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해가 붉은 철가루를 털어낸다. 하루만치 녹슨 석양이 노곤한 듯 물러서면 거먕빛 어둠살이 빈자리를 밀도 있게 채운다. 영일만 바다는 수평선까지 내달려 하늘과 한 덩이를 이루어 검은 먹지 같은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해안선 끝쪽 철강회사의 조명이 스타워즈의 광선검처럼 밤바다에 번득이고 일과를 마친 장정들이 작업복을 훌훌 벗으며 실오라기 불빛을 곡진하게 내놓는다. 우주와 접속한 도시의 밤은 웅숭깊고 근사하다.
환호공원 언덕배기에 수십 미터 높이의 은빛 철제 구조물이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서서히 고도를 높여 훅 내리치다 갑자기 휘도는 롤러코스트를 닮았고, 중력에 갇히지 않으려는 무용수가 공중에 그려 놓은 유유한 몸선 같기도 하다. 포스코가 만들고 독일 유명 예술가 부부가 디자인한 ‘스페이스 워크’는 참여형 공공 미술이다.
고개를 뒤로 꺾어 쳐다보다 이름처럼 우주를 걷는 경험을 해보리라 호기롭게 계단을 올라간다. 사방으로 뻥 뚫린 광활한 시야에 압도되어 탄성을 지르다 어느 순간 발밑 계단과 손잡이 난간 사이로 나붓대는 바람길이 느껴진다. 미미한 떨림에도 몸은 예민해져 살갗이 모두 일어선다. 붙잡을 것도 붙들릴 것도 없는 자유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버거웠던 일일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듯 어웅한 하늘 웅덩이에 빠져 걷기는커녕 엉거주춤 서 있다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무어라도 부여잡고 몸을 낮추어야 견딜 수 있겠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아빠 살려줘 라고 외치는 다 큰 처자의 앓는 소리, 더는 발을 뗄 수 없다며 후들대는 장골의 하소연, 이렇게 하면 조금 덜 무섭다는 앞선 이의 경험담이 탄소강(鋼)을 타고 미끄러지듯 다가와 반쯤 울다 마침내 웃고 만다. 강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너편 포스코가 믿어보라는 듯 파란 빛으로 조명등을 쏘아 올린다. 천천히 일어나 두 팔을 뻗어 양쪽 울타리에 손을 얹고 마음을 다잡는다. 두려운 지점은 언제나 있었다. 어둠이 감싼 견고한 곡선을 따라 우유색 불빛이 들어온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혈맥이 지상으로 드러나 굽이치면 이러한 모습일까. 지신의 혈관은 철관인지도 모르겠다. 철기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인생들을 지탱해주는 쇠길 위에 서면 누구라도 지구의 알갱이가 되어 철맥을 따라 찬란하게 흘러간다.
사람 몸에도 철이 묻혀 있다. 뼈와 살을 에두르는 철분이 온몸을 구석구석 감아 돈다. 이것이 부족하여 나는 자주 어지러웠고 파근한 일상을 버티기 어려웠다. 어긋난 자리에서 비영비영 흔들리다 결국 멈추었다. 몇 차례 수술을 하고 철분제를 한동안 복용하고서 제 위치로 돌아왔다. 동전 하나 무게도 되지 않는 소량의 철이 수천 배나 되는 육체를 평소와 다름없이 확고하게 지켜낸다. 흔하디흔한 철처럼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맞물려 하루하루를 충실히 돌아가게 한다. 스페이스 워크를 만든 재료가 광석에서 처음 추출한 철이든 버려진 쇳덩이를 다시 제련했든 상관없다. 온몸을 열어 아집을 녹일 수 있다면 누구라도 불꽃 튀는 생이 될 테니까.
어릴 적 엿장수가 집 앞을 지나다녔다. 뚝뚝 부러지는 양철 부스러기를 손에 쥐고 이것도 엿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조마조마했다. 쩔겅쩔겅하던 가위 손잡이로 끌을 툭 치자 너붓한 엿판에서 한 조각 엿이 끊어졌다. 수레에 실려있던 그 많던 헌쇠들이 무엇으로 재탄생했는지 모를 일이다. 다만 아저씨의 가위와 쇠붙이가 부딪힐 때 작은 불티를 본 듯도 하다. 하찮고 무른 것들을 흐뭇이 달래주던 마음이 녹진하지 않다면 무엇이 그토록 말랑하겠는가.
높낮이를 달리하는 스물다섯 개의 기둥이 땅으로 쇠심을 박고 어깨에는 트랙을 결어 안전망을 만든다. 그래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쇠가 아무리 견고해도 걸고리가 부실하면 물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밀려드는 조류 속에 허술하게 빗장을 지른 쇠기둥이 무너져 몸체를 내놔야 했던 때가 있었다. 낯설지만 시도해보고 싶었던 일, 열심을 내면 잘될 거라 믿고 발을 들였는데 목덜미가 잡혀 이리저리 끌려갔다. 미처 살피고 닦고 돌볼 틈도 없이 몸이 부식되고 마음은 삭아 내렸다. 흥건해진 몸뚱어리에서 녹 파편을 부스럼처럼 뜯어내며 자책하였다. 그때 손 흔들며 안녕을 빌어주던 이웃, 나의 가년스런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 친구, 내 안의 철이 더 이상 문드러지지 않도록 받들고 지지해주었던 동료. 가느다란 철 가닥에 그들이 스며들어 물살을 막아내는 옹골찬 합금강(鋼)을 만든다. 녹슨 고철도 거듭 살 수 있다고 힘써 알려주는 강철망이 사람을 생동하게 한다.
앞으로 발을 내디딘다. 넘어졌던 그 바닥을 짚고 일어서야 나아갈 수 있다. 바람도 잠풍해진 밤, 서로의 몸빛을 환하게 반사하는 도시의 야경이 한결 충만하다. 모두 사람들이 애쓴 몸짓이리라. 완만한 경사로를 성큼성큼 걷다 가파른 계단 앞에 조심스레 멈춘다. 속도를 줄이라는 듯 지지대도 없이 허공길이 꼿꼿하게 서 있다. 능선 너머 둥근 고리 안 벽색(碧色) 하늘로 얼음빛 달이 들어온다. 스테인리스강(鋼)에 달빛이 닿아 은파가 반지랍게 일렁이면 아득한 우주길이 열린다. ‘창백한 푸른 점’이 이러할까. 아름다워 뭉클하였다.
미(美)의 한자를 풀어 본다. 양(羊)을 크게(大) 키우려면 극진히 공을 들여야 하고 그래야 보기도 좋다. 스스로 존재하는 웅장한 자연이 경이로운 감탄이라면 여기 철길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아름다움이 가미되었기에 더욱 벅찬 감동이 아닐까. 철광석이 강철이 되었다가 예술이 되기까지 단계마다 피와 땀이 배어 있을 테다. 그것은 곧 누군가의 인생이리라. 성공한 생만 아름다울 리 없다. 지극했기에 시행착오도 겪는 법이라면 실패나 실수도 괜찮다.
밑으로 내려와 나직한 땅에서 전체를 아울러 본다. 수런대던 음성은 공기 중에 흩어져 어룽거리고 빛을 품은 쇠길 따라 사람들이 별처럼 흐른다. 대지의 신이 삶을 예술처럼 살아보라고 속삭인다. 서그러운 밤, 드디어 스페이스 워크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