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1
충북 괴산군 칠성면 숲속 마을에 자리한 숲속의 작은 책방!!!
괴산 산막이 옛길이 있는 미루마을 28호집 부부가 운영하는 가정식 작은 책방 숲속작은도서관!!!
이런 곳이 현실에서도 존재하더군요. 어제 괴산 명덕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이곳까지 같이 오셔서 주인께서 대접해주시는 차도 드시고 담소도 나누시다가 내려가셨습니다. 어제부터 내린 비 때문에 아침 산책이 어렵겠다 싶었는데 웬걸요? 비가 와서 더 좋았답니다. 조팝나무 흰꽃에 맺힌 물방울의 미시적 아름다움은 맑은 날에는 볼 수 없는 진경이었지요.
아침 산책을 마친 뒤에는 두 부부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숲속의 작은 책방 북스테이를 예약해주신 솔내 진영준 선생님이 주인분들께 선물해주신 책 졸저 <오늘 처음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가 눈에 띄어 책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학교 아이들 이야기로 번져간 것입니다.
며칠 전 동료교사 따님의 결혼 피로연참석 차 순천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버스를 타고 학교 근처를 막 지나다가 마침 하교 시간이어서 저랑 카톡을 자주하는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금 학교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내려? 말어?" 당근 내리라고 난리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차에서 내렸는데 버스 승강장에서 다른 세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세 아이들이 저를 보자마자 한 말입니다.
"선생님, 그리웠어요!"
"선생님, 그리웠어요!"
"선생님, 그리웠어요!"
마치 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 같았습니다. 스마트폰 세대의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그립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말이라는 것은 평소 쓰던 버릇대로 나오는 법인데 평소 그립다는 말을 썼을까 싶어서 해본 물음입니다. 그 세 아이 모두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점심시간마다 저랑 산책을 같이 했던 아이들은 저랑 지금도 카톡방에서 수다를 떨면서 그리움을 키워가고 있지만 그 세 아이는 그냥 수업에서 만난 아이들이었지요.
어제 강의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학생들을 생명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냐고, 그냥 관념적으로가 아니고 진짜로 아이들이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냐는 것이었지요. 제가 아이들을 생명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세 단계를 거친 뒤였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학교 쓰레기장 근처에서 눈에 보일똥말똥한 너무나도 작은 노란꽃(꽃이라고하기에는 너무도 작아서 생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한)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지요? "넌 왜피었니?" 그랬더니 그 꽃이 저에게 "그쪽은 왜 피었는데요?"하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시가 <겨우 핀 꽃>입니다.
두번째 사건은 이와 비슷했는데 두 번째 사건을 접한 뒤에도 저는 학생들을 여전히 차별하는 교사였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은데 쪽지상담을 해보면 아이들의 생각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게 된 것은 수업시간에 눈을 맞추고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면서 부터였습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름이 외워졌고 석 달 정도가 지나자 외모나 성품이나 성적과 같은 어떤 조건이 아닌 생명(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었지요.
그런데 이런 경험과 성과들이 이른바 '육불가능의 시대'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인지 요즘 회의가 많이 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자 두 부부께서 약속이나 한 듯이 반색을 하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저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저를 위로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습니다.
평범하디 평범한 아이들을 마치 보석을 대하듯 대하는 것은 사실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저는 한 학부님과 면담하면서 문학적(교육적)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런 얘기를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딸인 민지(가명)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속상하다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것이 싫은 것이었습니다.
"민지가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막대기가 된 거예요. 눈도 코도 입도 가슴도 다리도 없는 막대기 말이에요. 난리가 났지요. 민지 어머니께서요. 그러시겠잖아요. 갑자기 사랑하는 딸이 막대기가 되었는데요. 그래서 민지 어머니께서 간절히 기도를 한 거예요. 제발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달라고요. 그랬더니 기도의 응답이 있었던지 민지의 오른 쪽 눈이 돌아왔어요. 다른 데는 다 막대기인데 오른쪽 눈만 민지인 거예요. 얼마나 반가운지 밤새도록 그 눈과 대화를 했지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또 실망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다시 기도를 했는데 이번에는 왼쪽 눈이 돌아왔어요. 두 눈이 돌아오니까 이제는 완전히 눈으로 대화가 가능해진 거에요. 눈웃음도 칠 줄 알고요. 하지만 또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눈만으로는 만족을 못한 거지요. 그래서 또 기도를 했더니 이번에는 입술과 코와 귀가 한꺼번에 돌아왔어요. 와!! 얼마나 기뻤겠어요? 민지 엄마가요. 안 기쁘시겠어요?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니까 마음이 달라지는 거죠. 얼굴만 민지고 다른 곳은 다 막대기니까 그럴 수밖에요. 그 다음에는 기도의 응답이 없었어요. 그걸로 끝인 거예요. 몇달을 기도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민지 어머니가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눈만 돌아와도 기뻐한다고 해놓고 또 욕심을 부리고 얼굴이 다 돌아왔는데도 또 욕심을 부리셨잖아요. 물론 이해가 가지요. 아직은 온전한 민지가 아니니까요. 그럼 민지가 예전의 모습으로 온전히 돌아와 준다면 민지 어머니는 욕심 부리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세요?"
"당연하지요.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 왔는데 더 이상 뭘 바래요?"
"정말이죠?"
제가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민지 어머니는 현실로 돌아와 저에게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든 모양입니다. 삐식 웃으시면서 저에게 고맙다고 하더군요.
이런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평범함의 대함에 대해서 저는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제가 29년 동안 만난 아이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발음된 이 말이 또한 증거입니다.
"선생님, 그리웠어요!"
첫댓글 오타...'육불가능의 시대'-'교육불가능의 시대'.....'평범함의 대함'에 대하여-'평범함의 위대함'에 대하여... 죄송!!
여우숲도 정말 좋아보이고, 형님의 글도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꾸벅
고맙네 나도 꾸벅^^
아이들 이야기도 아름답고 우화도 재미있고......사진들도 이쁘네요 선생님! 행복이 방울방울~~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으니 민숙씨도 아름답고....내일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