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평회에서 문제되었던 점들을 생각하며 다시 써봤습니다.
전철 안의 에피소드가 너무 장황하고 화자 즉 슬리퍼의 시점이 혼동을 주며 관찰자도 대상과 구별이
안된다는 지적. 무엇보다도 '삼선슬리퍼'가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가 많아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
(처음 삼선슬리퍼나 국민슬리퍼라는 세간의 지칭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재미있었는데 모르시는 분이
많은데 좀 놀랐습니다. 어쨌든 나만 아는 일이 된 셈이어서 새로 쓰며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주제가 명확치 않으며 객관성이 결여되었다는 총평.
고친다고 고쳐 봤는데 문제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한 번 비교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합평을 하게 되면 먼저 카페에 올려 다 읽고 오셔서 합평 결과에 따라 고친 작품을 또 한 번 올려
공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삼선슬리퍼의 외출
이복희
사람들은 나를 ‘삼선슬리퍼’라 부르지. 흔한 슬리퍼에 웬 이름이냐고? 신발 등에 하얀 선이 세 개 그려져 있거든. 처음 삼선(3線)을 생각해 냈을 누군가를 잠깐 떠올려 봤어. 집에서 신는다고 너무 단순한 디자인으로 만들다보니 약간의 포인트를 주고 싶었을까. 어쩌면 허름한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는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몰라.
좀 나아 보이긴 해. 밋밋하고 별 볼일 없는 슬리퍼지만 어떤 생기 같은 게 느껴져.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나를 신고 외출한다는 일은 거의 없지. 잠깐 문밖을 나가야 할 때 말고는.
그런데 그날 나는 전철 안까지 진출을 하게 되었지.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었어. 집에서부터였는지 구둣방에서 부터였는지, 아무튼 우르릉거리는 전철에 올라 나를 신은 여인이 의자에 앉았을 때 나는 알게 되었어. 나란히 앉아있는 사람들도, 서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신발을 신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내심 기가 죽었지. 그것도 사실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어떤 아줌마의 눈길만 아니었으면 아무 생각도 없었을 텐데, 놀란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줌마의 시선이 무척 따갑더군. 오히려 내 신발의 주인인 젊은 여인은 무사태평, 고개를 비틀어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만 안절부절.
가만 보니 그 아줌마의 비상한 관심은 내 주인의 파격 때문인 것 같았어. 말쑥한 정장 차림에 고급스러운 핸드백, 거기다 귓불에서 반짝이는 귀걸이. 그뿐이야? 슬리퍼에 어울리지 않는 스타킹까지.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는데, 아줌마의 염치없는 탐색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았어. 전철만 타면 휴대폰에 코를 박다시피 거북이 목이 되는 대개의 승객들에게는 신경을 꺼도 되었지만 끈질긴 저 아줌마의 눈길이라니….
이래봬도 나 삼선슬리퍼는 국민슬리퍼라고 다들 인정해 준다는 사실, 알고 계시지? 명사 앞에 ‘국민’이 붙으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다 눈치 채셨으리라 믿어. 국민엄마, 국민누나, 국민여동생, 또 뭐 있더라? 아 국민첫사랑. 말하자면 모두가 이견 없이 좋아하는 대상이란 말이지. 허세를 부리려는 건 아니지만 그 시선에 맞서려면 그런 패라도 들고 나올 수밖에.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대중들에게 주는 동질감은 의외로 끈끈한 것 같아. 그래봤자 슬리퍼에 지나지 않지만 언젠가 그렇게 불리는 것을 우연히 알았을 때 싫지 않더군. 사실은 백수나 실업자를 묘사할 때 마다 꼭 나를 등장시켜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시장 신발가게에 가보셨지? 거리에 면한 진열대 가장자리에 빈틈없이 매달려 있는 그것들은 다른 슬리퍼에 비해 가격이 엄청 헐했어. 무슨 소린지 알겠지?
‘국민슬리퍼’라는 호칭에 환호할 생각은 없어. 내 자신을 아니까 사실 잊고 살다가도 꼭 써야 할 때 그것이 없어
낭패를 맛보기 전에는 그의 존재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지. 나, 삼선슬리퍼도 그런 것 같아. 그 점에서 후뚜르 마뚜르 값싸고 손쉬워 편안하게 쓰일 수 있는 내가 좋을 뿐이야. 그런데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으로 여겨지는 하찮은 삼선슬리퍼에게도 멋진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라니…. 우연히 열려 있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보게 되었을 때야.
‘복면가왕’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 생각나시나? 온갖 캐릭터로 얼굴을 가리고 거기에 맞춘 의상을 입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 말하자면 선입견 없이 가창력 하나로 대결을 하는 거야. 가면을 쓰고도 아,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그런데 말이지. 거기서 나와 같은 삼선슬리퍼를 보게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혹시 ‘음악대장’이라고 들어봤나? 엄청난 가창력으로 가왕의 자리를 오래 지켰지. 외모의 화려함은 말할 수도 없었고. 금단추가 반짝이는 장교복에 노란 술이 달린 견장과 깃털모자에 동그랗고 귀여운 가면을 썼던 음악대장. 분장도 멋졌지만 그의 노래에 감동되어 어떤 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군. 연속 아홉 번이나 계속해서 왕위를 지켰으니 대단하고말고.
그런데 그 음악대장이 의외의 적수를 만난 거야. 누구냐고? 가만 있어봐. 설명해줄게. 그가 무대에 나서는 순간, 완전히 허를 찔린 것 같았어. 푸르죽죽한 트레이닝복은 낡고 허름했는데 가면에 그려진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처져 있어 불쌍해 보였지. 헝클어진 더벅머리를 질끈 동여맨 넓적한 머리띠에 쓰인 ‘백수탈출’이라는 검정 글자. 거칠게 갈겨 쓴 것 같지만 필사의 각오 같은 게 서려 있더군. 이쯤이면 그의 신발이 뭐였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삼선슬리퍼를 신은 그의 맨발. 상상이 가는가? 탈출은커녕 대번 탈락하리라 싶어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백수탈출이, 삼선 슬리퍼가 이긴 거야. 그 막강한 음악대장, 모든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그 사람의 왕좌를 빼앗은 거라고. 슬리퍼 두 짝으로 내가 얼마나 신나게 박수를 쳐댔는지 모를 걸. 아니 박족이라고 해야겠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 가사가 그 순간 생각나지 뭐야.
전철 안이 점점 붐비기 시작하네. 나의 그녀는 여전히 다소곳하게 앉아있고 다행히 이제 누구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어. 나도 눈치 보지 않고 좀 쉬면서 ‘백수탈출’ 그 고마운 남자가수를 다시금 떠올려 보았지.
가왕을 노리고 나온 출연자들의 차림새는 모두 얼마나 화려한지 노래야 어떻든 우선 보는 순간 압도당했지. 차림새는 기선제압의 필수 수단 아닌가 싶어. 그런 가운데 홀연 나타난 ‘백수탈출’. 그 네 글자를 보는 순간 왜 가슴 한쪽이 찌릿해지는지. 어쩌면 맨날 집에만 있는 이웃 집 총각이 생각나서 그랬을까.
세상의 모든 백수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게야.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막강한 음악대장을 이길 수 있지 않았나 싶어. 비록 가왕의 자리는 두 번으로 끝났지만 그게 어디야. 덕분에 삼선슬리퍼도 왕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니 전철쯤이야. 하지만 그 일로 내 분수를 잊은 건 아니야. 누구네 집 베란다나 현관에서 졸고 있다 잠깐잠깐 쓰인다 해도 불만은 없어. 왜냐고? 어디에 있던 나는 국민슬리퍼니까.
그래도 말이지, 부스스한 머리에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대낮에 담배나 쏘주 한 병 사러 가는 젊은이들로부터는 버림받아도 좋아. 반짝이는 구두코를 대견해하며 출근길에 오르는 그들을 볼 수만 있다면 절대로 외롭지 않을 거야.
차림새에 맞지 않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그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때 만큼은 누군가의 급한 불을 꺼줄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뭐. 누가 뭐라던 난 그걸로 만족이야.
아, 이건 여담인데 요새는 검정 고무신을 구두처럼 신고 다니는 사람도 있더군. 그런데 예쁘고 자잘한 꽃송이들을 그려 넣었지 뭐야. 삼선슬리퍼에도 그렇게 꽃송이들이 그려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렇다고 뭐 슬리퍼가 아닌 건 아니지만.
첫댓글 글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보다 좋은 답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지요. 합평을 하다보면 다양한 의견이 나옵니다. 요는 필자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는 점이지요. 호평이든, 악평이든 필자가 판단하여 자신의 발전으로 삼으면 성공입니다. <삼선슬리퍼>에도 합평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폈고요. 그점은 필자가 요약하여 제시한 것에서 보입니다. 자기 글의 객관적 독자로 잠시 돌아볼 수 있는 합평 시간, 잘 활용하면 좋은 글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자리에 들고 올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지요. 조금 더 좋은 글을 쓰려는 욕구가 고이면 문을 두드려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