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건국되었나? (1/3)
다비드(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의 국기. 그들의 국기에는 고대 다윗왕 시대의 풍요와 영광을 재현하자는
강대한 국가 이념이 담겨 있다. 유태의 경전(구약)은 이스라엘신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라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유태교도들에게 있어 신약과 예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 만약 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국제 군사전문가들에 의해 이 지역에서 불꽃이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되는 극한 갈등의 지역. 세계 3대종교의 최대성지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유태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첨예한 종교 갈등과 함께 원주민 팔레스타인과의 끝없는 대립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의 건국.
2천 년 전, 인류 역사에서 기원전인 B.C(비포 크라이스트)와 서기인 A.D(아노 도미니)의 경계선을 긋게 되는 예수가 태어나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제국을 넓혀가던 로마는 이스라엘을 점령하면서 총독을 배치하고 통치령을 내려 식민지 이스라엘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죠.
하나는 로마에 대한 납세의무를 잘 지킬 것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무력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만 지키면 이스라엘의 종교와 문화는 물론 왕정체제까지도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 로마의 통치 원칙이었습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의 갈릴리 및 페레아의 통치자였던 유대의 왕은 헤로데 안티파스(B.C20년~A.D39년)였습니다. 역사적 기록은 전무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헤로데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 새로운 유대왕이 태어난다는 점성술사들의 말에 왕위찬탈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대 전역에 걸쳐 3세 이하의 남아 대학살에 나서거나 왕비의 간계에 넘어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른 잔혹하고도 우유부단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이스라엘이 믿는 유태교 경전(구약성경)에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수없이 시달리며 사는 유태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메시지가 수없이 담겨 있는데,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30대 젊은이가 군중을 몰고 다니며 하늘나라에 대해 설교하자 유대의 독립 운동가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칭하는 예수와 접촉해 대 로마 무력항쟁에 대한 최고지도자 옹립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하지만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실망스러운 답변만을 들은 유대 임시정부 인사들은 예수를 일축하고 로마를 몰아내 독립을 이루려는 무력항쟁을 준비해 나갑니다.
물론 간헐적으로 로마군을 공격하는 지역적 충돌이 발생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로마군에게 쫓긴 시오니스트(유태 독립군)들이 유태신앙의 상징인 예루살렘성전 안으로만 피하면 로마군은 유태성전 안까지 진입해 검거하는 정치적 갈등은 최대한 피했기에 유태성전은 시오니스트들에게 커다란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것이죠.
대 제사장 가야파를 위시한 유태교 종교권력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린 예수가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흐른 서기 70년, 유태 독립 운동가들은 로마를 몰아내 식민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그동안 축적한 무기와 인원으로 로마군을 공격하며 무력항쟁에 나서지만 수없는 정복전쟁으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로마의 효과적인 군사작전에 밀려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궤멸됩니다.
유태 패잔병들은 살기 위해 예루살렘성전으로 급히 숨어들지만 이번에는 로마군이 성전 안까지 돌격해 모든 관련자들을 색출해 처형한 다음 다시는 무력저항을 꿈꾸지 못하도록 유태교의 정신적 상징인 예루살렘성전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리고 유태반군들이 모여 재정비를 하고 있는 마사다 요새 등을 공격해 모든 무장세력들을 정리합니다. 이 때 약 십만 명의 유대인 포로들이 로마로 끌려가 콜로세움 경기장 건설에 동원되었습니다. 이것이 1차 독립전쟁이죠.
그러나 132년에 스스로 유태인들의 메시아로 자처하던 인물 바르 코크바(Bar Kokhba)가 또다시 로마에 항거하고 나서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강력 진압명령을 내려 결국 135년에 유다인들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잠재웁니다. 게다가 두 차례의 유태독립전쟁 이후 로마가 유태인들을 이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모조리 추방하면서 유태인들이 고향을 잃고 난민으로 전 세계로 떠돌게 되었으니, 이것이 2천년에 이르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작이었습니다.
유태교 의식을 치루기 위해 통곡의 벽에 모인 인파. 성서시대의 예루살렘에는 같은 장소에 세 곳의 성전이 있었다. 제1성전은 솔로몬왕이 세운 솔로몬 성전이다. 이것은 BC 587년경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2성전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 상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의 지휘로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재건축한 스룹바벨 성전이다. 이 성전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제3성전은 유대 왕 헤로데가 폐허가 된 스룹바벨 성전 터 위에 세운 헤로데 성전인데, 이것은 70년 로마군이 파괴하였다. 현재의 ‘통곡(痛哭)의 벽’은 이 제3성전 서쪽 벽의 남은 잔해에 해당한다.
유태인들의 민족적 상징인 예루살렘성전은 기원전 957년 솔로몬 왕이 세우기까지 통일왕국을 유지했으나 솔로몬 사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고 기원전 6세기 경, 남유다를 끝으로 바빌론에 정복당하며 70년간의 노예생활을 시작합니다. 바빌론 포로시기를 거친 후에도 이스라엘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폼페이우스의 로마 등 강국들에게 끊임없이 점령당하고 박해를 받는 동안 파괴와 보수를 반복하며 유태교의 대표적인 성지로 있었던 곳이죠.
두 번의 무력항쟁 실패 후 유태인들은 인종 자체를 말살하려 드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이웃나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맙니다. 유태인들을 추방한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남유다와 시리아 일부를 합쳐 시리아 팔라이스티나 주(Provincia Syria Palaestina)로 명명했기에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건국 이전까지 그 지역의 지명은 팔레스타인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땅은 주변 아랍국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2천년 가까이 살아가게 되지만 공교롭게도 예루살렘은 세계 종교의 3대 성지가 존재하는 곳이기에 역사적으로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뺏고 빼앗기는 성지탈환 전쟁이 끝없이 반복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2천 년 전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유럽 등지에서 수십 대를 이어오며 살아온 유태인들은 유태 경전과 함께 그들의 정신적 지침서인 ‘탈무드’를 가슴에 품고 자식에 그 자식들의 대를 이어 교육하며 본토회복, 즉 이스라엘 독립의 꿈인 시오니즘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유태인 망명자들은 특유의 상술로 대규모의 재산축적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재산축적은 개인의 영달이나 사적 축재가 아닌 오로지 이스라엘의 건국이라는 대승적 가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유태인들이 본토를 회복해 2천 년 동안 이어진 나라 없는 서러움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만한 대규모의 전쟁을 기다렸던 것이죠.
최기만 / 시사칼럼니스트
-다음회에 계속-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거주지.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죄가 있다면 이곳에 태어난 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첫댓글 로마통치기간에도 헤로데왕의 왕위보존을 위한 내분이 무섭네요 유아학살등,지혜로왔다는 솔로몬 왕 사후 나라는 분열되고
팔레스타인이 공동체를 이루며 다른 종교가 하나 더 파생되며 전쟁으로 치닫는 현실입니다 언제 종결되어 그들은 이스라엘 고대 다윗왕의 번영시대를 찾을 수 있을까요 유익한 글을 알리시는 우연샘 휴가기간 수고많으셔요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반 유태주의자입니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가하는
일방적 폭력과 유태인들이 본토회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호전성이 제 마음을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우익 기독교도들이 태극기시위 때 유태기를 듣고 행진하는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인데 유태인들은 피식 웃습니다.
그런 친미 호전적 기독교도들이 뭘 알겠습니까?ㅎ
휴가기간에 조용히 앉아 완성하려고 했는데 조금 못미쳐서 3개로 나누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파레스타인이란 지명은 로마 정복 시절에 생겼고
헤로드 왕이 세살 이하 사내아이의 씨를 말릴만큼 잔인했군요.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희생 치고는 너무 과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세 살바기 이하 아이들의 죽음에 통곡하는 어미들의 울음소리가 온 유대를 덮었다고 하나
이런 대학살 사건이 지배자인 로마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의문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억하지 않는 이유는 실제의 탄생일을 모르는 후대가 멋대로 정한 것이며,
수많은 아기들의 죽음과 연관되어 축하할 날이 아니라서라고 하네요.
성경은 여러 의문점도 참 많이 남는 책인 것 같습니다. 멸망할 나라의 헤로데도 참 한심한 왕이구요.^^
탄탄한 구성과 안목이 놀랍습니다
휴가라 딩글딩글하지 않으시고 머리 싸매시고 글을 완성해 나가시는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덕분에 읽는 저희야 숟가락만 들면 성찬이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휴.. 물렁한 구성과 바깥목이 답답하지요.ㅎ
저라고 딩굴딩굴 안 하고 싶겠습니까? 전부터 이 문제를 한 번 다뤄야지 생각만 하다가
시간이 좀 나서 이제야 쓰게 됐는데 부족하지만 맛있게 드셨다니 저도 감사합니다.ㅎ
카페에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올려야 하는데 재주는 별로고 기술은 없고 고민이 많습니다.
앞으로 종종 역사글 올리겠습니다. 숟가락만 말고 놀부각시 밥주걱도 집어 드소서..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