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읽고 토론한 다이렐의 토요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학교 학생은 부보이, 아이반, 엘라이자다. 부보이와 아이반은 엄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르다. 엘라이자는 사촌 여동생이다.
형인 부보이는 아버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부보이 엄마가 그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취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부보이 엄마는 곧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반을 낳았고, 현재 두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 있으므로 둘은 할머니 집에 산다.
부보이는 형이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반의 집에 얹혀사는 것 같은 모양새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반의 아버지가 집에 오면 부보이는 새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새아버지는 아이반에게만 선물을 사다 주고 부보이는 돌아보지 않으므로 부보이는 즉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다.
마음이 불편해진 부보이는 삼촌집에 가서 지내다가 새아버지가 떠나면 다시 돌아오곤 했다. 부모가 있는 아이반이 실세처럼 행동하고, 부보이는 억울해도 하소연할 때가 없다. 그래선지 초등학교 6학년인데도 몸집은 지극히 왜소해서 지금도 내 눈에는 7~8세 소년으로 보인다.
부모가 만든 상황 속에서 두 아이 안에 적지 않은 긴장이 흐르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속 사정을 알았든 몰랐든 주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알아주었다고 한들 달리 방도가 없었을 수도 있다.
엘라이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돈을 벌러 가겠다며 떠난 후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엘라이자의 엄마인 다니엘라는 요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
다이렐이 세 조카들과 함께 살지만 특별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나무랠 일이 아닌 것은 다이렐도 의붓 오빠가 있고, 그들과 별 다르게 살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촌인 존과 안드레와 클라렌스 사이에도 부보이와 아이반처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리저리 금간 유리창 같은 관계가 환경이었으나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은 이웃들도 대체로 형편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깨어진 관계가 대물림되면서 형성된 이른바 ‘문화’인 셈이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그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주님을 만난 우리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을까? 두신 자리에 서서 보이신 일을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대면할 수 있을까? 세미하게 말씀해 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할 수 있을까? 조카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자주 물었으나 그들은 "무엇이 문제냐? 안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우 조금씩 서로를 돌보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제리가 동생들을 돌보고, 폴이 다를리와 조카들을 돌보고, 다렐이 패트릭을 돌보고, 안드레가 클라렌스를 돌보고, 다이렐과 다닐로가 조카들을 돌보는 일이 조금씩 생겨났다. 물론 자발적이 아니라 내가 시켜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욱 밝히 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소망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도록 격려했다. 다리 찢기 하듯,전에 사용한 일이 없는 근육을 사용하는 것처럼 아파하고 귀찮아하고 포기하는 일이 수년을 두고 반복됐다.
"부모가 안 하는 일, 보여준 일이 없는 일을 굳이 왜 우리가 해야 하는가?" 말하지는 않아도 그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복음을 알되 자기만 있고 이웃은 없는 삶이 계속됐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생각이 있을까? 형제 사이에는 있을까?" 자기의 감옥에서 자신도, 자신이 받은 복음도 해방되지 못하는 삶이었다.
6개월 전부터 다이렐이 부보이와 아이반과 엘라이자를 데리고 토요학교를 시작했다. 돌봄을 시작한 것이다. 부모가 없는 세 친구들의 학교 공부를 도우며, 책을 읽고 토론하며, 소감문을 적어보게 했다. 처음 조카들은 이모가 놀아주는 것으로 고마웠는데, 그 학교를 통해 생각하는 것과 관계하는 것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얼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다이렐 자신이었다.
어제 23번째 토요학교를 가진 후 올린 다이렐의 글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기도로 SS를 시작한 후 카인 아벨 이야기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아이반과 부보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둘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부보이와 아이반은 이 책을 통해 서로를 향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들이 책을 통해 얻은 교훈만아니라, 싸웠던 후의 감정을 공유하게 했습니다.
아이반의 소감문입니다: 나인의 나갈리트는 나삭탄의 나삭탄의 나삭트 코시야 아칼라 코웅 우나 오케이 랑 페로 디 코알람 나카사키트 나 팔라 아코.
번역: 나는 쿠야 부보이에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났으며, 그에게 반항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보이의 소감문입니다: 나가리타코, 나왈라 사 사리 나 파르나구스토 코 마나킷. 앙갈리타이 나카카사마 롤라 나쿵 힌디 이토 마콘트롤. 갈리타이 마링 마카사킷의 앙셀로스, 앙갈리타이 마글리드 사틴 파라구마왕 힌디 마간다 사 이바.
번역: 나는 화가 났고 상처를 주고 싶었으며 이성을 잃었습니다. 분노는 조절되지 않으면 해롭습니다. 질투와 분노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질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를 부모의 입장이 되어 그 아이들과 함께 설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부재 가운데 싸우는 모습을 보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주님을 보며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가 아무런 대책없이 떠나버린 뒤, 버림받은 것처럼 뒤에 남겨진 아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아버지시다. 다이렐에게 고아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보는 눈을 여시고 그들을 돌볼 수 있는 아비의 마음과 어미의 마음을 주시는 아버지시다.
자녀 방치 문화가 자리잡은 필리핀의 형편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 많은 다이렐들을 통해 이 땅의 다음 세대들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을 열어주시길 기도한다. 하나의 씨앗이 심어져 싹을 낸 것처럼 이 일이 이미 시작됐음을 보이신 아버지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