질적인 요소는 문자가 수를
나타내고 수가 문자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숫자에 의한 문자풀이 법은 바벨론의 사르곤 2세(B.C.723-705)시대의 비명을 통해 알려
져 있다. 숫자에 의한 문자풀이 법은 유대 전통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A. D.1세기
경 유대교 랍비였던 엘리에제르는 경전 해석의 32가지 방법 중 29번째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B. C.3세기 이후 헬라 문면의 영향 속에서 히브리인의 숫자 표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알파벳 순서를 수의 기호로 사용하는 헬라 방식에 따라 유대인들도 히브리 자음 순서
로 수의 기호를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문자를 수의 기호로 사용함에 따라 특정한 단어가 특정수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다. 성경이 모든 낱말과 각 글자는 일정한 숫자를 갖고 있어 서로 풀어지거나 얽힐
수 있으며 신비스런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어들이
'코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영향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랍비들이나 필사 자들에 의해 구약성경의 문자
자음이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경우가 일어났다. 단어와 숫자를 혼용하는 방식은 신약성경
에도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민수기에서 모세는 '구스 여인'을 취했다. 구스(5+20+300+10+400) 여인은
숫자로 풀이하면 735를 의미하는데 이것의 철자를 변형시키면 736이 된다. 이 숫자는
창12:11절의 '아리따운'(10+80+400+40+200+1+5)과 동일해지기 때문에 옹켈로스
의 탈굼 성경에는 모세의 아내를 아리따운 미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게마트리아에 의한 성경해석들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세기(49:10)에 나오는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구세주의 도래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된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야바 실로'는 10+2+1+300+10+30+5에 해당하는데 이 수의 합은 358이다. 또한 구세주의 히브리어 '메시아'도 40+300+10+8로 합이 358이 된다.
민수기21:9에서 뱀에게 물린 사람을 치료한 모세의 구리 뱀 '나하쉬'도 50+8+300으로 358이 된다. 그래서 358은 구원의 수라고 해석한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낱말이 맛소라 구약성경에서 일곱번만 나오며, 히브리어 낱말 수의 값은 153(2+50+10+5+1+30+5+10+40)이 된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부활 후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라는 점을 들어 구약 하나님의 아들들과 연결시켜 교회(그물) 속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어 '물고기'의 단어 수의 값이 '153×8'(1224)로 나오는 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
한편 유대인들의 1년은360일로, 7년은2,520일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2,520이 수리적
으로 4대 숫자(3, 7, 10, 12)를 곱한 수로 '연대적 완전수'라고 말한다. 즉 질적인 완전
수 3과 영적인 완전수 7, 서수의 완전수 10, 완전통치의 상징인 12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위대하며 기초가 되는 족장은 아브라함의 개명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세상의 수인 네 개의 문자로 되어 있던 아브람을 은혜의 수인 5수로 만들
기 위해 하나의 글자를 삽입해 아브라함으로 개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상징하게 한다고 말한다.
4. 히브리인의 수 개념
성경시대 히브리인들의 수 개념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 고대 근동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구약 중간시대(B. C.3세기)이후에는 그리스의 수 개념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아 우르 출신으로 이 지역의 숫자 개념이 아브라함을 통해 히브리인들의 사고 속에 영향을 미쳤고, 야곱 이후 이집트에서
4백여 년 간 종살이했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의 수학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라(모세오경)를 기록한 모세는 이집트 수비 학의 지혜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토라 기록에
서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문화와 행정, 종교, 언어에서까지 그리스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히브리인의 숫자 표기도 그리스적인 영향을 받았다. 히브리인들은 숫자를 기록할 때 기호
로 표시하지 않고 기수(基數)와 서수(序數)를 문자로 표시하였고 이 용어는 아카드어로 부
터 유래됐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이후 그리스의 영향으로 기수 문자대신 히브리어 알파
벳 자음 글자를 산수용 숫자로 대용했으며 마카비 시대 화폐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수의 기본적인 기능은 수효나 수치, 분량을 나타내는데 사용하는 기호이지만, 구약에
사용되고 있는 수는 숫자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기능을 따르지 않는 숫자가 있다.
이른바 단순한 수치를 나타내는 데 쓰이지 않고, '형용사'나 '상징 수'로 전용된 경우가 많다.
** 수의 형용사적 용법 **
구약성경에서 숫자가 수효나 수량 등을 나타내기보다는 형용사나 문학적 수사로 전용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 사람들은 아들은 많이 두기를 원했고, 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아들의 수는 70명이었다. 그래서 노아의 세 아들에 의해 전 세계에 퍼진 민족들의 조상(세 아들들의 후손)을 세어보면 정확히 70명이 된다(창10장).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자손이 70명이란 것과 기드온의 아들들이 70명이라는 것도 모두 이상적이고 충만한 자녀를 두었다는 수비학적인 형용사적 표현이다.
배제민 교수는 70이란 숫자가 아들이란 낱말과 함께 쓰일 때는 수치보다는 ‘이상적’이란 뜻을 나타내며, 또한 12란 숫자가 종족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굳게 결속된’이란 뜻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
** 수의 상징적 용법 **
구약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예배 의식과 관련해서 특정수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것을 이 숫자들이 본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거나 어떤 중요시되는 사물의
상징으로써 사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3, 7 등 일부 신성한 숫자들은 성스런 제의와
관련 되어 있고, 그 숫자 자체로서는 일정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련의
숫자들은 사색의 수단과 수수께끼를 푸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엄원식 교수는 ‘구약 성경의 일정한 책들에는 수적인 상징을 인정하거나 형성하거나 또는
반영하고 있다’면서 일련의 숫자들은 그 개개의 상징을 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쓰여졌기 때문에 이 숫자들의 상징을 이해함으로써 묵시문학과 예언문학을 비롯해 역사
문학과 모세오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이 성경에 나타난 수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단순히 우수리 없는
작은 자연수로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상징적 의미와 관계없이 특수한 수로서 쓰였
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성경 많은 곳에서 수는 의식적이며 상징
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예배 의식에 관련해 어떤 특정수가 빈번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숫자들이 본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
난 수는 상당부분 성경 기자들에 의해 신학적 배경에서 상징적이며 의도적으로 사용
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5.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의 산술 법
고대인들은 수에 대한 관념이 부족할 분 아니라, 산술 법은 극히 기초적인 수준밖에 안 됐다. 그렇다면 성경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어떠했을까?
고대 히브리인의 수 개념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수 개념을 차용했다. 히브리인들은 기하학보다는 비구상적인 산술학과 대수학에 재능이 있었다. 즉 네 가지의 기초 산술법인 가감승제(加減乘除)에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분수에 관해서도 얼마의 기초 지식이 있었고, 단위 분수는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했음이 성경에 드러나 있다.
*더하기 배기 곱하기 나누기
구약에 나타난 덧셈을 찾아보면 민수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민수기(Numbers)는 책 이름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합산하고 있는데,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민1:2)라고 기록했다.
뺄셈은 창18:28-33절이 가장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을 멸하시려는 하나님께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성을 멸하시리이까?” 라는 간구를 통해 최종 ‘열 명’까지 의인의 수를 빼고 있다.
성경에서 곱셈은 희년 계산법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7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레25:8). 또한 나눗셈은 나눔과 배분에서 나타나는데,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민31:27) 등으로 나눗셈을 표현하고 있다.
*분수와 원주율
구약에서 사용된 분수를 찾아보면
2분지 1(출25:10, 17),
3분지 1(삼하18:2),
3분지 2(슥13:8),
4분지 1(삼상9:8),
5분지 1(창47:24),
6분지 1(겔46:14),
10분지 1(출16:36),
10분지 2(레23:13),
10분지 3(레14:10),
100분지 1(느5:11) 등이 있다.
한편 히브리인들은 원주율 ∏의 값을 알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왕상7:23절에서 성전에 사용된 물두멍 ‘바다’의 크기가 직경 10규빗(4.146m), 둘레 30규빗(13.248m)이라고 했는데, 이는 원주율 ∏(3.14)의 값이 대강 3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경 속 통계학
성경에서 인구조사 통계는 모세 시대와 다윗 시대에 실시됐음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애굽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구조사를 명령받았다. 모세는 각 지파의 가족과 종족별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이십 세 이상의 남성만을 계수했다. 광야에서의 히브리인 인구조사 통계는 2차에 걸쳐 실시됐으며 민수기1장과 26장에서 나타난다.
다윗 시대의 인구조사 통계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다윗의 명령에 의해 실시됐다(대상21:1).다윗이 실시한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 왕국의 국방력을 알아보기 위한 군사력 조사 통계였다. 하나님보다는 군사력을 자랑하고 의지하려는 악의적인 인간의 교만이 전 백성에게 온역이라는 큰 재앙을 몰고 왔다. 결국 다윗이 실시한 인구조사 통계는 헛고생이 되고 말았다.
6 '아톰'(나눌 수 없는 것-원자,극히작은것,미립자,소부분,핵에너지)은 하나님 아버지와 결합된 '하나'
지구조차도 하나님은 티끌과 같은 것으로 여기신다. 그 지구 안에 있는 인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작은 존재이다. 그러나 티끌만도 못한 인간 하나를 하나님은 우주의 전체 무게보다도 더 무겁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 티끌보다 작은 ‘아톰’(atom)으로서의 사람 하나가 우주보다 더 무거운 성경의 원리를 탐험해본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
절대적으로 나눌 수 없는 가장 최소한의 것을 ‘원자’(原子, atom)라고 한다. 이 아톰(atom)은 어원적으로 ‘a’와 ‘tom’의 결합형이다. ‘a’는 그리스어로 부정(不定)의 접두어이고, ‘tom’ 역시 헬라어로 ‘분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곧 ‘아톰’(atom)은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아톰은 물질의 기본 구성단위로서, 전통적으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물질이 다 원자로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것을 보여준다.
특히 책, 잡지, 신문, 비디오처럼 직접 사람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정보전달체제들을 말할 때 아톰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보이는 역사의 흐름은 이 아톰(물질)을 중심으로 계속 전개되어 왔다.
한 개인으로서의 아톰
그런데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이 아톰의 뜻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한 ‘개인’과도 동일한 말이다. ‘개인’, ‘개체’, ‘낱개’를 말하는 ‘individual’은 ‘in’과 ‘divide’의 합성어이다. ‘in’은 부정(不定)의 뜻이고 ‘divide’는 ‘나누다’라는 말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이라는 말이다. 상식으로는 아닐 것 같지만 ‘개인’과 ‘원자’가 결국 같은 어원을 가진 동의어라는 뜻이다.
한 개인과 완전한 하나
이렇게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완전하다’라는 것과 의미 상통한다. 다시 말해 ‘온전한 개체’ 또는 ‘온전한 전체’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동양사상에서 ‘하나’(一)라는 개념은 ‘개체’(個)와 ‘전체’(全)의 두 가지 개념이 다 포함되어 있다. 온전한 개체에서의 하나는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온전한 개체를 의미한다.
양자물리학에선 ‘어떤 대상에 대해 확실하고 온전하게 알 수 있는 길은 그 대상과 일체, 곧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하다. 관찰의 주체와 대상이 분리된 상태, 곧 갈라짐은 대상에 대해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완전한 개체가 바로 ‘하나’인 것이다. 이 온전한 개체들이 모여 조직적으로 연결되면서 큰 하나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전체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가 온전한 개체 또는 아톰으로서 일(一)또는 하나라고 본다면, 이 온전한 개체들이 모여 구성된 인체는 큰 하나로서의 일(一), 곧 전일(全一)이 되는 것이다.
하나와 티끌의 관계
이렇듯 하나는 ‘완전한 전체’이다. 특이한 것은 성경이 하나 또는 개인을 ‘티끌’이라는 단위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아담의 원료가 흙이었다는 점에서 한 사람 역시 티끌과 같은 존재이다(창2:7). 아브라함도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다(창18:27). 그리고 이 티끌로 구성된 전체 세계 역시 하나의 큰 티끌인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이스라엘 백성도 티끌로 묘사된다(창13:16, 28:24, 민23:10, 대하1:9). 사40:15절은 하나님께 열방은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떠오르는 먼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사17:13).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하나
하나님은 이 전체로서의 하나를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마10:29).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면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13:39)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는다(마18:10).
100마리의 양 중 하나를 잃어버리면 99마리를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다(마18:12).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으며(눅15:8),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눅15:10).
이처럼 온 우주만물 가운데 매우 지극히 작은 것 ‘하나’, 작은 사람 ‘하나’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은 것과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은 하나님께 한 것임을 성경은 오늘도 선포하고 있다(마25:40). 더불어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이다(요17:21-23).
결국 아톰으로서의 하나인 사람은 이 지구보다, 온 우주만물보다 그 가치의 무게가 훨씬 더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7. 성도는 천년의 신앙으로 하루를 산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빛의 속도는 초속 29만7천6백Km다. 이러한 빛보다 빠른 속도의 물질이 있을까?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돈다는 빛보다 빠른 개념을 ‘타키온(tachyon)’이라고 한다. 빛의 속도를 광속이라 했을 때, 타키온은 초 광속인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이론적으로는 훨씬 더 작은 시간의 단위를 ‘크로논’이라고 한다.
타키온과 크로논은 우리가 보는 빛보다 빠르며 지구상의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따라서 지구상에서 계산되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는 다른 세계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을 조금이나마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다.
타키온과 크로논
고대의 인도인들은 일초를 삼억 조각으로 나눔으로써 우리가 ‘지금’이라고 표현하는 순간을 계속 좁히려고 했다. 그리고 최근 이론적으로는 훨씬 더 작은 시간의 단위, 곧 ‘시간 양자’( ? 소립자, 미립자)인 ‘크로논’이 얘기되고 있다. 이 시간 양자의 수명은 측정 가능한 가장 작은 거리인 10-14cm를 우리의 우주에서 측정된 최고의 속력, 곧 초속 약 3십만Km의 광속으로 나누어서 산출한다. 이렇게 하면 물리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간의 단위인 10-24초를 얻게 된다. 이렇게 가장 작은 시간 단위인 ‘지금’이라는 지점은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빛의 입자, 즉 광자(??를 추월하는 개념으로써 ‘초 광속’은 빛의 한계를 뛰어넘고 시공과 우주를 떠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시공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로, 현대 물리학에서는 ‘초공간’(hyperspace)이라고 표현되는 구조인 것이다. 이 이론은 콜롬비아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제럴드 파인버그가 1967년에 광속보다 빠른 입자, 소위 말하는 타키온의 존재를 설명하면서 시작됐다.
초공간의 경험
이런 초공간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나이를 먹지 않게 될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많은 얘기 가운데, 우리는 갑자기 사라졌다가 100년 도는 그 이상의 세월 후에 사라졌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현실 속에 나타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종종 있다. 중요한 것은 사라졌던 기간 동안에서 그 사람의 지구의 나이를 초월, 즉 노화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이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가운데 단 한 벌의 옷과 신발을 가지고 생활했다. 그 옷과 신발은 해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신29:5). 장정만 60만3천550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과 신발은 지구의 과학 용어를 빌리자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타키온과 크로논이라는 초공간 속에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원리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창세기, 특히 창세기5장의 족보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므두셀라는 969세로 가장 장수한 사람이다. 이 외에도 아담 930세, 셋 912세, 에노스 905세, 게난 910세, 야렛 962세, 노아 950세로 역시 거의 천년의 삶을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이들의 살았던 지구환경은 지금의 상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며, 오염되지 않은(오존층이 파괴되지 않는 등) 환경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적인 정확한 근거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천년 가까이 살기는 했지만 천년을 채우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3장8절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시편90편4절에는 천년을 ‘밤의 한 경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천년이 안 되는 사람’이 예표 하는 것은 주께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하루의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그들의 나이를 통해 인생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의미하는 온전한 하루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루의 신앙은 타락으로 어둠인 인간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어드릴 때 가능하다(요1:5, 눅17:22). 이 하루가 되지 못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성경은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을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욥14:19). 창세기5장의 인물 중에서 ‘에녹’만이 하나님이 하늘로 데려가셔서 이 세상에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창5:21-24). 이 세상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다는 말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인해 승천했다.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지 않는 초공간의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천년의 신앙으로 하루를 사는 성도
타키온과 크로논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부활과 변화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빛을 통해서 영원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얘기하셨다. 성경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이 부활과
변화의 소망을 갖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 신앙이 죽어서 부활이 아닌, 살아서 변화
의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크로논과 타키온이라는 과학이론의 발견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년 같은 신앙으로 범사를 사는 하루의 성도가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호소하고 계신다.
8. 한민족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겼다.
우리 한민족 고유의 천신(天神) 칭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유일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고대문헌들과 사학자들, 우리나라에 왔던 기독교
선교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은 예로부터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해왔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이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유일신의 이름인 여호와의 개념
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민족과 유일신 하나님
한민족이 섬겨왔던 신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세조실록의 「표훈천사」(表訓天詞)라는 책에는 “상천계(上天界)에 三神이 계시는데, 곧 상제 한 분이라, 그 주체가 1이며 3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이 곧 삼신이라 삼신이 만물을 낳고 수 없는 전 세계를 통치하시며 그 지혜와 권능은 한량이 없고 그 형체는 안 보이나 최상 상천에 좌정하시며 천만
억 국토에 광명을 대방(大放)하고 신묘(神妙: 신통하고 오묘함)를 대발(大發: 크게
일어남)하고 길상(吉祥: 운수가 좋거나 경사가 날 조짐)을 대강(大降: 크게 내리다)하며
가기(呵氣: ‘내뿜는 기운’으로 상제께서 내쉬는 상서로운 기운)로써 만유를 포괄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국 고대사의 전문가인 임승국 박사는 신라시대의 「삼성기 전」
하편에 기록된 ‘한임’을 주석하면서 “한님 또는 하나님의 호칭은 우리 민족 고유의 유구한
신 칭(神稱)이다”라며, “민족사를 하나님 나라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나라는 우리 역사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야기 한국 고대사」의 저자 최범서 씨 역시 임승국 박사와 동일한 얘기를 했다.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조선 선조 때의 박인로(1561-1642)의 노계
가사라는 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時時로 머리 드러北眞을 바라보고 남모르는
눈물을 天一方에 디이나다 一生에 품은 뜻을 비옵나다. 하나님아’
외국인 선교사들의 증언
유일신을 섬겼던 한민족에 대해서는 한국에 왔던 개신교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캐나다 개신교 선교사인 게일(J. S. Gale)은 그의 저서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에서 “한국인의 신이란 ‘하나님’으로서, 즉 유일하게 위대하신 분이다”라고 말했다.
헐버트(H. E. Hullbert)라는 미국인 선교사는 그의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순수한 개념으로써의 종교관은 외래적인 의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원시적인 자연숭배와도 거리가 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이라는 어휘는 ‘하늘’이라는 단어와 ‘주인’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한자의 ‘천주’(天主)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한국인들은 이 하나님이 우주의 ‘최고 지배자’라고 믿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개신교 장로교 선교사인 H. G. Underwood의 부인인 L. H. Underwood는 「Underwood of Korea」에서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왕국(the Kingdom of Kokurei)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 우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 그리고 유일한 신 하나님은 크고 유일한 하나(only one)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유일신 하나님
이러한 유일신 개념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신과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신 여호와가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왕하19:15,요5:44,17:3).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 하셨나이다.”(사3:16) 헐버트 선교사는 이에 대해 “한국인들은 유일신을 믿으며, 이 하나님에게 부여된 속성이나 권능은 외국의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거의 보편적으로 말하는 여호와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출20:3-6, 신5:7-9). 이 같은 차원에서도 한민족은 우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 “중국에서는 천주라는 이름을 갖는 우상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형상을 부여하려고 한 적이 없다.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어떤 상식적인 의식으로 경배하지 않는다.”는 헐버트 선교사의 증언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일 선교사 역시 한민족의 유일신인 하나님과 관련해서 “중국어와 한국어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하나’와 ‘위대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용어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나 땅, 혹은 지하에 그 모습이나 화상(畵像)이 존재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인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나님과 한민족 신앙의 뿌리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한민족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또는 한민족으로 시작할 때부터 유일신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민족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섬겨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나타내는 영어의 ‘God’이나 그리스 헬라어의 ‘데오스’(Theos) 등은 소위 많은 신들, 또는 이방 신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용어들이다. 그리고 한자어의 ‘상제’(上帝)의 경우 많은 신들 중에 최고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유일신 하나님인 여호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가장 적합한 용어로는 ‘하나님’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한국인들이 믿는 유일신은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전파했던 여호와와 일치한다.’는 헐버트 선교사의 말은 이런 점에서 유익하다. 그렇다면 한 마디로 한민족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겨왔던 신앙의 뿌리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 창세기1장의 신비한 이중적 대립구조
사도 요한과 바울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신학적 의도에서 헬라의 이원론을 자주 사용했다. 두 사도가 기록한 성경 속에는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롬2:28-29),
육신의 자녀와 언약의 자녀(롬9:9),
육과 영(요3:6, 롬8:4-6),
율법과 은혜(갈3:18, 요1:17),
종의 자녀와 자유자의 자녀(갈4:22-31) 등
이중적인 대립구도에서 전개되는 부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창세기 속에서도 이원론과 비슷한 이중적 구조를 찾을 수 있다. 이 이중구조에 대해
예표론 적인(typological)형태의 해석도 가능한데, 창세기 속에서 펼쳐지는 이중구조 이야기를 살펴보자.
창세기 안에서의 분리 역사
사도 바울과 요한은 이중적 대립구조에서 성도들에게 구별된 삶, 영적인 삶, 위에 것을 찾고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도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이중적 구조에서 천지창조와 족보를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1장의 천지창조만을 살펴보면,
첫째 날에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빛을 만드셔서 ‘빛과 어둠’을 나누어 낮과 밤이라는 이중적 대립구도를 성립했다(창1:3-5).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하늘)을 만들어 물이 나뉘게 하셨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이중적 구도를 만들었다(창1:6-8).
셋째 날에는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땅과 바다’를 나누는 이중적 구조형태를 취하셨다.
그리고 땅에는 식물이 자라나도록 하셨다(창1:9-13).
넷째 날에는 궁창에 광명을 만들어 땅을 비추도록 하셨는데 큰 광명으로는 ‘낮’을, 작은 광명으로는 ‘밤’을 주관하도록 하여 ‘빛과 어두움’으로 나눠지는 이중구조를 만들어냈다(창1:14-19).
다섯째 날에는 하늘과 바다에 생육하고 번성할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셨는데, 하늘을 나는 생물과 바다를 헤엄치는 생물로 나눠지는 구조가 자연히 형성됐다(창1:20-23).
여섯째 날에는 땅에서 살아가는 생물인 ‘사람과 짐승’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고 짐승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지 못했다는 이중적 구조가 담겨져 있다(창1:24-31).이 분리작업에 대해 사도 바울은 빛과 어두움의 분리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의와 불법의 분리에 작용시킴으로써 도덕적, 종교적 성결의 원리로 확대 해석했다(고후6:14).
한편 창세기1장 천지창조의 각 날은 분리되고 대립되는 이중구조로 기록되어 있지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도 이중적 구조 속에서 서로 보충하고 완성되고 있다. 즉
첫째 날 빛의 창조(빛과 어두움)가
넷째 날 광명의 창조(낮과 밤),
둘째 날 궁창의 창조(하늘과 아랫물)가
다섯째 날 새와 물고기의 창조,
셋째 날, 땅과 식물의 창조는
여섯째 날 사람과 짐승의 창조와 이중적이면서 보충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10. 창세기 족보에 나타난 분리 역사
창세기1장은 ‘빛과 어두움’이라는 기본적 이중구조를 토대로 대립적 구도에서 천지창조를 기술하고 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분리에 적용시키고 있다(고후6:14-16)
사도 바울은 성도의 순결한 삶과 불신자와의 단절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고, 불신자들과 타협하거나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로 고후6장에서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을 대립시키며 공존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창세기에는 사도 바울이 내세웠던 성도와 불신자의 구분, 영과 육의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형태로 족보가 기록되었음을 볼 수 있다.
타락한 인류를 분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제일 먼저 실행에 옮기신 것은 죄악 된 인간을 에덴으로부터 분리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류가 에덴에서 살지 못하도록 추방하셨고, 그룹과 화염검으로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창3:23-24).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은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열 납 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벨의 제물만 열 납 하셨다(창4:1-7).아담의 두 아들의 제사는 선민과 불택자를 갈라놓는 분리역사의 시작이었다. 아벨은 제사의 결과로 하나님께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받았고(히11:4), 시기로 동생을 살인한 가인은 악한 자의 표상이 되었다(요일3:12, 유11).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벨 대신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는데
셋의 후손은 영의 일을 좇는 경건한 자손들의 계보로(창4:25-5:32),
가인의 자손은 육신의 일을 좇는 불경건한 후손들로 기록되고 있다(창4:16-24).
또한 셋의 자손은 하나님의 아들들(빛의 자녀)로,
가인의 자손은 사람의 딸들(어두움의 자녀)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창6:1-2).
아담의 7대손 에녹은 하나님과 3백년간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창5:21-24, 히11:5). 에녹만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에녹의 삶이 지상의 사람들과 분리됐다는 것을 나타내며, 지상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했음을 드러냈다.
노아는 경건한 삶을 살면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고 홍수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창6:5-). 그러나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했다. 하나님이 죄악 된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경건치 않은 자들을 홍수로 멸망시킴으로써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게 됐다(벧후2:5).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상숭배의 땅으로 상징되는 갈대아 우르의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남으로 세상과 분리된 삶을 택했다(창12:1-4).
아브라함의 아들이삭과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영의 자녀)와
육의 자녀로 분리되는 대표적 모델이 되고 있다(갈4:22-31).
또한 성경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도 쌍둥이 형제이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육의 소욕을 좇는 자),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하나님의 장자 권을 좇는 자)로 구분하여 묘사하고 있다(롬9:10-13).
산 자를 통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창세기 족보는 산 자와 죽은 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약속의 자녀와 육의 자녀,
의로운 자와 악한 자,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산 자들은 ‘산 자’이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육신의 소욕대로 산 자들은 ‘죽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계3:1-).
예수도 경건한 삶을 산 조상들의 하나님을 ‘산 자의 하나님’으로 표현함으로서(마22:32),
하나님의 뜻대로 산 조상을 ‘산 자’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 자’라는 것은 육신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11. 상. 중. 하 삼층으로 지어진 방주와 구원역사
창6:16절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상. 중. 하 삼층으로 지으라고 명령하신다.
특별히 삼층으로 지으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이면 속에 숨겨진 메시지는
무엇일까?
해외 신학자들의 견해
인체나 성전, 소우주를 상징하며, 세밀한 돌보심을 보여주는 것
데렉 키드너는 방주의 삼층에 대해 '정돈되고 또 서로 구분되게 하심으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세밀히 돌보셨는가를 잘 나타내 주는 한 예'라고 말한다. 고든 웬함은 '방주는 한 층이 성막과 같은 높이인 3개의 층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며, 각 층당 한 구획이 성막의 뜰과 같은 면적인 세 개의 구획으로 되어 있었을 것' 이라는 야콥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방주와 성막이 성경에 서술된 유일한 구조물인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인다.
진 쿠퍼는 그의 저서 '세계문화상징사전'에서 '방주 자체는 인체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어져 소우주의 상징으로 생각된다.'고 말해, 영. 혼. 육인 인간의 모습을 방주와 연결 짓고 있다.
국내 신학자들의 견해
동물, 식량, 사람 순으로 신앙의 단계가 높아지는 상징적 과정
총신대 서철원 교수는 '동물들이 맨 아래층에, 식량은 중간에, 사람은 맨 위층에 살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곧 짐승들은 움직이고 수가 많아서 무거우므로 맨 아래층에 배치됐다는 것. 동물들은 그 동안 새끼를 낳아서 수가 매우 많아질 것이며, 또 동물들의 오물을 쉽게 처리해야 하므로 맨 밑에 위치되어야 합당하다고 설명한다. 새들은 그 소리들과 오물들 때문에 아래층에 대부분 배정했을 것으로 봐야 합당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식량은 동물들과 사람들과 새들이 먹어야 하므로 중간에 배치하여 배불리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식량을 먹어갈수록 배는 점점 가벼워질 것이므로 맨 아래 저장하면 무게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맨 위층에 자리 잡아 배를 운전하기에 편리하고 물들의 변화 상황에 대처하도록 했다고 한다.
백종안 목사는 3층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물론 많은 것을 적재하기 위해였겠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중생(1층), 성화(2층), 영화(3층) 또는 믿음(1층), 소망(2층), 사랑(3층)으로 신앙의 계단이 높아지는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신의 완전한 구원을 상징
삼층에 해당하는 말은 '셀리쉬'로 셋째, 세 번째, 제3등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솰라쉬'는 말은 세 번, 세 겹, 삼 년, 사흘, 최상의 등을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동사로 '~을 세 번째 하다, 세 부분으로 나누다' 등의 뜻을 가진다. 중층에 해당하는 말은 '쉐니'로 두 번째, 둘째 등을 의미한다. 하층에 해당하는 말은 '타흐티'로 ~보다 낮은, 가장 낮은, 깊은 곳, 낮은 아래, 지하, 최하의 등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삼층을 인간의 구원 원리의 구조로 볼 때 1층은 육, 2층은 혼, 3층은 영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타락했다고 설명한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없는 존재로 타락한 존재를 '짐승'이라고 설명한다(시편49:12, 20).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수를 사람의 수라고 말하면서 666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계13:18). 결국 이것은 여섯째 날 창조된 사람이 영과 혼과 육이 타락한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따라서 삼층은 타락의 과정과 동시에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리한 말씀을 통한 타락회복의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살전5:23, 히4:12).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노아 방주는 인간의 완전구원을 상징한다. 마지막 때에 있어서 특별히 노아 같은 인자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영과 혼과 육신이 완전히 구원을 이룬다는 결론은 바로 인간의 변화를 의미한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는 말씀이 이것을 암시한다. 이런 측면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다는 것을 이 노아방주를 통해서 계시해주고 있다.
참고로 구조적인 측면에서 1층은 첫째 하늘, 2층은 둘째 하늘, 3층은 셋째 하늘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늘에 대해 복수 형태인 '하늘들' 또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왕상8:27, 대하2:6, 6:18, 시68:33, 102:25, 148:4, 사34:4, 렘4:23, 10:12, 51:15). 이와 함께 고후1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성경에서 하늘의 개념은 삼층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언약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1층은 구약시대인 율법을,
2층은 신약시대인 은혜를,
3층은 하나님의 약속 또는 말씀이 성취되는 시대를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방주의 모습은 겔42:5-6절에 기록된 성전 뜰에 있는 삼층으로 된 건물을 연상하게 한다.
12. 노아 방주가 3층으로 만들어진 이유
전 세계에 퍼져있는 홍수설화 가운데 구약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얘기는 세부적이고 특이하다. 창6장에서는 노아 방주의 정확한 크기, 재질과 함께 3층(상, 중, 하층)으로 만들어졌고(창6:14-16), 3층으로 만들어진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과 모든 짐승의 암수 한 쌍씩이 들어갔다(창6:18-19)고 기록했다.
모세는 좀 더 자세히 방주에 들어간 짐승에 대해 정결한 짐승 일곱 쌍, 부정한 짐승 두씩이라고 말한다(창7:2).
하지만 성경은 방주3층에 노아 가족 8명과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이 각각 어디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노아 당시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은 있지 않았다.
또한 노아가 왜 방주를 상, 중, 하층으로 만들었는지에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에 대해 모세의 다른 저작인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해답을 알려준다.
방주의 3층과 레위기 3중 구조
레위기에는 '거룩한', '정결한'(깨끗한), '부정한'과 같은 단어들이 중심단어로 사용된다. 레위기는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은 '속된 것'이고, 속된 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한다. 또한 '거룩'은 '속된'의 반의어이며, '정한'은 '부정한'의 반대어이다(레12-15장).
히브리 사고방식에서 만물은 정하지 않으면 부정하고, 거룩하지 않으면 속된 것으로 규정한다. 성경은 만물을 거룩한 것과 정한 것, 그리고 부정한 것인 3중 구조로 구별한다. 이러한 만물의 3중 구조는 노아 방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방주의 3층 구조는 인류(인간)의 성화 과정을 예표 한다.
성경에서 정한 것들은 거룩하게 만들 때 거룩해진다. 그러나 부정한 것은 거룩하게 만들 수 없다. 부정한 것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정)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한 것은 더럽혀질 때 부정해질 수 있다.
방주의 하층부와 레위기의 부정함
창세기는 방주에 들어간 부정한 짐승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레위기를 통해 하층부에 들어갔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든다. 방주의 하층부는 만물의 부정과 연관되며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상징한다.
레위기에서 부정은 정결의 반대로 정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하다. 부정은 정결과 달리 전염성을 가지고 있고,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부정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정화의식이 요구된다. 부정은 인간이 신체적 작용과 죄를 통해 내려가는 표준 이하의 상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지 못한 불신(부정한)의 상태를 의미한다.
방주의 중층부와 레위기의 정결함
정결한 짐승은 노아의 방주 중층에 들어갔으며, 이것은 죄악 된 상태와 거룩한 상태의 중간 과정을 의미한다.
레위기에서 정함(깨끗함)이란 거룩함과 부정함 사이의 중간상태를 말하는데, 정결(Cleanness)은 순결(purity)을 의미하지만 레위기에서는 '정상'이란 개념으로 사용된다.
정함은 사물과 사람 대부분의 정상적인 상태 즉 아담의 타락 전 상태를 말한다. 성화(聖火)는 정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오염(더럽힘)은 정한 것과 거룩한 것이 접촉해서는 안 될 상태이다.
정결함은 인간과 만물의 근본 된 상태이며, 아담 타락 전 정상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노아의 방주 중층은 정화의 과정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상태로 가기 위한 중간과정을 상징한다.
방주의 상층부와 거룩함
레위기의 표어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11:44-45, 19:2, 20:26)이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의 독특한 특성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이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한 사람은 거룩하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들은 유달리 거룩하게 구별됐다(출29:1, 39:30). 신약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거룩한 성도'들로 나타내고,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씀한다(고전1:2, 벧전2:5, 계20:6).
거룩함은 율법(하나님의 말씀)의 순종과 제사(예배) 등을 통해 달성된다. 거룩한 상태를 거룩한 삶으로 표출된다(골1:22, 벧전1:15).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성도)들의 삶의 최종 목표를 말씀한 것이다.
방주 상층부에 있던 노아의 가족은 속된 것(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서 벗어나 거룩한 상태(그리스도의 형상)에 있는 인류,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의 상태에 있는 천국 백성을 의미한다. 3층으로 된 노아방주는 타락한 인류 구속의 과정을 예표 한 것이다.
13. 예수가 걸은 삼일은 구원 완성의 길
예수 그리스도 33년의 생애, 그중 공생애 3년 사역 가운데 가장 절정을 이룬 시기는 고난 주간이다. 그 가운데서도 최절정의 순간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사역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은 '제 삼일'(오늘, 내일, 모레)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16:21, 20:19, 막9:31, 눅24:46, 요2:20).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눅13:32-33).
예수의 '삼일'
성경학자들은 '제 삼일'과 '완전하여지리라'라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 삼일 에 부활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을 위한 그의 모든 공적 사역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예언한 '삼일'은 예수가 걸으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을 가리킨다. 이유는 누가복음13장에서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는 말씀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가 말씀한 '삼일'은 단순히 시간적 개념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때와 다르다는 점이다. 단순히 시간적이라면 말씀하셨던 때가 고난 주간 수요일이 돼야 했지만, 말씀은 헤롯이 관할하던 갈릴리에서 하셨기 때문에 고난 주간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씀한 '삼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예수의 '제 삼일'은 언제 완전히 이루어졌을까.
'삼일'은 구속 과정을 예표
예수는 삼일 가운데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타락의 회복 과정을 의미한다. '제 삼일'(모레)은 타락의 회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구속사적 과정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말씀한 '삼일'의 과정은 아담의 범죄로 시작된 타락을 회복하고 인류 구원의 완성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예수는 구속 사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을 '삼일'로 표현하셨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만이 '삼일'의 과정을 걸은 것은 아니다. 구약의 위인들과 선지자들도 '삼일'의 과정을 성취했으며, 삼일을 통해 예수가 완성하신 구속을 부분적으로 조명했다.
구약에서 '삼일'의 모형들
예수의 모형인 이삭도 삼일의 기간을 통과했다(창22:4). 아브라함과 이삭이 걸은 3일간의 길은 고민과 갈등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독자 이삭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의 예표가 됐다.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집을 완전히 나오기까지 3일간의 길을 걸어야했다(창31:22).
삼일이란 기간을 벗어남으로 우상 숭배하던 라반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모세도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광야 삼일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요구했다(출3:18, 5:3).모세가 요구한 삼일 길은 애굽 왕 바로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기간이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 성에 전도하기 위해 삼일 길을 걸었고, 삼일 길을 걸은 결과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요나의 삼일 길은 온전한 구원을 위한 과정이었다(욘3:3-10, 눅11:29-32).또한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있었던 것은 예수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 한다(마12:40).
한편 '삼일'은 정결케 하는 시기이며, 회복의 과정(단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3일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야 했다(출19장). 이삼일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신앙적 노정을 예표하고 있다.
눅13:32에서 예수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의 삼일은 단순히 시간적인 삼일이 아닌 인류의 구속을 완전히 이룬 '구속의 노정'을 의미한 것이다.
14. 모리아 산을 향한 아브라함의 삼일 길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이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수많은 일들을 겪었다. 먼저 블레셋 땅의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관계에서 부인을 또다시 누이라고 속이는가 하면(창20장), 오매불망 25년이나 기다리던 '약속의 아들이삭'을 얻기도 한다(창21:1-7). 그리고 유일한 상속자 이삭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첫 아들인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기도 했다(창21:8-21). 그런데 이보다 더 큰일은 100세에 낳았던 장성한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되는 일이었다.
일곱과 브엘세바의 언약
소돔 멸망 후 아브라함은 생활터전을 북방 헤브론의 마므레에서 남방 브엘세바(그랄 땅)로 옮겼다(창20장).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정착한 지 십여 년 만에 우물의 소유권을 놓고 아비멜렉의 종들과 분쟁이 발생하게 됐다(창21:14-34).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를 주고 우물의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이 계약의 증거를 삼기 위해 일곱 마리의 암양 새끼를 따로 떼어 선물하였다. 우물이 있는 지역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일곱의 우물', '맹세의 우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일곱의 암양 새끼로 아비멜렉과 언약을 삼은 것은 통상 '일곱(맹세) 의식'이라 불린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7이란 숫자는 더하거나 감할 수 없는 완전수이며 신성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외에 고대 히브리인들은 숫자에 대해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아브라함이 브엘세바 주변에 에셀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은 언약의 지속성과 불변성을 확인하는 제스처로 볼 수 있다. 이 나무를 '거룩한 나무'라 하여 성소나 분묘, 회의소 같은데 심기도 했다. 일각에선 에셀을 떨기나무로 보기도 한다.
한편 아비멜렉이란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 모두 등장하는데 동일인물은 아니다(창20-21장, 26장).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애굽의 바로, 몽골의 칸, 중국의 황제, 러시아의 짜르처럼 왕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보여 진다.
모리아 산의 희생제사
우물사건 직후 아브라함은 인생과 신앙에 있어 최대의 시험시기를 맞이한다(창22장). 이 당시 아브라함 나이는 12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신학자들은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2천년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요19:17-18)과 구속사 적으로 직결되는 예표 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모리아로 오르는 아브라함의 길은 골고다로 오르는 예수의 고난의 길과 비교된다.
또한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되는 아버지(아브라함과 성부 하나님)의 고뇌, 뗄감을 지고 모리아의 한 산으로 올라가는 이삭의 모습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예수의 모습 등은 비슷한 구조다.
특히 번제용 장작을 메고 갈 정도로 장성한 이삭이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선택해 죽이려고 하는데도 피하지 않고 순종한 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희생(죽음)을 받아들인 예수의 순종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모리아는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대를 총칭하는 곳으로 '마르에'와 '예호와'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이란 뜻이다. 모리아의 이름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을 지정하고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일간의 여정은 준비의 기간
모리아 지역은 당시 아브라함이 기거하던 브엘세바에서 대략 80km 떨어진 지역으로 3일 길을 걸어야 되는 거리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삼일간의 여정은 고뇌의 길이며 헌신과 순종의 길이자 지성소를 향한 속죄의 길이다.
특히 지시 받은 날로부터 '삼일'이란 기간(창22:1-4)은 상징적으로 유월절 양을 잡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과 일치한다(출12:1-6)는 점에서 신학자들은 '준비의 기간'으로 본다.
성경에서 삼일이란 기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기간과 노정이며, 정결(성결)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출19:10-11).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야곱, 모세, 요나 등도 삼일이란 준비의 기간을 거쳤다(창31:22, 출3:18, 욘3:2-3). 이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삼일이란 기간이 준비, 구원, 회복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원한 유월절 어린양으로 준비된 예수 그리스도도 인류의 구속을 위해 삼일 길을 걸으셨다(눅13:31-33).
즉 예수의 삼일 길은 구속사역의 성취를 위한 여정으로 아담의 범죄로 시작된 타락을 회복하고 인류 구원의 완성을 상징한다. 이처럼 성경에서 삼일이란 기간은 브엘세바의 일곱이란 숫자처럼 비유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15. 모세는 왜 바로에게 삼일만을 요구했나?
하나님께서 내린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비로소 430년 만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길고도 긴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 바로 왕과 단판을 지었던 모세는 처음부터 노예생활의 청산이나 해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순히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대체로 모세가 바로에게 제사를 위한 3일간의 시간을 요청한 것은 애굽을 나온 뒤 가나안으로 도망갈 때 애굽 군대의 추적과 속박으로부터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거리와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삼일 길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시내 산까지 보통사람의 걸음으로 소요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오히려 영적으로 애굽의 우상숭배와 완전히 단절되고 구별되는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일은 영적인 구원의 기간 상징
'삼일'이란 시간적 표현은 구약성경에 여러 번 나타나는데, 숫자3은 성경적 상징으로 하늘의 수로서 완전수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3이란 숫자를 통해 표현하며, 사도 바울은 하늘이 세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고 증거하고, 3층으로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완성이 세 단계로 이루어질 것을 상징한다.
신구약성경에서 삼일이란 기간과 연관된 사건들을 찾아보면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삼일 간 길을 걸어갔는데, 삼일이란 시간은 100세에 얻은 독자를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갈등과 고민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삼일간의 여정을 완전히 걸었으며 독자 이삭을 죽이려 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았다. 또한 이 사건은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표가 되었다(창22:4, 창22:12).
야곱도 삼일이란 여정을 통해 우상숭배의 땅, 세속의 땅인 외삼촌 라반의 집을 완전히 나올 수 있었다. 하나님은 라반으로 하여금 야곱이 떠난 것을 삼일 후에 알게 하였는데, 이것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나오기 위해 삼일간의 길을 걸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야곱을 잡기 위해 7일 동안 뒤쫓아 온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다(창31:21-24).
삼일은 신앙적 회복의 노정 상징
구약 말기의 선지자 요나에게도 삼일의 역사가 일어났다. 니느웨 성 전도를 회피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간을 보낸 요나는 삼일이란 기간 동안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니느웨 성 전도에 나섰다. 요나의 심판에 대한 선포는 니느웨 성 사람들을 악한 킬에서 돌이켜 회개케 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했다(욘1:17-2:2, 3:3-10).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삼일은 니느웨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또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낸 사흘은 예수께서 무덤(스올)에 삼일 간 계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표 한 사건이기도 하다(마12:40).
한편 예수도 삼일(오늘, 내일, 모레)의 역사를 통해 영적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셨다(눅13:32-33).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해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고 실제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마16:21).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2:19).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한 삼일 길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길을 예표 한다.
이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출애굽기19:10-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삼일 동안 성결케 하는 준비를 하였다.
즉 삼일이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거쳐야 했던 신앙적 기간과 노정을 나타낸다. 또한 삼일이란 기간은 삼단계의 신앙적 과정(불신자 단계, 성화 단계, 영화 단계, 혹은 애굽-광야-약속의 땅, 부정한 것-정한 것-거룩한 것)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16. 한자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한민족이 지켜온 제사의 대상은 조상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우리민족은 이 삼위일체의 신앙을 고대로부터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민족이었다. 신지의 '삼일신고'에 이 내용이 기록돼 있다.
셋이 하나 되는 신비
'하나는 몸이고 셋은 쓰임이며 세신은 하나이고 셋이 모이면 하나가 된다.'(體一用三 三神一體 會三歸一). 이 말은 단군시대의 사관이었던 신지(臣智)가 쓴 '삼일신고'(三一神誥)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 전문이 다 보전되어 있지 못하지만 이 내용으로 봐서 한민족의 삼위일체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모습은 한자에서도 볼 수 있다. '창세기의 재발견'이라는 책을 썼던 두 명의 학자(C. H. Kang, Ethel R. Nelson)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일 시'(示)자로 기록했다고 말한다. 곧
'하늘에 계신(一) 한 하나님이(一) 이 세 가지 모습(小)으로 오셨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가지 모습으로 보이시며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냈다는 얘기다. 이 역시 우리민족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홍익인간에 나타난 구원
사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단어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성경전체에 기록돼 있다(창1:26, 요14:16-26, 행2:32-33, 고전12:4-6, 고후13:14, 벧전1:2). 삼위일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심'을 뜻한다. 곧 '창조주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피조물 세계로 들어오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빌2:6-8, 요17: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는 삼국유사 고조선에 기록된 홍익인간의 내용과 유사하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 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결국 '삼위일체'라는 말은 구원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고, 성령의 사역까지도 보이시기 때문이다. 이 구원사역이 단군신화에 나타난 홍익인간의 내용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자 속에 감추어진 제사
아라랏 산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렀던 동방 족은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도했다는 것을 우리는 한자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한자는 동방으로 이동해 온 백성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였다고 많은 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보일 시'(示)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글자에 붙어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먼저 '기도'(祈禱)라는 말은 도끼(斤)가 목에 닿아 있는 위기 속에서 목숨을 건 탄원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형(兄)인 장자가 하나님께 아우들의 복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끝으로 제사(祭祀)라는 단어 역시도 '사람이 평강(巳)의 하나님(示)과 만난다(祭)' 또는 하나님께 감사 한다'(동아새漢韓사전)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제사는 공자를 시조로 하고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에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중용'에서 공자는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 의식들을 통해 사람이 샹띠를 섬기느니라.'고 말한다(James Legge).
여기서 '샹띠'(上帝)는 '하늘(上)의 황제(帝)'라는 뜻의 중국어로 하늘의 통치자, 곧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중국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중국인들은 이 샹띠를 경배했고, 성스러운 고대 제사를 드려왔던 것이다
('고대한자 속에 감추어진 창세기 이야기'; E. R. Nelson, R. E. Broadberry).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이후 공자사상과 도교가 등장하고, 기원전 1세기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고대로부터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샹띠에 대한 신앙은 점차적으로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가기
우리 한민족 역시 유교가 들어오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제사가 조상의 제사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유교적인 제사는 원래 기독교의 '제사' 곧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 개념이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하나님 신앙은 고대 중국에서처럼 불교와 유교, 도교로 인해 점점 희미해져가고 조상과 천지만물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석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3)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했던 민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17. 삼족토기에 나타난 신앙의 자취
'세발이 달린 토기'라는 뜻은 이름인 '삼족토기'(三足土器)가 한반도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고대로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있었다는 삼족토기는 산동 반도와 요동반도를 중심한 지금의 중국지역과 소아시아, 이집트에까지 분포돼 있다. 주로 제사용으로 사용됐다는 이 삼족토기의 근원은 바로 태양 새 또는 삼족오로 불리는 까마귀와도 연결돼 있다고 한다.
한반도의 삼족토기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전 지역에서 발견된 토기들의 공통점은 세 개의 발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삼족토기'(三足土器: Tripod pottery) 또는 '세발토기'라는 고대 토기들이다.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에서 출토된 높이 8.6cm의 삼족토기와 높이 10.2cm의 삼족 배(三足杯)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 1990년에는 총면적 58,000평의 신봉동 백제고분군에서도 많은 삼족토기들을 발굴했다. 뿐만 아니라 높이 22.4cm의 짧은 다리가 셋 달린 고구려시대의 토기 항아리인 삼족 호(三足壺)가 있어 고구려시대에도 삼족토기가 유행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삼족 호는 백제와 신라, 가야 지방에서도 출토됐다.
토기뿐만 아니라 산이나 야외에서 찻물을 끓일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으로 만든 '삼족 초두'라는 것도 있다. 모양과 크기는 다양한 삼족토기들은 그 특이한 모습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상생활용이 아닌, 의례용(儀禮用)이나 제사용(祭禮用) 토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의기'(儀器) 또는 '예기'(禮器)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삼족토기의 흔적들
이러한 삼족토기들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과 서아시아, 수메르를 중심한 이집트 지역에도 분포한다.
이들 지역에서 출토되는 삼족토기는 대부분 그 시대가 선사(先史) 또는 원사(原史)시대의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앙소문화기(仰韶文化期)를 거쳐 용산문화기(龍山文化期)에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만들어졌으며, 은(殷)·주(周) 때까지도 잘 활용됐다고 한다. 특히 예기(禮器)로서 발이 셋 달리고 귀가 둘 달린 솥의 하나인 '정'(鼎)은 한대(漢代)까지 널리 사용됐다.
특이한 점은 중국의 삼족토기 중 새 또는 까마귀의 모양을 한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토기들은 '세 발(三足)을 가진 새(鳥) 모양의 토기'들이다. 이러한 토기들은 새 토템이 많은 산동 반도와 요동반도 등을 중심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한반도에는 비슷한 경향의 삼족토기가 있다. 신라 6세기에 향불을 담아 올리는 그릇으로 사용된 경주 천마총의 청동 솥(天馬塚 靑銅鼎)에도 새의 다리를 본 딴 세 개의 다리가 달려 있다. 기원전 2-3세기의 것으로 알려진 부뤼셀 룩소르의 그리스 삼족 나무 탁자에도 백조의 머리로 끝이 마무리돼 있는 세 개의 다리를 가진 탁자가 있다.
삼족토기와 삼족 오
그렇다면 새와 삼족토기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말한 산동 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황하유역에는 관직의 이름들도 새 이름으로 표시할 정도로 새 토템이 많다. 예를 들어 은(殷)의 시조였던 탕(湯)의 본래 이름은 '하늘의 새'를 뜻하는 '천을'(天乙)이다. 또 앙 소 문화에 속하는 소호(小昊)족은 모든 부락의 이름과 관직명이 모두 새의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회남자』(淮南子)에는 '검은 새'를 현조(玄鳥)라고 칭하면서 '천사'(天使)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
정리하면 삼족토기는 '하늘의 새'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족 오(三足烏)가 대표적인 예다. 삼족오, 즉 세발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 길조(吉鳥)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
전통문화의 구성 원리』의 저자인 우실 하 씨나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의 저자인 주강현 시는 '삼족오가 만주와 한반도로 도래하기이전부터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태양과 제사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우리는 삼족토기가 '하늘의 새' 또는 '태양 새'인 삼족오와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집트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와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분포돼 있는 삼족토기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전달자인 태양 새와 연결된다. 곧 하늘을 섬기는 고대 민족의 뿌리가 삼족토기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출토된 삼족토기 등이 대부분 제사용으로 사용된 예기(禮器)였다는 공통점에서도 하늘을 섬기는 고대 민족의 자취였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어떤 이는 한반도의 삼족토기가 고대로부터 내려온 삼신(三神)사상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삼족토기는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했던 동이민족이 한반도까지 이르는 이동경로와 그 신앙의 흔적을 간직한 것이 아닐까
에덴동산의 한 강과 예수의 관계
성경은 하나와 넷을 통해 생명과 죽음, 안과 밖의 역사, 구약과 신약을 말하고 있다. 에덴에서 발원한 한 강이 넷으로 갈라져 흐르는 것을 통해 성경은 타락 전과 타락 후의 모습을 말씀한다. 곧 하나가 넷이 되는 모습을 통해서 에덴동산 안과 에덴동산 밖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구분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의 전혀 다른 구원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에덴의 한 강과 네 근원
강은 영어로 'River'라 한다. 이 말은 물을 막기 위해 쌓아 놓은 흙더미라는 뜻의 라틴말 리파리우스(Riparius)에서 온 말이다. 이 '리버'는 '죽살이의 갈림길', 곧 죽고 사는 것의 분기점이란 말로 삶의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역사의 뿌리 깊은 의미를 드러낸다. 이처럼 강은 생명인 동시에 죽고 사는 갈림길의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한 강, 곧 한 샘 근원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창세기2장10절에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개역한글판)가 보여주고 있다. 본 절의 내용은 에덴동산에 흐르는 강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원어에 충실했다는 표준 새 번역 성경을 보면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강, 하나(a river : KJB)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곧 에덴동산 안에서 발원한 한 강이 에덴동산 밖에서 넷으로 갈라져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동산 안에서는 한 강이고, 에덴동산 밖에서는 '넷'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안의 생명과 밖의 사망
먼저 에덴동산에서 한 강이 발원했다는 것은 비가 왔다는 것이요, 이로 인해 샘 근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샘 근원, 곧 생수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기록하고 있다(렘2:13). 그리고 이 샘 근원을 발견한 사람의 심령을 '물댄 동산' 또는 '동산의 샘' 이라고 얘기한다(렘31:2, 아4:15). 이물댄 동산은 '근심이 없고 늘 찬양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곳'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생명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소유한 마음'을 지키라는 뜻이다(창2:15). 잠언서의 저자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하신 것도 창세기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기록한 말씀이다(잠4:23).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성도가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라고 표현되는 것도 지켜야만 하는 샘 근원을 강조하는 말이었다(아4:12).
그러나 이 샘 근원은 지켜지지 못하고 결국 사단, 마귀의 하수인인 뱀의 침입과 유혹으로 인해 타락과 사망을 가져오게 됐다. 결국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돼 에덴 밖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을 갈아야만 했던 것이다(창3:23-24). 에덴 안의 생명이 에덴 밖에서는 죽음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 여인과 네 여인
이렇게 에덴 안은 타락 이전 세계로, 에덴 밖은 타락 이후 세계로 정리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에덴동산 밖의 타락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다. 타락으로 인해 그룹과 화염검으로 막혔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길을 열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창3:24).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오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족보를 통해서 앞에서 언급한 에덴의 '하나'와 '넷'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유일하게 다섯 여인이 등장한다. 시아버지와 관계한 다말,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저주받은 모압 여인 룻, 다윗이 취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바로 그 네 여인이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한 한 여인 동정녀 마리아다.
이 네 여인과 한 여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앞의 네 여인은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를 보여주는 구약의 역사다. 그리고 한 여인은 생명이신 예수께서 오신 신약의 역사다. 다시 말해 네 여인은 생명나무 길이 막혔던 에덴동산 밖의 역사로 타락한 세상역사를 보여준다. 반면에 마지막 한 여인인 마리아는 예수로 인해 타락으로부터 회복한, 곧 생명나무의 길이 열린 에덴동산 안의 역사인 것이다.
예수는 타락한 네 강의 역사 속에 뛰어들어 한 강, 곧 생명의 역사를 회복하러 오신 분이다. 이 예수가 오셔서 '물주는 운동을 펼치신 것'은 바로 에덴동산의 생명수의 근원 되는 한 강, 곧 하나님 말씀을 주러 왔다는 의미다(요4:14).
예수의 속옷과 겉옷
이러한 타락 회복의 역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을 때에도 보인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겉옷을 취해 네 조각으로 나누어 네 사람이 가져가고, 통으로 짠 속옷은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가져간다(마27:35, 눅23:34, 요19:23-24). 이것은 세상의 겉 진리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갈라지고 찢길 수밖에 없는 타락한 네 강이나, 하나님의 속 진리인 생명은 온전한 하나, 곧 한 강이라는 의미다.
동시에 십자가의 구원의 말씀이 타락한 인류의 불신으로 인해 사방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서려있기도 하다.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을 믿는 기독교가 사방으로 찢기워져 있는 바로 타락한 네 강의 역사다. 불신과 불순종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열어놓은 에덴동산 안의 생명나무 길을 회복해야한다. 이 회복은 밖에서부터 안으로의 회복되는 것이며, 넷으로 갈라진 역사를 하나의 역사로 기록하는 일이다. 끝으로 각자 마른땅이었던 내 안에서 생명수의 강이 넘쳐나는 샘 근원, 한 강으로 소유하는 역사일 것이다(요7:37-38).
18. 삼일 만에 다시 산다는 부활신앙의 뿌리
저승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기간이 삼일 걸린 하여, 사람이 죽으면 삼일장(三日葬)을 지내는 것이 한민족의 일반적인 장례풍습이다. 이 삼일장과 더불어 장례 후 사십구일 만에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정토에 가도록 기도하는 사십구재 또한 한민족에게 잘 알려진 장례의식이다. 흥미 있는 점은 이 두 가지 장례풍습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장례와 삼일장
한민족은 사람이 죽으면 '초상'(初喪)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한 번뿐이라는 인식 때문에 '처음'이라는 뜻의 '초'(初)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픈 심정을 질서 있게 표현하는 이별의 예를 보통 '상례'(喪禮)라고 한다. 이 상례는 시신을 깨끗하게 씻은 뒤 수의(壽衣)를 입히고 염포(殮布) 또는 베로 묶는 '염슴'(殮襲)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상여가 집에서 떠나는 '발인'(發靷) 등을 포함해 시신을 매장하거나 그 죽음을 애도하고 근신하면서 옷을 입는 방법에 이르는 의식절차를 정한 예다.
여기서 염습에서 발인까지의 장례(葬禮)기간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이 붙는다.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 등이 단적인 예다. 이 중에서 한민족은 대개 삼일장을 치른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사망한 날로부터 삼일 째 되는 날 장례를 지내는 것이다.
되돌아오는 부활의 기간
왜 삼일장을 치르는 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문헌이 없다.
단지 삼일이라는 기간이 저승에 갔다고 되돌아오는 '부활'(復活)의 기간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말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 부활사상은 '혼을 부른다.'
는 '초혼'(招魂) 또는 '다시 돌아오라고 부르는 소리'라는 뜻은 '고복'(皐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초혼은 남자의 초상에는 남자가, 여자의 초상에는 여자가 죽은 사람의 상의를 가지고 동쪽 지붕으로 올라가 왼손으로는 옷은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서 북쪽을 향해 옷을 휘두르며 먼저 죽은 사람의 주소와 이름을 부른 다음에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는 뜻의 '복'(復)이라는 말을 세 번 부르는 것이다(참조: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민중서림). 이것은 북쪽 하늘로 가고 있다는 죽은 사람의 혼이 다시 돌아오도록 부르는 일이다.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 때야 비로소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곡(哭)을 한다.
장례와 숫자 3의 관계
삼일장과 다시 돌아오라는 뜻은 '복'(復)을 세 번 외치는 등 한민족의 장례식에는 숫자 3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단적인 예로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다는 저승사자를 대접함으로써 편하게 모셔달라는 뜻에서 뜰아래나 대문 밖에 차리는 '사자 밥'이 있다. 이 밥상에는 세 그릇의 밥, 석 잔의 술, 세 마리의 명태, 세 켤레의 짚신 등을 놓는다.
더불어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1'의 저자인 주강현 씨에 의하면 제사와 관련 삼배(三拜), 삼색실과(三色實果), 삼탕(三湯) 등에서도 강화된 3이라는 숫자 개념이 나타난다. 이밖에 고려 12세기의 '청자삼발향로'와 같이 제사에 사용하기 위한 세 발 가진 제기들도 다양하다.
정리하면 한민족의 장례와 제사는 숫자3과 연관된 요소들이 많다. 특히 장례의 3이라는 수는 부활신앙을 가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사십구재와 영생의 삶
부활을 의미하는 삼일장과 더불어 한민족에게는 장례일로부터 사십구일 째 되는 날 치르는 제사가 있다. 그것은 사십구재로 불교식 장례 의례 규범인 '석문의범'(釋門儀範)에는 '화장(火葬)을 한 뒤 유골을 쇄골(碎骨:뼈를 부숨)한 다음 절(寺)에 봉안(奉安)한 뒤 치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주로 불교의 정토종(淨土宗)에서 진행된 사십구재는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정토(極樂淨土)에 가도록 하기 위한 제사다. 하지만 이 사십구재는 기독교의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과 유사하기 때문에 불교가 기독교의 제식(祭式)을 모방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기독교문사)의 저자 이장식 씨에 의하면 "사십구재는 사람의 사후 삶에 대한 교훈에 있어 기독교의 영생의 삶에 영향 받은 것으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예배가 불교에 영향을 주어 죽은 이를 위한 '사자법회'(死者法會)를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부활과 첫 열매의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한민족의 장례식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기독교의 절기와 유사점이 발견된다. 먼저 '부활신앙'이다. 저승에 갔다가 되돌아오는 기간이 삼일이 걸린다고 해서 유래됐다는 삼일장과 죽은 이의 옷을 붙잡고 '돌아오라'는 뜻의 '복'(復)을 세 번 외치는 '초혼'이나 '고복'에서 부활신앙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마27:67, 8:1-10, 막8:31, 행10:40).
다음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한 사십구재라는 제사다. 이것은 '무교절 후 일곱 안식일 곧 사십구 일이 지나 50일 째 드리는 칠칠절 또는 오순절'과 유사하다. '맥추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절기는 '수활한 것 중 새 열매인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다(레23:15-16, 신16:9-12).
궁극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를 가리키는 절기라고 할 수 있다(고전15:20, 23). 그렇다면 한민족에게 퍼져있는 삼일절과 사십구재에 담겨진 부활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뿌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 망명자 모세의 미디안에서 40년
애굽의 왕자로 성장한 모세. 그는 노예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애굽의 최고 학문과 기술(군사, 건축 등), 종교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행7:22). 또한 유아기에는 어머니 요게벳을 통해 여호와에 대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모세는 장성하는 동안 수많은 고뇌와 갈등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바로공주 핫셉수트의 양아들이지만, 애굽 인들에게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모세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갈급함이 강했을 것이다. 그의 지위가 높아지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 할수록 자신의 민족 미래에 대한 고민은 나날로 커졌을 것이다. 더욱이 모세는 장년이 되면서 언젠가는 자신이 히브리 민족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해 줄 지도자라고 자각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출2:11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 함을 보더니...'와 행7:23-25절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적 의지로 실패한 해방운동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의해 죽음의 강에서 살아난 모세는 탁월한 학술과 지혜, 언변과 지도력을 갖춘 존재로 장성했다. 그가 40세가 되던 때에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애굽의 왕자로 장성했던 그가 히브리 노예를 감독하는 감독관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동족들은 오히려 애굽 인에게 모세의 살인을 밀고하였다.
모세는 나름대로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도전했지만, 그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다. 핫셉수트의 섭정(攝政:임금을 대신하여 통치함)으로 통치 권력이 약한 투투모세 3세는 자신의 정적인 모세를 제거하는데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모세 입장에서는 애굽에서의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권력적 배경에서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도모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살인행위를 '믿음'에 의한 것을 해석하고 있다(히11:24-26).
모세가 고귀한 왕자의 신분을 마다하고 학대받는 형제들을 위해 솔선해 나선 것은 믿음의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세 입장에서는 좌절과 비탄 속에서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한 '훈련의 기간'을 주셨던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과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훈련과 준비의 기간 40년
지금의 시나이 반도인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또는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고 그곳에서 40년간 칩거하였다. 지금처럼 민족 해방을 위한 게릴라전이나 테러, 투쟁 조직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망명자 모세는 40년간을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양치는 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어떻게 보면 방치되었던 40년의 세월은 모세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애굽 왕자로서의 자만심을 버리게 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광야생활에 적응하는 훈련의 기간이었다.
즉, 40년은 모세가 인간적 의지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따를 수 있도록 훈련하는 '준비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모든 신앙적 훈련과 준비를 마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호렙 산(시내 산)에서 불붙은 떨기나무 사건은 모세에게 있어 소명을 바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40세에 애굽으로 도망쳐 나온 모세. 그 후 40년 만(80세)에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킨 그의 인생여정에서 40이란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40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는 숫자 중의 하나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40이라는 숫자는 일반적으로 한 세대의 대략적인 기간을 의미하는데 사용되고, 인간의 생존 내지는 존속 면에서 긴 기간임을 나타낼 때 쓰였다. 또한 40일이나 40년은 중대한 사태가 계속되는 기간으로 시험과 준비, 회개, 징벌의 기간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구속에 있어서 중요한 새로운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
노아의 대홍수 때 비가 40일간 내렸고(창7:4), 다윗과 솔로몬은 각각 40년간 통치했고(삼하5:4, 왕상11:41), 요나는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40일이 지나면 심판이 내릴 것이라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욘3:4). 예수도 40일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셨으며(막1:13), 부활 후 40일간 지상에 머무르셨다(행1:3).
특히 출애굽과 연관시켜서 볼 때 모세가 40세에 형제들을 돌아보고자 했고, 그 후 40년간 미디안에 숨어살다가 80세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행7:30).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시내 산에 있었고(출24:16),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간 정탐했고(민13:25), 이스라엘 불신으로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다(민14:33).
모세에게 있어 미디안 광야 40년의 기간은 인간적 시각에서는 허송세월을 보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신앙적 입장에서는 애굽의 자만한 왕자에서 하나님이 쓰고자 하는 겸손한 종으로 탈바꿈시킨 '훈련의 기간', '준비의 기간' 이었다.
20. 오순절과 50일간의 숨은 비밀
유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로 하나님께서 꼭 지키라고 명령하셨다(신16:16, 대하8:13). 그런데 유대인에게 있어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월절'(무교절)과 열매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맥추절' 사이에는 신비로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월절부터 맥추절까지 정확히 50일,
맥추절의 또 다른 이름
맥추절은 '칠칠절', '오순절', '성회'(聖會),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 등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맥추절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사용됐다(출23:16). 칠칠절은 유월절부터 추수된 첫 열매(보리)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특별한 축제로써(수5:11), 보리 수확을 시작하면서부터 곡식추수가 끝나는 기간이 대략 7주간(7x7)이기 때문이다. 또 오순절은 유월절 축제이후 50번째 날에 처음 익은 열매의 봉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축제는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로 안식일처럼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레23:21),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20세 이상의 성인)들은 성전에 모였다(신16:16).
출애굽 후 율법수여까지 50일
'장자의 죽음이 지나가다'는 뜻을 지닌 유월절과 첫 열매의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맥추절(오순절)까지는 50일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유월절 이후) 하여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날까지가 정확히 50일이 된다.
즉 유월절의 시작인 정월14일 저녁부터(레23:5, 민9:5) 50일째 되는 삼월 삼일 시내 산에서 여호와의 강림과 율법수여가 있었다(출19:1, 11, 16, 출20장 이후).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인들은 '칠칠절'과 시내 산의 율법수여의 날이 결합하게 되었고, 이후 오순절은 시내 산에서의 율법수여를 기념하는 날로 지켜졌다.
주의 강림과 맥추절, 성령 강림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은 날과 소산의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절은 동일한 날이다. 이 두 사건은 유월절에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에 거행됐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게 피 흘리신 날은 유월절이고, 약속한 성령강림이 교회에 일어난 것은 오순절(50일째 되는 날)이었다.
현재 교회에서 성령강림주일과 맥추감사주일은 다른 날짜에 드려지고 있지만 원래 성령강림과 맥추절(오순절)은 같은 날짜이다. 또한 오순절은 언제나 '일곱 번째의 안식일 이후'(레23:16)인 일요일에 거행됐다.
위의 세 가지 사건은 모두 유월절에서 시작된다. 유월절(무교절)의 속죄제이며,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적 상징이다(고전5:7, 벧전1:19, 행8:32).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 장자들의 죽음을 '지나가게' 했고, 무교병을 먹음으로 이스라엘 진중에 죄의 부패(누룩)를 제거했다. 예수는 유월절에 십자가상에서 피를 뿌리심으로 온 인류의 누룩을 제거하시고, 영원한 죽음을 지나가게 하셨다.
50일의 숨은 비밀
오순절은 율법 수여의 날과 첫 열매를 드리는 날, 교회의 시작(교회의 첫 열매)이 일어난 일이다. 이날의 공통적 특징은 50일간의 간격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50일이란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구원'과 관련을 맺으며, 죄의 참회와 용서에 대한 우의적인 표현이다. 50은 해방과 구원의 상징인 '희년'을 연상하게 한다. 희년에는 부리던 종을 놓아주고 땅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다. 즉 하나님은 유월절에 죄와 사망(애굽, 사단)의 억압으로부터 선민을 해방·구원하셨고, 시내 산·오순절·성령강림 사건에서는 선민을 구원의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거행된 날이기도 하다. 시내 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에게 말씀(율법)을 선포하셨지만,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성령 충만으로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방언으로 말씀을 선포했고(행2:1-), 성령을 통한 말씀 사역으로 성도의 첫 열매를 추수했다.
21. 첫 열매를 드리는 '주의 날'을 상징한 오순절
이스라엘의 절기들은 단지 축제나 기념일의 개념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절기들은 메시아와 그로 인한 구원역사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절기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무교절이 지난 후 50일째인 오순절은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7주를 계산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로 맥추절 또는 칠칠절, 초실 절이라고 한다. 곧 첫 곡식을 거두는 절기로 구약의 맥추절은 신약의 오순절이다. 모든 날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첫 열매를 드리는 '주의 날'로써의 오순절을 꼼꼼히 살펴본다.
오십 번째 날의 절기
신약성경 사도행전2:1절에 처음 등장하는 '오순절'(五旬節: Feast of Pentecost)이라는 이름에서 순(旬)은 숫자 '10'을 의미한다. 곧 숫자적인 의미로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절기를 가리킨다. 헬라어로는 50을 의미하는 '펜테콘타'에서 유래한 '펜테코스테'로 50번째를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오순절이라는 명칭 대신에 다양한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먼저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산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칠칠절'(七七節)이라는 이름이다(레23:15-16, 신16:9-12). 결실한 첫 열매나 보리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 맥추절(麥秋節) 또는 초실 절(初實節)이라 부르기도 한다(출23:16, 34:22, 민28:26).
히브리어로 말한다면
'주들(weeks)의 절기'는 '학 샤브오트'이며,
추수의 절기는 '학 학카치르'이다. 그리고
'첫 열매의 날'은 '욤 합빅쿠림'으로 표기할 수 있다.
첫 열매를 드리는 날
정리한다면 오순절은 무교절 후 첫 안식일을 지나서 일곱 안식일 후에 지켜지는 절기다. 다시 말해 49일이 지난 다음날인 50일째에 지켜지는 오순절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축복에 따라 거두어들인 첫 곡식을 드리는 절기이다. 오순절에 해당하는 구약시대의 절기인 맥추절은 출애굽기23:16절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농사를 짓지 못했던 광야에서 하셨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할 것을 전제하고 맥추절을 명령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첫 것을 드리라는 말씀이다. 첫 열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빅쿠림'은 '새 열매를 맺다',
'초태 생이 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바카르'에서 유래된 명사다. 곧 맥추절은 수확한 것 중 새 열매인 첫 소산을 드리는 절기라는 의미다.
첫 것의 주인인 하나님
하나님이 맥추절에 첫 것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유월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출23:19, 34:19). 유월절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서는 첫 것 또는 장자의 죽음이 건너간다는 절기다. 이에 대해 민3:13절에서는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에 와서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는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가리키고 있다. 맥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을 통해 흠 없는 어린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을 제물로 드리는 '번제'와 숫염소 하나를 드리는 '번제'와 숫염소 하나를 드리는 '속죄제', 어린 숫양을 드리는 '화목제', 그리고 첫 이삭의 떡과 두 어린양을 하나님 앞에 흔들어 드리는 '요제'를 드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레23:18-21, 민28:16).
재림과 마지막 추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고전15:20, 23). 첫 열매이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회개운동의 확산이 바로 오순절 성경강림사건으로 시작됐다(행2:1-47).
성령강림사건은 일곱 번의 안식일 후 다음 날로, 안식일 후 다음 날로, 안식일의 참 주인은 예수라는 '주의 날'을 가리키는 날이기도 하다. 사도 요한도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다(계1:10). 이 예수를 믿어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다시
오시는 주님이 추수하겠다는 말씀이다(히9:28).
한 마디로 정리하면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구약의 맥추절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이 성령으로 거듭난 첫 열매들을 거두어들이는 절기라 할 수 있겠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22. 하나님은 왜 6일 동안 창조하셨을까?
창세기1장에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1:31).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며,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6일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까?
과학자들의 견해
지구의 연대는 45억년으로 6일 창조기간은 허구일 뿐 현대 과학자들은 세상이 창조되는데 수 십 억년이 경과되었다고 주장한다. 18세기에 출발한 현대 지질학은 우주와 지구의 연대를 각각 200억년과 45억년으로 주장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지구연대 측정방법으로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방법을 개발하고 있지만, 이 방법 자체에 한계가 있어 많은 오차가 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6일 창조기간이나 6천년의 역사가 허구라고 말한다.
국내외 신학자들의 견해
문자적인 24시간의 날들이나 불특정한 길이의 시간을 가리킴
신학자들이 보는 6일 창조는 두 가지다. 먼저 지구의 연대가 짧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우주가 단지 수 천 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실제 24시간을 단위로 하는 6일 동안(144시간)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존 라잇프트(John Lightfoot, 1602-1675)
창조가 B. C4004년 10월18일부터24일까지의 주간에 이루어졌고 아담은 10월23일 오전9시에 창조된 것으로 창조의 날짜와 시간까지 계산하기도 했다.
서철원 교수의 경우 '천지창조와 지구의 정비는 6일이면 충분하였다'며, '전능자에게는 6일도 오히려 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6일간에 모든 창조를 이루시고 7일에 안식하심으로 창조의 목표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인다.
다음으로 지구의 연대가 길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창세기1장의 날들이 24시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가리킬 수 있으며, 매일 매일 창조의 날 사이에도 많은 시간의 간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글리슨 아쳐(Gleason L. Archer)
제6일의 창조 내용을 열거하면서 1장의 날들은 분명히 문자적인 24시간의 날들이 아니라 불특정한 길이의 기간을 나타나게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두 견해는 약점을 가진다. 먼저 지구의 연대가 짧다는 견해는 지구연대가 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증거들을 무시하고 있으며,
창세기1장에 사용한 날이 하루 24시간 이상의 기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창2:4, 벧후3:8, 시90:4). 또 지구의 연대가 길다는 견해는 그 연대측정 방법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양승훈 박사는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은 원리상으로는 옳은 연대 산출 방법이지만 부정확한 가정 때문에 생기는 오차를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지
창조와 메시아의 오심, 하나님 나라 등 인류 구원의 전 과정을 담은 역사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6일 창조를 과학적으로 푸는 것은 온전하지 못하다.
창세기1장은 과학적인 서술이 아니라 신학적인 서술이다. 우리보다 더 과학적이고 지식의 근본인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수도 있는데 굳이 6일 동안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알리시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있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창조하며 만들던 모든 일을 마치고 제7일에 안식하셨는데 이안식은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다(히4:8-9, 계21:3-4).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6일간의 창조를 끝내시고 하루 동안 안식하신 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때와 기한을 두시고 각 시대별로 구원역사를 일으키려고 하신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때와 기한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행1:7, 단2:21).
그리고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다고 하신다(벧후3:8).곧 하나님께 때와 기한이라는 것은 딱 자를 수 있는 수의 개념이 아니라는 말씀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6일의 창조기간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6천년이라고 계산될 수도 있다.
창세기1장에 기록된 6일의 창조역사는 상징적으로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인류 역사가 가인과 아벨에서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구약의 역사인 4천년이다. 다음으로 믿는 성도들의 번성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참 사람이 되기까지의 2천년의 역사다. 이렇게 창조기간은 하나님의 구원완성의 역사를 6일 또는 6천년이라는 상징적인 기간으로 예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6시간 동안 일곱 말씀을 통해 마지막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신 사건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막15:25-34).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물과 피가 빠지기까지 3-4일가나 사람을 말려 죽이는 처형법이다. 그런데 단지 6시간 만에 예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역사를 성취하셨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창세기의 태초에 이미 구원완성과 심판이라는 종말이 담겨 있다고 말씀한다(사46:10).
따라서 6일간의 창조는 지구상에서 인간의 구원역사가 6천년 동안 계속 될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제7일에 안식하신 것은 6천 년간의 모든 죄악이 끝나면서 창조본연의 세계인 에덴, 곧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기간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리하면 창세기1장의 6일간의 창조기사 속에 하나님께서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나라의 안식까지 인류 구원의 전 과정을 담아 두셨다고 볼 수 있다
23. 일곱으로 맹세하라
7이라는 숫자는 우리에게 행운을 안겨다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활 가운데 7이란 숫자는 자주 사용되고 사람들에게 애용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6일간 세상을 창조하셨고, 제 7일은 안식일로 지켰으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내리는 등 7이란 숫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럼 7이란 숫자는 언제부터 사람들에게 행운의 숫자로 지배하게 됐을까.
7이 왜 행운의 수인가?
샘족 계통의 민족들은 7이란 수를 신성하게 여겼다. 애굽 사람들에게도 점차 4라는 수를 대신하여 7이 신성한 숫자로 간주되었고, 애굽의 마술과 의술에서도 7은 효험 있는 숫자로 간주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7은 신성한 수로 간주되어 종교의식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대 사람들은 7의 배수인 14, 21, 42, 70, 77 등도 중요한 숫자로 간주하였다. 구약 성경에서도 7이란 숫자는 여러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7의 어원
구약에서 숫자 '칠'은 히브리어 '쉐바'로, 여기에서 '쉬브임'(칠십)과 '샤부아'(일주일) 등의 단어가 파생됐다.
보통 '쉐바'는 일곱의 여성 형으로서 단순한 히브리 기수로 사용하고 있지만, 상징적 용법들에 있어서 '쉐바'는 성경에서 어떤 신비한 암호말로 사용한다.
'맹세하다'(서약하면서 약속하다), '맹세하게 하다', '간청하다', '충성을 맹세하다' 등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샤바'도 숫자 7을 가리키는 쉐바에서 파생했다. 또한 쉐바의 자음 어근이 '만족하다', '포식하다', '가득하다', '충만하다' 등을 뜻하는 '사바'와 동일한 숫자 7은 풍성과 풍족, 충만 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일곱과 맹세는 동일 어이다.
고대 히브리 성경 본문에는 맛소라 사본과 다르게 모음이 부착되지 않은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쉐바'(일곱)나 '샤바'(맹세하다) 모두 '사바'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고대에는 '일곱'이라는 숫자와 '맹세하다'는 동일하게 취급됐고, 창21:22-34절에서는 쉐바와 샤바 상호간의 어떤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로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하였더라"(창21:30-31)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우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맹세하라고 요구하고, 어린양 '일곱' 마리를 증표로 아비멜렉에게 줌으로써 '맹세'를 확증했다. 그 우물의 이름은 '브엘세바'로 '일곱 우물' 또는 '맹세 우물' 이었다.
'샤바'에 대한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일곱으로 자신을 …하다"(to … seven oneself), 또는 "자신을 일곱 가지 것으로 묶다"(to bind oneself by seven things) 등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고대 세계에서 7의 수로써 협정에 조인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한다는 것은 맹세자가 어떤 약속 행위를 신실하게 수행하겠다는 증거로 파할 수 없는 '신성한 말'을 주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미래에도 그것을 계속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맹세와 언약
'서약하면서 약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샤바'의 명사형은 '쉐부아'(맹세)이다. 맹세는 서로간의 약속과 협정하다는 의미에서는 언약(베리트)과 비슷하다. 하지만 '맹세'는 엄숙히 확언하는 구두 적 진술 또는 서약이며, '언약'은 계약의 본질 그 자체이다. 즉 하나님이 자기가 '약속'(베리트)한 바를 이행할 것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맹세(쉐부아)를 행하신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제7일, 제7년, 희년을 안식하기로 하나님과 맹세, 곧 언약했다. 즉
제7일 안식일은 하나님과 맺은 맹세의 날, 제7년은 맹세의 년이다. 또한 하나님이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일곱 배의 벌을 '맹세'하셨고, 안식년을 범한 이스라엘에게 70년 바벨론 포로를 맹세하셨고, 다니엘에게 칩십 이레의 환상을 통해 종말에 대해 맹세하셨고, 사도 요한을 통해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재앙을 맹세하셨다. 곧 맹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절대적이고 확실하게 실행하는 행위이고, 7은 그 맹세가 신적 계시(신성)이며 완전함을 내포하고 있다
24. 인류 구원 역사를 완성하는 일곱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 그리고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통한 완전한 구원 성취를 자연계시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중 우뢰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과 성취, 그리고 심판을 나타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일곱 우뢰는 천지만물을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통해 완전한 구원 역사를 성취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천둥이 울려 퍼지는 소리
우뢰하면 한자어로 '우뢰'(雨雷)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뢰'는 한자말아 아니라 '우레'에서 온 말이다. 그리고 이 '우레'는 '울에'에서 왔고, '울에'는 '울다'에서 온 순수 우리말이다(우레←울에←울다). 다른 말로 한다면 천둥(thunder)과 같은 뜻이다. 일반적인 천둥의 사전적 의미는 '뇌성과 번개를 동반하는 대기 중의 방전 현상' 또는 '소나기가 내릴 때 번개가 치며 일어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방전 현상이 일어날 때 빛이 나는 현상을 번개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천둥이 하늘 천(天)+움직일 동(動)의 줄인 말로 '하늘이 진동한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종언어연구소의 박대종 소장은 천둥이 울려 퍼지다, 우르렁 울리다 등의 뜻을 가진 영어의 'roar'라는 단어가 한국어 '뢰'(roe)에서 왔다고 얘기한다.
신화에서 이러한 천둥은 천공 신(天空神)의 소리나, 울음, 노여움 등으로 표현되며, 번개는 천공신의 무기로 묘사되기도 한다.
큰 뇌성과 말씀의 소리
성경에서 이 우뢰에 해당하는 말은 크게 네 가지다.
먼저 히브리어 '콜'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또는 소리(창3:8, 10),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신4:12),
여호와의 말씀(신13:18, 삼상15:1),
주의 우레의 소리(시77:18),
큰소리(겔11:13, 스10:12)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음으로 동사형인 '라암'은 격노하다, 사납게 뛰놀다, 찬둥치다, 외치다, 통곡하다 등의 뜻이 있으며, 명사형인 '라암'은 천둥소리, 호령, 뇌성, 큰 소리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밖에 헬라어로는 천둥, 우레, 뇌성 등을 뜻하는 '브론테'와 큰 뇌성을 뜻하는 '포네'라는 말이 있다(계14:2).
하나님의 사역과 우뢰
이러한 우뢰는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 큰 능력, 말씀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산의 모습을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큰 나팔소리가 산 위에 있다'로 표현하고 있다(출19:16, 20:18).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늘 우뢰를 통해 땅 끝까지 심판하신다고 말씀한다(삼상2:10). 요한계시록에서도 '우뢰'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사용된다(계8:5, 11:19, 16:18). 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 그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겠다고 하신다(삼상12:17-18).
이와 함께 우뢰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비유하기도 한다(욥26:14). 자연의 운행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욥28:26, 38:25). 특히 우뢰는 우주만물을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음성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다(시77:18, 104:7). 이와 관련해 신약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예수께 말씀하실 때 곁에 있는 무리들은 이것을 우뢰가 울었다고 얘기한다(요12:28-29).
요한계시록10장에는 재림 주를 가리키는 힘센 다른 천사에 대한 모습이 나온다.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을 해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계10:1). 중요한 것은 이 힘센 다른 천사가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를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를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계10:3-4). 이 우뢰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일곱 우뢰들이 각기 제 소리들로 말하더라.'고 번역하면서, 시편 29편에 일곱 번 사용된 '여호와의 소리'와 관련돼 있으며 초자연적 우레 소리로 심판 성을 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내용으로 한 절이라고 말한다.
일곱 우뢰와 완전한 구원
그렇다면 여기서 왜 일곱 우뢰라고 표현했을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뢰는 하나님의 음성 또는 말씀을 상징한다. 그리고 7이라는 수는 완전과 완성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되신 하늘의 완전수인 3과 동서남북 땅의 완전수인 4의 합이 7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 안식하시어 창조의 완성을 보이셨다(창2:2-3). 또 십자가상에서 구원의 완성을 일곱 말씀을 통해서 계시해주고 있다(눅23:34, 43, 46, 요19:26-28, 30, 마27:46).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고, 일곱 가지 천국비유를 들었으며, 일곱 번의 화를 말씀하셨다(마13장, 18:21-22, 23장). 마지막 심판에서도 일곱 천사, 일곱 재앙,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을 통해 심판의 완전함을 보여주고 있다(계8:6, 15:1). 따라서 일곱 우뢰는 다시 오시는 주님이 일곱 말씀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사역과 심판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25. 일곱은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는 민족의 뿌리
백제에는 종교적 제의에 사용된 일곱 개의 날을 가진 칠지도가 있고, 신라에는 제사장의 도구였다는 일곱 개의 나뭇가지 모양이 있는 금관이 있다. 이와 함께 구약시대 이스라엘 성전에는 일곱 개의 촛대를 가진 메노라가 있다. 모양과 쓰임새가 유사한 이 세 가지는 한민족에게 하나의 연결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일곱 날 가진 백제의 칠지도
전체 길이가 75cm, 칼날의 길이는 65cm로 제련된 칼이 있다. 그것은 칼의 몸체 좌우에 세 개의 나뭇가지 모양의 칼이 뻗어 있고 본체 끝까지 합쳐서 모두 일곱 개라 하여 붙여진 '칠지도'(七支刀)다.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이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는 일본 나라현의 덴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돼 있다. 한국과학기술의 권위자이며 교육자로 알려진 재일교포 손재하 씨에 의하면 '이 칠지도의 칼 몸체의 앞면과 뒷면에는 61자의 글이 금으로 상감돼 있는데, 이 금의 순도는 분석결과 78%'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이 오가고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백제왕이 일본(왜) 왕에 헌상했다'는 일본의 주장이다. 반면 북한의 김석형 이라는 학자에 의하면 '칠지도는 백제왕이 신하 뻘 되는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이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아주 성스러운 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의 저자 이덕일 씨와 이희근 씨에 의하면 '일곱 개의 날 또는 일곱 개의 곁가지는 시베리아 지역 부족들의 전통신앙에서 하늘세계 또는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는 우주 목(宇宙樹)'이라는 것이다. 또 이 우주 목을 뜻하는 칠지도는 '종교적인 제의를 수행하는 제사도구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일곱 나뭇가지의 신라금관백제의 일곱 개의 날을 가진 칠지도와 비슷한 흔적을 신라의 금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금관 또는 금 동관(金銅冠)은 금을 숭배하고 사랑하던 신라인과 가야 인이 살았던 현재의 경상남북도 지역에서 골고루 발견된다. 주로 많이 발견되는 금관들의 모양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금으로 만든 '직각수지형 입식'(直角樹枝形 立飾)과 '녹각형 입식'(鹿角形 立飾), 그리고 생명을 상징하는 '곡옥'(曲玉) 등이다. 이 중에 '직각수지형 입식'은 곧게 뻗은 일곱 개의 나뭇가지 모양을 한 것으로 그 모양이 칠지도와 유사하다. 경주의 천마총 금관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이 외에도 경주 금관총 금관과 금령총 금관 등이 일곱 개의 가지 모양을 가진 입식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경주, 대구, 양산, 부산, 경산, 안동 등에서 발견되는 금동관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한반도 전국 곳곳에 일곱 개의 나뭇가지 모양을 한 금관 또는 금동관이 발견되고 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인 김병모 박사는 이러한 직각수지형 입식이 생명나무와 하늘에 제사 드리는 사제(司祭)와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금관을 사용했던 민족이 바로 시베리아와 알타이에 연결돼 있다고 한다.
일곱 등대를 가진 이스라엘의 메노라
백제의 칠지도, 신라의 금관과 같은 유사형태를 가진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메노라'(Menorah; lampstand)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정금으로 만든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등잔대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다(출25:31-40, 왕하4:10). 이 메노라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만든 것이다. 메노라의 등대줄기를 포함한 일곱 개의 가지에는 각각 살구꽃 형상의 잔과 꽃받침과 꽃이 있다. 그리고 잔에는 정결한 감람나무 기름이 가득 담기도록 했고, 등잔불은 끊이지 않고 켜 있어야 했다(레24:2). 이것을 스가랴 선지자는 환상 가운데 보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등잔의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어 등대 좌우편에 있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나오는 기름이 일곱 금관(the golden pipes)을 통해 순금등대의 등잔으로 계속 공급된다는 것이다(슥4:2-3).
미국 보스턴 대학의 죠오지 니드햄 박사에 의하면 이 등대와 딸린 기구들의 가치는 약5만 불에 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스라엘 의회건물 입구 쪽에서 약 4.8m 높이의 메노라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과 유대역사관을 나타내는 이 상징물은 영국의회에 의해 기증된 것이다. 진 쿠퍼는 그의 저서 『세계문화상징사전』에서 이 촛대의 일곱 등대는 우주 목(宇鑄樹) 또는 우주 축(宇宙軸)으로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땅에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있다.
영생을 뜻하는 일곱 가지의 우주 목
지금까지 살펴본 백제의 칠지도와 신라 금관의 직각수지형 입식, 그리고 이스라엘의 메노라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뜻하는 우주 목으로 상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도구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나라(B.C. 206 - A.D. 8C)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일곱 가지의 나무가 양각돼 있는 점토 기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한스 핀트아이젠(Hans Findeissen)이라는 고고학 학자는 '이 기와가 일곱 가지를 가진 우주나무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제사를 드리는 샤면과 연관돼 있다'고 추정한다. 일곱과 우주나무, 제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러한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와 한반도 등의 알타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곱 개의 가지와 우주나무 등의 공통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상징의 비밀』이라는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폰태너에 의하면 신 또는 하늘의 숫자 3과 인간의 숫자 4의 합계인 7은 대우주와 소우주를 나타내며, 신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해준다고 말한다.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후 안식하신 일곱째 날이며,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께서 남기신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그리고 마지막 심판을 나타내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을 의미하는 완전수라 하겠다(창2:2-3, 마27:46, 눅23:34, 43, 46, 요19:26-27, 28, 30, 계6:1, 8:6, 15:1). 특히 구원에 있어서는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창2:9, 눅23:31, 요6:63). 한 마디로 칠지도와 금관, 그리고 메노라의 일곱은 창조주 하나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진 민족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26. 한민족이 섬긴 '일곱 별'의 하나님
한민족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 중에 '자미대제'(紫微大帝), '칠성(七星)님' 등이 있다. 이것은 별들의 세계, 곧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북두칠성을 비유해서 부르는 말이다. 이 외에도 북두칠성과 관련된 신화와 역사 자료들이 풍부하다.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을 '일곱 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큰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북극하늘에 있는 일곱 개의 별을 가리켜 우리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라고 부른다. 북두, 북두성, 칠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일곱 개의 별은 국자 모양을 하고 있다. 여기서 두(斗)는 '별 이름 두' 뿐만 아니라, 곡식이나 액체의 분량을 헤아리는 단위 또는 용기를 가리키는 글자이기도 하다. 곧 국자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두'라는 한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때문에 북두칠성에는 '큰 국자'(Big Dipper)라는 별칭이 있다.
서양에서는 큰곰자리의 꼬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Great Bear'(Ursa Major)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고대 사람들은 북두칠성을 큰 마차나, 큰 쟁기(Plough)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북두칠성은 사계절 어느 때나 볼 수 있으며, 발고 뚜렷한 모양 때문에 항해와 여행의 길잡이로 사용된다. 1950년 생산이 시작된 우리나라의 기호식품 '칠성사이다'도 바로 북두칠성에서 그 이름을 딴 것이다.
북두칠성의 나라 한민족
이러한 북두칠성에 대한 한민족의 신앙은 매우 특별했다. 본래 한민족의 민간신앙에는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북두칠성에 관한 신앙과 그 흔적은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삼한관경 본기』(三韓觀境 本紀)라는 책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갔다'는 말이 있다. 이 내용에서 언급된 '천부'는 하늘의 부적 또는 증거라는 뜻으로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지금도 무당의 신당에 가면 북두칠성이 양각된 '명두'(明斗:북두칠성을 밝힌다는 뜻)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중부지방의 무속 인들은 명도(明圖)라는 동경(銅鏡)에 칠성(七星)을 그리거나 문자로 새기기까지 했다. 또 '칠성단'이라는 단을 쌓는 풍습도 빈번했다. 이 외에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주문'인 '칠성경'(七星經)이라는 것이 있기도 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와 용강리 일대에 위치한 운주사(雲住寺)는 '칠성바위' 또는 '칠성석'으로 유명한 장소다. 이곳에는 한 개의 무개가 12톤에서 20톤까지 이르는 각기 크기가 다른 일곱 개의 둥근 바위가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일곱 개의 바위가 놓여있는 위치가 북두칠성 일곱 개의 별과 그 위치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또 각기 다른 돌들의 크기는 별들의 밝기에 따른 것으로, 밝은 것은 큰 바위, 밝지 않은 것은 작은 바위로 배열돼 있다고 한다. 또 대흥사 절터의 원통 골 근처에도 30척(1척=30.3cm, 939.3cm)이나 되는 밑받침 석에, 길이가 70척(2151.3cm)이 되어 하늘을 찌르는 듯, 한 바위 일곱 개가 솟아 있다.
하나님의 별인 북두칠성
앞에서 본 것처럼 한민족에게 있어서 북두칠성은 각별했다. 특별히 북두칠성은 하나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다. 예를 들어 고대 동이족은 북두칠성을 하나님으로 생각했다. 그 후손인 조선족 역시 하나님을 '칠성님' 또는 '칠성신'(七星神)이라고 부르며 섬기기도 했다. 용인 무봉 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칠성각에는 '자미대제 통성 군'(紫微大帝統星君)이라는 글귀가 있다. '자미대제께서 별들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미대제'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해서 부르는 말이다. 곧 다른 말로 '자미원이라는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산과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태산북두'(太山北斗)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것은 '권위자', '제일인자' 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가장 우러러 받듦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나 그러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하나님의 일곱별과 일곱 영
한민족이 이렇게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실마리를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에게 북두칠성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별이었듯이 성경도 하나님의 모습을 일곱별과 연관시켜서 기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좌 앞의 일곱 영'(계1:4), '그 오른손에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가 있는 분'(계1:16, 20, 2:1),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계3:1), '보좌 앞에 켜진 일곱 등불과 하나님의 일곱 영'(계4:5),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어린양이신 하나님의 일곱 영'(계5:6)으로 앞으로 오실 주님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의 생사회복을 주장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신30:15, 19, 렘21:8).
그렇다면 일곱 개의 별인 북두칠성을 하나님으로 여겼던 한민족의 신앙은 일곱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27. 야곱의 가족은 70명인가 75명인가
야곱은 이스라엘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직접적인 조상이 바로 야곱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지 못했다면 '이스라엘' 국가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담은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의 조상이고,
노아는 현 인류의 조상이며,
아브라함은 중동 민족의 조상이듯이,
야곱은 현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킨 조상인 것이다.
야곱에 의해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은 큰 민족으로 형성되기 위해 언약대로 애굽에서 430년간 양육 받았고, 60만3천550명이라는 큰 민족으로 출애굽 하였다. 그럼 430년 전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모두 몇 명이었나?
성경에서는 두 가지 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창세기46장27절과 신명기10장22절에서 모세가 야곱을 포함해 모두 70명(야곱의 자부 제외)이라고 증언했고,
둘째는 사도행전7장14절에서 스데반이 설교 도중 75명이라고 증언했다. 과연 어느 기록이 정확한 기록이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 수가 70명인 75명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두 곳의 기록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에게 있어 야곱 가족의 수는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스데반이 읽던 성경은 다른 성경
애굽에 내려간 야곱 가족의 수는 과연 몇 명인가에 대해 신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적 견해를 내놓는다.
또한 신학자마다 70명이 옳다 75명이 옳다고 서로 다르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스데반이 읽었던 성경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아닌 70인 역(헬라역본)이었다.
또한 70인 역 창세기46장에서는 모두 75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왜 70인 역과 히브리어 성경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70인 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번역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한 조상들의 계보 명단(역대상의 명단)을 재조정했을 것이다. 모세는 분명하게 70명으로 기록했지만, 후대에 와서 75명으로 고쳐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은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자손은 75명이라고 설교한 것으로 본다.
유다의 족보를 통한 해석
야곱의 가족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46장에 나오는 야곱 가족의 명단(족보)을 통해 해석해 보는 방법 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분명한 것은 족보상 야곱 가족의 수가 70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75명이라는 증거도 없다. 오직 모세가 의도성을 가지고 70명의 명단을 기록했다는 증거밖에 없다.
먼저 창세기46장8-15절은 레아에게서 나온 남녀 자손이 '3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명단으로는 '34명'이고, 가나안에서 죽은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을 빼면 실제로 '32명'이 된다.
둘째로 유다의 계보를 살펴보면 더욱 정확하다.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의 계보는 아들 5명(엘, 오난, 셀라, 베레스, 세라)과 손자 2명(헤슬론, 하물)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베레스와 세라는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태어났다. 족보상으로는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손자와 같은 연배이고, 손자들은 증손자와 같은 연배이다. 이러한 족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40-50여 년의 연수가 필요하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후부터 야곱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까지의 연수는 22년 정도이다(창37:2, 41:46, 41:53, 45:6). 이 기간 동안 유다는 두 아들(베레스, 세라)과 손자를 볼 수 없다. 더욱이 유다와 요셉의 나이 차이는 길게 7-8년, 짧게 4-5년 정도 밖에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외에 다른 증거들이 70명의 명단이 저자 모세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럼 모세는 '칠십'이라는 수를 만들기 위해 명단을 재구성했다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 갖고 있는 칠십이라는 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70이 갖는 성경적 비밀
'칠'이라는 수와 '십'이라는 수가 결합된 '칠십'은 성경적 상징으로 하나님의 완전 구속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고, 안식일, 안식년, 희년, 홍수 7일 전의 계시,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 이레, 아시아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일곱 재앙 등 성경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칠'과 '칠십'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별히 야곱의 70가족과 유사한 부분으로 창세기10장의 노아 아들들의 후손이 언급될 수 있다. 이 목록에는 정확히 칠십 개의 나라들이 제시되고 있고 이 나라들은 노아 자손들의 이름이다.
창세기10장32절에서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는 기록으로 노아의 아들들이 온 인류를 형성했다고 증언한다.
창세기10장은 단순히 노아 자손 칠십 명의 이름 목록이 아니다. 이 목록은 저자 모세가 나라들의 전체적 개념이 '칠십'이라는 숫자에 의해서 표현되는 일종의 숫자적 상징주의에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모세는 '모든 나라들'의 그 궁극적인 기원을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세가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서 야곱 자손들의 전체적 숫자가 '칠십'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도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이 70명인지 75명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되고, 저자인 모세의 기록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모세는 70이라는 신적 상징 숫자를 통해 우리에게 완전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표현했고, 완전하고 전체적인 상징적 의미로 사용했다.
즉 모세가 야곱의 가족을 칠십으로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 야곱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 기원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의미에서 70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28.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70가족
요셉이 17세에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린 이후 10여년이 지난 시점에 가나안과 애굽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유목민족이던 야곱의 가족은 가뭄이 한해 두해 계속되면서 기근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야곱은 애굽에는 식량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식량을 구해오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죽었던 것으로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살아있음을 알게 되고 재회하게 된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기근을 피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는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창세기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창37-45장).
애굽에 이주한 야곱가족은 70 vs 75
이런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의혹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창세기46장, 출애굽기1장, 신명기10장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은 모두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은 애굽에 이주한 야곱의 가족은 75명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이 한 가지 사건을 놓고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오경(五經)을 기록한 모세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주장 중 누가 더 정확할까?
우선 야곱의 가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것은 모세로 창세기46장에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70명 가족의 명단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반면 스데반의 설교에서 인용된 75명의 숫자는 70인 역을 기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답은 이렇다. 사도행전의 75명은 70명의 수효에 독립적인 가계를 형성한 요셉의 다섯 후손(창50:23)을 가산한 숫자라는 것이다. 모세는 원래 애굽에 이주한 가족을 70명으로 기록했지만, 후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70인 역)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창설자들의 명단인 75명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스데반이 75명이라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애굽에 이주한 사람 70명 맞어?
그런데 창세기46장에서 애굽에 이주한 야곱의 가족 수가 과연 70명이 맞느냐는 또 다른 의혹을 발견하게 된다. 창세기37장부터 연대순으로 자세히 읽어본 후 창세기46장에 기록된 명단을 계보도로 그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유다의 가족사와 가계를 살펴보면 애굽 이주자 명단의 진위를 알게 된다.
유다는 대략 20세(요셉이 애굽으로 팔린 뒤)에 결혼해 엘과 오난, 셀라를 낳았다(창38:1-5).
첫째 엘은 다말과 결혼했지만 일찍 죽어 둘째 오난이 다말과 다시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오난마저 일찍 죽음으로써 다말은 유다에게 막내 셀라를 남편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셀라까지 잃을까봐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었다(창38:6-11). 이에 다말은 꾀를 내어 자신이 창녀로 변장한 후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갖은 후 배레스와 세라를 낳게 되었다(창38:12-30).
유다의 가계가 여기까지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70가족 명단에는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과 하물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창46:12). 더 이상한 것은 유다의 죽은 두 아들 엘과 오난도 기록됐다는 점이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국무총리가 된 후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이주하기까지 기간은 대략 20년 정도(22-28년)라고 추측되는데, 어떻게 40대 중반의 유다가 증손자 같은 손자를 볼 수 있었을까? 더욱이 20대 중반인 베냐민이 10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 풍습에선 좀처럼 믿기 힘들다.
야곱을 따라 애굽으로 이주한 가족의 명단은 가나안에서 태어난 자들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여기에 제시된 야곱의 1-3대 손들의 명단은 모세 시대에 각 지파의 창설자와 독립적인 부족을 형성한 족장들의 명단(민26장)으로 봐야 한다.
애굽에 내려가 바로 왕을 면담했을 때 야곱의 가족은 70명이 안 되는 가족(자부 제외)이었다. 이런 소가족이 4백년 뒤 남자만 60만 명이 넘는 큰 민족으로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70명이 안 되는 가족을 70명이라고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창세기 10장의 계보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29. 70은 완전하고 충만한 가족의 수
야곱의 가족이 애굽 땅에 들어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보잘 것 없는 70명의 가족이 4백년 뒤 60만3천여 명(남자만)에 이르는 대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출12:37, 38:26). 또한 야곱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4백년간 노예 생활을 할 것도 이미 예언된 일이었다(창15:13-14).
현재 야곱의 70명 가족의 진위가 논란이 되는데, 모세는 왜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이 70명이었다고 조작한 것일까? 이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모세가 실존하지도 않았던 인물을 70명의 명단에 넣은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모세의 속뜻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70 속에 숨겨진 모세의 신학적 의도
모세의 주장은 조작보다는 모세의 신학적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봐야 한다. 즉 야곱의 70명의 가족은 모세의 신학적 의도에 의해 재구성됐다고 해석해야 한다. 야곱의 70명의 가족 계보는 모세 시대에 각 지파의 창설자와 독립적인 가족을 형성한 족장들의 명단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체제를 형성한 족장명부란 점에서 이와 유사한 부분을 창세기10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창세기10장에 기록된 노아 자손들의 이름을 세어 보면 70명이 된다(셈, 함, 야벳 제외).
셈의 자손 26족속, 야벳의 자손 14종속, 함의 자손 30족속 총 칩실 족속이 홍수 후 세상 모든 나라들의 조상이 된다(창10:32)고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70은 이상적인 숫자로 '완전성'과 '충만 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기드온의 70명의 아들(삿8:30), 아합의 70명의 아들(왕하10:1), 이스라엘 장로 70인(민11:16-25), 예수의 칠십 문도(눅10:1) 등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칠십 이레(단9:24), 바벨론 포로 70년(렘29:10), 엘림의 종려나무 70주(출15:27) 등 70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 알 수 있다.
모세는 야곱의 가족을 70명이라고 의도적으로 구성함으로써 70이 단순한 숫자가 아닌 그 속에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70의 근원 7속에 담겨진 의미
70(쉬브임)은 숫자 7에서 파생됐다. 7(일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쉐바'로 '맹세하다'의 '샤바'와 '충만하다'의 '사바'와 어원이 동일하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7이란 단어 속에는 '맹세'와 '충만'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단적으로 이삭의 브엘세바를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 우물'로 번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대 바벨론인은 7을 '완전성과 충만 성'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구약성경에서는 '신적 충만'과 '만족', '완성'(완전)으로 받아들였다. 7의 10배수인 70은 성경에서 '보편', '구원', '이상적'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계획이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의 70명의 가족은 먼저 이상적인 가족의 숫자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인들은 70명의 아들을 이상적인 아들의 수라고 생각했다. 노아의 70명의 자손이나 기드온의 70명의 아들, 아합의 70명의 아들에서 잘 나타난다.
둘째로 큰 민족을 이루기에 충만함을 나타낸다. 야곱의 자손 70명 속에 이스라엘 12지파 내 가계의 창설자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이들이 하나님의 국가 전체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창세기10장 노아의 자손에게서도 나타난다.
셋째로 70은 아브라함과의 맹세를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새 민족)을 약속했고, 열국의 아비(새로운 아담)를 제시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큰 민족은 야곱의 70명의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데, 70이란 매우 적은 숫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로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됨을 나타낸다. 70이란 숫자에 '구원'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모세는 야곱의 가족을 70명으로 구성한 것은 그 숫자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전 구속하셨음'을 예표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30. 성경과 과학-할례와 8의 의미
8을 나타내는 말에는 여덟을 뜻하는 기수 ‘쉐모네’와 여덟째를 뜻하는 서수 ‘쉐미니’가 있다. 숫자 8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옥토’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식 표기가 ‘octa'’다. 참고로 8각형은 ‘octagon’이며, 피아노의 8도 음정을 ‘octave’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4의 배수인 8은 중복과 강조의 화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방팔방, 사고팔고, 사통팔달 등이 그 예다. 바벨론에서 8은 천국의 수로 인식돼 있다. 왜냐하면 바벨론 신은 탑 모양으로 세워진 신전의 8층에 기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8을 행운을 불러오는 특별한 수라고 여겼다. 8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의미와 7이 준비하고 성취한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8은 신적인 완전수 3과 은혜의 수 5의 합으로 부활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 신학자들은 예수의 헬라식 표기인 ‘예수스’(10+8+200+740+400+200)가 888이라는 값을 가지기 때문에 성스러운 수로 인식하기도 했다.
8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여덟 번째 알파벳은 ‘담’, ‘울타리’라는 의미를 가진 ‘헤트’는 ‘죄에서 다시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과 재창조를 의미하는 8이라는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와도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성경에서 8은 구세주를 통한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노아의 가족8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았다.(창6:1-7:8, 벧전3:20).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행하는 할례는 범죄 함으로 더러워진 피를 뽑아내어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을 상징한다(창17:10-14, 23-27, 레12:3, 눅2:21).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은 7일째 안식일이 지난 첫날 부활하셨다(마28:1-6, 막16:1-6, 눅24:1-8). 때문에 숫자 8은 안식 후 첫날인 새 안식일, 곧 주님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인 주일이 됐다(요20:1-10).
참고로 8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열일곱 번째 알파벳은 ‘입’을 상징하는 ‘페’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피’다.
할례와 8의 의미
죄 사함을 의미하는 할례의 과학적 의미
할례의 기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자신과 이스라엘, 그리고 그 집의 모든 남자들에게 해한데서 유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열국의 아비’로 삼으셨는데, 이 언약의 표로서 ‘할례’라는 의식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할례가 아기가 태어난 지 팔일 째 행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8에 숨겨진 의미들
히브리어로 ‘샤만’이라 칭하는 숫자 8은 성경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숫자 중 하나이다. 고대로부터 행운의 의미를 가진 8이라는 수는 기독교 전통에서 성(聖)스러운 의미로 사용된다. 8은 ‘원래의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와 ‘7이 준비하고 성취한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어찌되었든 유대교에서 제 8일은 정화의 날이며, 할례(circumcision)가 행해지는 날이기도 하다(창17;12, 레12:3). 그리고 아브라함과 오벧에돔이 8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것에서 8이 ‘복된 수’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대상26:4-5). 가장 중요한 의미로 제 8일은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이다.
할례는 써컴시데레(circumcidere)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주위를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도 있다. 이것은 남자 성기의 양피를 자름을 의미하며, 종교의식 또는 소년이 성년이 된 표시로서 널리 행해졌다. 그리고 영적인 정결의식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명하셨다.
언약은 히브리 원어로 ‘베리트’라 하는데 이는 ‘베어낸다’, ‘쪼갠다’의 뜻을 가진다. 즉 언약은 ‘할례’의 원어적인 뜻과 유사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할례 때에 그 아기의 이름이 지어진다고 한다. 이 할례의식은 유대인들이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고유의 민족성을 의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신비한 물질 ‘트롬빈’
이 할례의식을 할 때에 반드시 출혈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8일째 되는 아기는 피를 응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8일째 되는 아기의 몸에는 신기하게도 피를 응고할 수 있는 효소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가진 물질이 있는데 효소가 바로 ‘트롬빈’이다.
상처로 인하여 피부 밖으로 나오는 피에서는 트롬보플라스틴(thromboplastin)이라는 물질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간에서 만들어지는 ‘프로트롬빈’을 응결효소인 트롬빈으로 바꾸어 주게 된다. 이 효소는 용해성 섬유소원 즉, 혈액을 엉키게 하는 단백질을 불용성 섬유소로 바꾸어 준다. 섬유소는 유기학적 채(mesh)를 만들고, 이 채가 상처를 막고 피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섬유소가 생성될 때, 섬유소는 혈청을 수축 압박하여, 완전히 굳어 엉키게 한다.
우유와 비타민K
이 프로트롬빈이라는 응혈소는 간에서 생성되는데,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타민K이다. 비타민K는 우유를 포함한 여러 음식물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창자 속에서 활동하는 박테리아를 만들어 몸속으로 흡수하게 하여 간이 프로트롬빈을 만들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유를 먹이는 갓난아이는 피를 응고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갓난아기는 태어난 지 2-3일이 된 후에야 창자 속에 있는 박테리아가 비타민K를 만들어서 작은 상처로 인한 피의 출혈을 굳게 해서 막지만, 큰 상처로 인한 출혈은 아주 위험하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8일째 될 때에는 출혈을 막을 수 있는 피의 응고가 가장 잘 될 때이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남자아이가 8일째 되었을 때 피의 응고나, 상처의 치료가 가장 효과적인 시기로서 아이는 상고에서 회복하고, 생리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않을 때라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을 때, 아브람은 소독되지 아니한 돌칼로 할례를 행하였다. 8일째는 병균이 침입했을 때,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백혈구가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결국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과의 언약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때를 정확하게 아셨다. 즉, 갓난아기가 8일째 되는 날이 할례를 받기에 가장 안전한 날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할례는 타락함으로 인하여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에게 흐르는 죄악 된 사망의 피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차돌(벧전2:4)로 베어내어 깨끗이 씻음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할례란 죄악 된 인간이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와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을 말씀하는 것이다(요1:4, 15:3, 히4:12).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의 할례를 받기를 호소하셨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렘9:25-26). 이는 신약에서 세상의 속성을 베어내고 마음에 할례를 받는 ‘그리스도의 할례’로 이어진다(골2:11-12).
31. 오묘한 수의 비밀
"아직도 계산이 안 되시나요?" 화이트보드에 숫자가 빼곡하다. "이 계산은 포괄적 산술방식으로 해야죠?" 수능시험 준비하는 학원 풍경이 아니다. 주일 아침 평강제일교회 남선교회 성경공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수천 년간 인간을 매혹시켜 온 숫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수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것이 담겨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와 관련된 힘을 이용해 마법을 행하거나 자신의 기도에 강한 효험을 부여하고자 노력했고, 일종의 '수비술'(數秘術)로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성경의 숫자 개념 속에는 수치, 수량, 시간 등 표면적인 기능 외에, 상징적이고 종교적이며 신비적인 기능도 포함된다. 성경에는 감추어진 신비한 상징의 세계가 다양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수의 상징체계이다.
우리는 간혹 역사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간섭을 인정하면서도, 성경과 자연에 나타난 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책으로, 성경에 나타난 숫자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전14:10). 성경의 숫자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숫자들은 하나님의 정확한 계시이며, 하나님의 계획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시려는 성경 기자들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고대 바베론에서 발달한 천문학은 그리스로 전파돼 새로운 수론으로 발전하였는데, 여기서 피타고라스 학설이 탄생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원리를 수로써 풀어 보려고 시도했으며, 그의 학파의 수학이론은 수비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국의 역(易)도 음과 양을 각각 나타내는 2개의 추상적 기호를 바탕으로 이원론 체계를 세웠다. 중국의 역은 1에서 10까지의 수에 대해 홀수를 '양'의 천수(天數)로, 짝수를 '음'인 지수(地數)로 나누어, 천지를 상징하는 홀수와 짝수가 우주간의 모든 변화를 이루는 원리라고 생각했다. 수학은 이렇듯 그 기원부터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철학적 종교적 이론의 바탕을 두었다.
또한 수학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 오묘한 도구로 [구속사시리즈]를 통해 우리 앞에 소리 없이 나가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10대 족장들의 나이가 왜 중요한지 누가 알았을까? 거두절미하고, '즉위년과 무즉위년' 그리고 '니산월과 티쉬리월 방식'은 제 4권의 압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수학이론도 생각해 보지 못한 종교적 깊이와 심오한 철학이 남겨 있다. [구속사시리즈]가 예정된 제 12권까지 완간되면, 하나님의 진리들이 어떤 수학들로 우리 앞에 나가설지 가슴이 설렌다.
32. 모세의 구리 뱀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9를 나타내는 말에는 아홉을 뜻하는 기수 ‘테샤’ 또는 ‘티쉬아’와 아홉째를 뜻하는 서수 ‘테쉬이’가 있다. 헬라어로는 ‘앤네야’와 아홉째를 의미하는 ‘엔나토스’를 들 수 있다.
8는 9에 1을 더한 수로, 천상의 완전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통과 수난을 상지하기도 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9라는 수가 완전한 수로 여겨지는 10에서 1이 모자라기 때문에 불길한 수라고 여기기도 했다. 또한 성스러운 수인 3이 강화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완성의 수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숫자 9는 조화와 완벽의 상장으로 여기는 3을 3배한 수로,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가장 완전한 수이며, 가장 큰 수로 여겨진다. 완벽한 수는 아니지만 아직도 채워야 할 것이 있다는 여유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숫자다. 예를 들어 9는 더없이 높은 지고(至高)의 수다. 아주 큰 키를 구척장신(九尺長身)이라 하고, 매우 먼 하늘을 ‘하늘 구만리’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많음을 뜻하는 구사일생(九死一生)과 깊음을 뜻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은 궁궐)등도 9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9는 3의 3제곱으로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 나오며, 심판과 종국, 완성을 의미한다.
9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아홉 번째 알파벳은 뱀을 상징하는 ‘테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데타’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아홉 또는 아홉과 관련된 개념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곧 아홉이라는 개념은 잃어버린 하나가 돌아올 때까지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마18:12-13, 눅15:4,7). 잃어버린 자, 곧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시간도 이스라엘 시간으로는 제 구시다(마27:45-46, 막15:34).
또한 숫자 9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아홉 가지 열매를 나타내기도 한다(갈5:22).
참고로 9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덟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낚시바늘(fish-hook) 또는 물고기를 낚는 갈고리(fishing hook)를 상징하는 ‘차데’이다.
모세의 구리뱀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하나님의 거룩한 땅 에덴에 들어와 사람을 유혹해 타락시킨 뱀. 인류의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이후 뱀은 마귀와 동일한 인상을 던져 주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는 말씀을 통해서도 뱀은 곧 심판 받을 존재임을 말씀해 주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셔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셨다. 왜 하나님은 사단과 죄악의 상징인 뱀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을까?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
애굽과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인도해낸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이스라엘 진 가운데 보내 수많은 사람을 물려 죽게 하셨다(민21:4-9). 뱀에게 물리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은 불 뱀에 물린 그 백성을 치유할 방법으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다. 장대 위에 달린 구리뱀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요3:14).
존 R. 라이스는 “구리는 심판의금속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형”이라며, “구리뱀은 죄를 묘사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했다”고 말한다. 더불어 라이스는 “은(銀)은 구속을 묘사해 성전에서 속전(贖錢)으로 은 세겔이 사용되었다. 금은 신성을 묘사하는데 언약궤와 향단은 금으로 되어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수비학자들은 모세가 만든 기적의 구리뱀은 숫자 9와 관련이 있으며, 동시에 비전적으로 날개 달린 뱀 또는 용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숫자 9는 심판의 수인 동시에 구원의 수라고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한 도구도 뱀이지만 치유한 구원의 도구도 뱀이었다. 마치 심판과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죄인의 시각과 택함 받은 자의 시각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숫자 9는 죄의 회개와 치유
한편 숫자 9는 죄의 회개와 연관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10명의 문둥병자가 찾아와 치료하셨지만 우직 사마리아인 1명만 돌아와 감사했다. 나머지 9명은 치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눅17:12-19). 9명의 문둥병자는 육체적인 치유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영적인 심판은 피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눅15:8-10)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잃어버린 하나를 찾기까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구원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 시간에 제9시였다. 그래서 9는 고통과 수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숫자9는 성령 혹은 은혜를 포괄하기도 ㅎ나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와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를 통해 설명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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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토를라이프 보만의 <히브리적 사고와 그리스적 사고의 비교> 허혁 역(서울, 분도출판사, 1993)
o Hward Eves의 <수학사> (고대 및 중세편), 이문영 역(서울, 경문사, 1991)
o <성서백과대사전 Vol.6> 민영진 편(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1)
o 배재민의 <새로훈 형태의 구약연구> (서울, 총신대출판부, 1982)
o 존킹의 <수와 신비주의>, 김창국 역(서울, 열린책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