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회를 기획하며--------------박 두 규 (순천작가회의 사무국장)
■ 행사 내용
□ 행사 주제 연대시-------------순천작가회의 공동 창작
□ 각 지역 대표 낭송시
찬조시(민영), 부산(박정애), 전북(박성우), 경남(이응인), 충북(김희식)
경북(김만수), 광주(조진태), 대구(이철산), 강원(김창균), 충남(유용주)
울산(오영숙), 제주(김수열), 전남(박관서)
■ 대회 참관기------------------최기우 (전북작가회의 소설가)
■ 선언문----------------------민족문학 지역연대
영호남 문학인 대회를 기획하며
박 두 규 (순천작가회의 사무국장)
제1회 영호남 문학인 대회는 92년에 있었다. 지역감정이 극에 달아 있을 때였고 어느 누구도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구체적 노력이 없을 때 문인들이 선도적으로 그 모범을 보였던 참으로 의미 있는 대회였다. 하지만 이후 민간 차원이나 관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어 버릴 정도로 그 의미나 성과가 약화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호남 문학인 대회가 이제는 새로운 의미 영역을 일궈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남원에서 9회 영호남 문학인 대회를 위해 영호남 7개 지회 사무국장들이 모여 논의를 하였다.
이 모임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논의하였으며 그 첫째가 '주제'였다. 주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 통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 속에서 구체화하기로 하였으며 행사 슬로건은 순천작가회의에 일임하여 『금강산녀 날개옷을 찾아서』로 하였다. 민족문학의 역사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문학인들은 현실 사회에 대한 기여와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으며 현재 남북간의 통일 국면이 새롭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통일 관련 주제를 구체화하여 선언하고, 우리가 앞서서 그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대회 1부에서 대회사와 주제 강연, 연대시, 선언문을 모두 대회 주제로 집중 배치하였으며 각계와 언론 방송에 홍보 선전하였다.
그리고 둘째가 '지역문학 연대'였다. 7개 지회 사무국장들의 한결 같은 의견이 지역의 많은 문인들이 가지고 있는 '중앙'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 불만은 여러 형태로 논의되었으며 하나의 예를 들면 (사)민족문학작가회의가 지역의 독자성을 담보하는 사업과 재정 등을 토대로 '연합체'적 성격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영호남 대회가 천만 원대의 경비를 필요로 하는데 중앙의 지원이 전무하다는 점으로부터 시작됨)와 그로부터 파생된 회비 문제를 둘러싼 분담금 제정 문제, 지역 사업 보조금, 서울 중심의 사업(지방에서는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 기관지 '작가'에 대한 이야기, 조직 대중에 대한 배려가 전무하며, 상층 단위의 일방적 조직 운영, 등등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역문학 연대'가 거론되었다. 그리고 영호남 지회 외의 제주, 강원, 충북, 대전.충남, 인천, 등 전국 지회에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의 '연대' 목적은 연대 형성을 통해 서로 부축이고 의지하며 보다 큰 문단의 밑그림에 기여할 것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파당적 모습이나 분파적 성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전제였다. 함께 가되 발전적으로 기여해야 할 그 무엇을 새롭게 모색하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연대'는 성공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우리는 9회 대회에서 연대의 틀을 구축했으며 차후 그 방향에 대한 진지하고 생산적인 논의가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어렵게 성사된 이 '연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9회 영호남 대회는 위의 두 가지 논의를 구체화 시켜 실천하였으며 각 지역 문인 300 여명이 모인 성공적인 대회였다. 그리고 이러한 9회 대회의 의미는 10회 대회로 확대 재생산되어 이어질 것이며 영호남 외 지역의 적극적인 결합으로 지역문학이 활기를 띄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연대시 (순천작가회의 공동창작)
이제 우리 새로운 새벽을 보아야 하리
- 남녁의 시인에게 북녘의 시인에게 -
평양 순안 공항에 태극 문양의 비행기가 내리고
철문이 열리며 절뚝거리는 사람 하나 걸어나와
북녘 산하를 바라볼 때
그리고 마침내 계단을 내려와
북녘의 또 다른 사내 하나와 껴안을 때
천지신명이여
하늘에 해와 달의 운행을 멈추게 하소서
산과 들에 나무여 풀이여 뛰어 다니는 길짐승이여
날아다니는 새, 물결을 거스르는 지느러미 물고기들이여
해 아래 있는 천하 삼라만상이여
숨을 멈추고 이 순간을 바라보소서
DMZ의 날 선 철조망이여, 대전차 지뢰여
땅 속에 숨어있는 핵탄두 미사일기지여
지구의 궤도를 따라 흘러가는 첩보위성이여
그 모든 무기란 무기에 반짝이는 증오의 눈빛이여 신음소리여
그 앞에 버들강아지처럼 흔들리는
숨 붙어 있는 생명 그 모든 것이여
잠시 숨을 멈추고 이 순간을 바라보라
빨갱이와 미제의 앞잡이라던 이들이 손을 잡는구나
어깨를 껴안는구나 손을 흔드는구나
목 줄기에 칼끝을 들이밀던 두 손이
청천 빛나는 비단강산 천하만물 앞에서
깃발보다도 더 부드럽게 손을 흔드는구나
그래, 삼천리는 아름다웠다.
산자락 돌아가며 연기 피어오르는 마을이 있었고
들에는 어여러 상사소리
우물가에는 길쌈하다가 물 길러 나오는 아낙네들
가난해도 노래 소리 드높고 주려도 함께 주리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그때는 형제가 형제를 적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무작정 원수라며 삿대질하고 죽창질 하고
마을과 산천을 나누고 총을 겨누지는 않았다
삼백만이 죽고 천만가족이 헤어지고
불타는 마을과 도시
삼천리는 두 동강이가 되고
이제는 남의 나라 군대가 진주하여 생명을 보장받는 나라
전쟁의 공포 속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증오의 권력이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눈채
오십년,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흘러가고
해 아래서 모든 것이 아무렇치도 않다는 듯이 흘러갔다
그런데 평양 하늘에 두 손이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다니
영영 닫힌 문 열리지 않고 막아선 절벽 영원할 것 같더니
이대로 너는 너, 나는 나 영원할 것 같더니
한 순간 통곡의 벽 죽음의 벽 그 너머에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다니
감사합니다. 그 어떤 길을 돌아왔건
또 그 어떤 가시밭길이 남아있건
원수의 총구를 내리고 껴안았으니
눈 내리던 빈 들판에서
죽창 하나 들고서 쓰러져간 하얀 잠벵이들이여
북간도에서 사할린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서대문구치소에서 남산 지하실에서 금남로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숱한 영령들이여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지만
구천 떠도는 영들이여 이제 모두 이 땅에 오소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산 첩첩 물 첩첩
아직 우리 가야할 길 멀다지만
길이란 모든 길 위에 피어나는 구절초처럼
이제 우리 꽃피는 산천 이룰 터이니
가슴 속에 철대문을 걸어 잠그고
탐욕과 부패한 세월을 용인했던 우리
제 배 하나 채우며
자가용을 사고 아파트를 늘리면서
반쪽 북녘의 배고픔과 공포를 외면했던 우리
그대의 오십평 아파트는 건재한가
그대의 자가용은 건재한가
그렇게는 안되네
이대로는 갈 수 없네
남녁의 시인들이여 형제여
우리 이대로는 갈 수 없네
아메리카 물신주의 우상을 들고는
파시스트의 살상과 증오의 눈초리를 가지고는
비겁한 이기주의로 뒤뚱거리는 비게 낀 몸으로는
더는 새로운 땅 나아갈 수 없네
우리 이제
태양신에게 자신을 바치려 나아가는 잉카 고원의 처녀처럼
순결한 맨발로
학살을 방관했던 비겁함을 자복하고
물욕에 어두었던 탐욕을 떨어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하네
남녁에서 북녘에서
사랑하고 슬퍼하는 사람의 일로
가슴 아퍼하고 괴로워하며 시를 쓰는 시인들이여
이제 우리 거세게 몰려오는 시대의 광풍에 맞서야 하네
작은 조개껍질 속에서의 안일을 떨치고
거대한 물결로 밀려오는 소용돌이에 맞서야 하네
더 이상 우리 영혼의 부패와 탐욕을 인정해서는 안되네
더 빠르게 더 편하게 더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끝 없는 인간의 탐욕 앞에서
더 이상 분별 없이 따라가서는 안되네
시인은 시인의 나라를 만들어야 하네
영혼이 빛나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하네
우리의 나라는 총으로 만든 나라 대포로 만든 나라가 아니라네
우리의 나라는 GNP로 높아가는 빌딩의 수로
늘어나는 자동차 대수로 계산되는 나라가 아니라네
죽어가버린 숲, 죽어가버린 시내, 죽어가버린 숱한 생명들
그 영혼의 지느러미로 만들어진 것이라네
돌아오지 않는 새들의 영혼을 다시 불러오는 일이라네
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노래와 함께 밝아오는
그런 새벽을 맞는 일이라네
그런 시의 나라를 만드는 일이라네
거기에는 더 이상 이념의 총칼이 없고
거기에는 더 이상 강자들만의 성채가 없고
국경을 가리지 않고
강한 것들 약한 것들
모두 해 아래서 웃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이루는 일이라네
남녁의 시인이여
북녘의 시인이여
이제 우리
깊은 영혼의 이슬을 안고
보라빛 꽃투리를 들어올리는 도라지 꽃처럼
순결한 새벽을 보아야 하네
우리의 만남은
그런 새로운 시작의 첫걸음이어야 하네
평양 하늘에 깃발처럼 흔들리던 그 두 손은
삼천리 비단강산을 빗질하는 가을날의 억새꽃처럼
눈부신 생명을 새롭게 빗어내는
우리 모두의 손길이어야 하네
우리 그런 시의 나라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하네
(찬조시)
추석날 고향에 가서
민영
들국화 핀
골짜기 길을 오르다가
구멍 뚫린 철모 하나를 보았다.
총소리와 함성이 뒤섞이던
오십년전 그 날
이 철모의 임자는 쓰러졌을까?
(술 한잔을 그 아래 부어 놓고 가
을 제사를 지낸다)
이름없이 죽은 전사의 넋이여,
그대가 어느 편 사람이었든
상관하지 않으마!
아, 가을 빛 짙은 철원 평야
억새풀 흐느끼는 옛 싸움터에
오늘은 국경없는 바람이 분다.
약력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현대문학」으로 등단/시집 「斷章」「냉이를 캐며」
「엉겅퀴꽃」「바람부는 날」등이 있음/제6회 만해문학상 수상
(부산작가회의)
낙동강
―뒷기미나루
박정애
찰기 없고 근기도 없는 깡보리밥 쉬 넘어갈리 없겠지만 어쩌다 국수를 해 먹은 날은 비가 왔다
바람이 넘나들면 다 보고 난 꽃이며 잎을 지우던 손, 낫이 되기도 하고 칼 작두 쇠스랑 호밋곶이 되던 손길들 즐거이 한 생 어루만지다 놓아둔 곳
압력에 짓눌려 억장같이 드러눕던 원근의 산, 세상 밖으로 저무는 생의 막장 한 모서리 밝히고 선 해, 소화기를 거쳐 잘 걸러진 들똥 한 무더기 누고 일어서는 저 건장한 어깨
고소하고 덜큰한 밥 냄새가 났다
간혹 똑 떨어진 별똥을 삼켰던지 개소리 맑은 밤, 달빛 용케 옷자락 한 번 안 적시고 강 허리 훌쩍 건너 밟고 산 위에서면 내 등 어깨가 다 서늘했다
달빛으로 내장이 환해진 들길을 따라 졸래졸래 꼬리치는 바람의 발자국소리 등에 업힌 아이 발도 시리었다
입안에 든 말의 알맹이 오랫동안 녹여 삼키고 새벽 닭소리 긴 횃날 끝에 박꽃으로 피었다가
염천 땡볕이 땀 절은 등에 금빛 활촉 작살을 쳐도 한 오백년 넘게 그 자리서
질기디 질긴 인연의 무명베 한 필 목에 메었다
시퍼런 날 끝이 펄펄 살아 꿈틀거리는 그 손끝에 내 청춘의 검은 머릿채 맡기고
약력
부산출생/9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개운포에서」「호박이 굴렀다」등이 있음/민족문학작가회의 부산지회 이사
(전북작가회의)
새
- 박성우 -
공중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새가 있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지나온 흔적을 뒤돌아 보며 나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하늘에 발자국이 찍혀지지 않을 땐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난다
마지막 솜털까지 뽑아 낸 뒤엔
사람의 눈으로 추락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내가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른다
저 하늘의 새털구름,
그 새의 흔적이다
약력
1972년 익산 출생/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현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 조교
<경남작가회의>
은행나무에 대한 기억
이 응 인
삼문동 소방서에서 세광아파트로 이어지는 큰길가에는 은행나무들이 마주보고 줄을 서 있
습니다. 황금빛 발자국 다 지워진 어느날 은행나무는 사라졌습니다. 군인들이 동네사람들
을 불러 모았습니다. 뭔 일 났느냐고 아이들 손 잡고, 업고 산골짜기에 들어서자 요란한 총성. 끝이었습니다. 걸음 떼 놓는 곳마다 은행나무 쓰러진 육신들입니다. 아름드리 생의 마감. 보도연맹원들 교회로 모았습니다. 문 닫히자 깜깜한 세상. 다시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토막난 은행나무의 손, 얼굴, 기억들. 농협 앞에도, 주공아파트 길가에도, 문집 앞에도. 미군
조종사는 굴다리 아래 목표물을 발견했습니다. 버턴을 누르는 순간 물동이도 지게도 날아가
버렸습니다. 다릿발에 꺼멓게 멍든 상처만 남았습니다. 은행나무의 그루터기와 뿌리만 남았습니다. 단 하루만에 사라진 은행나무들.
이 기억을 잊는데 300년이면 될까.
약력
1962년 경남 거창 출생
시집「투명한 얼음장」「따뜻한 곳」
<충북작가회의>
땅의 노래
김 희 식
땅은
하늘이다 밥이다
죽음만이 땅을 기고
쓰라린 눈물만이 이리저리 고여있는
너! 분노의 땅 통곡의 땅 한반도여!
그 옛날
고구려의 광활한 땅과 하늘
그 하늘 아래서 춤추고 노래부르며
땅의 지혜를 배우던
기마의 자손들아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무너지게
하였는가
아, 식민지의 땅이여
갈라짐의 그 쓰라린 바람이여!
외세와 매판의 남쪽을 증오한다.
아아 피 흐르는 조국이여
신라의 후손으로 살고 있음을 부끄럽게
여기거라
그리고 일어서라
피만이 흐르고 증오만이 타오르는
압제의 땅, 한반도를 딛고 일어서라
일어서 큰칼을 갈아라
칼을 들어 하늘을 쳐라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아라
검은 피가 콸콸 쏱아
온 땅을 흥건히 적신 후
그 핏물진 한반도에 기를 꽂아라
해방의 깃발
서로의 죽임이 없고 억압이 없는
남과 북이 함께 어우러진 그 깃발
영웅이 주고 이데올로기도 죽은
그 아침 통일의 깃발을
일어서라 땅아!
이제는 일어서 새벽을 찾아 나서라
땅은
하늘이다 밥이다
우리들의 영원한 어머니시다
이웃집 털보아저씨네 이쁜이 사라 압델 하크가
신전(神殿) 언덕을 열린 창틀로 밖을 내다보다
젖니를 다 갈지 못하고 바람으로 가버린 마을 뒤로
족장들과 랍비들, 내 잠시 깃들었던 얇은
집을 메고 가며 울겠지
씨엔엔 혹은 프랑스티브이 카메라 앞에서 분노하겠지
더반처럼 칭칭 감기는 세상의
율법과 정의와 밥을 위하여
무화과 언덕 너머 자욱히 먼지가 일면
성소(聖所) 높이 날아올라 방공호로 나를 밀어 넣어주던
날개 어린 매 모세가 보고 싶다
욤 키푸르.
*.욤 키푸르: '속죄의 날'이라는 뜻으로 유대교 최대의 명절. 새해 첫날부터 열흘동안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성스로운 기간이다.
약력
1955년 포항 출생/「실천문학」으로 등단/시집「소리내기」
「햇빛은 굴절되어도 따뜻하다」/ 현 대동고등학교 근무
<광주작가회의>
시대의 말뚝에 대하여
조 진 태
우리가 가고자하는 길을 미리 말하지 말라
이미 세상은 다 알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서둘러서 묻지 말라
이미 그대들이 모두 알고 있지 않는가
한번의 풋사랑으로 인간의 영혼을 다 알아버렸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한순간의 격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인간의 가슴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으리라
심장을 파먹히고도 끝끝내 되돌아서서 올라야 할 거대한 산이 없었더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올라야 할 산이 없었더라면
시지프스는 없었으리라
인간의 신화는 한갓 에피소드에 불과하였으리라
농부의 들판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피투성이 황혼을 바라보며 흥겹게 노래하는 사람
밤과 밤이 아닌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희부연한 새벽, 별빛과 달의 풍경을 꽃이라고 말하는 사람 누구인가
화려한 성찬식을 기웃거리며
지켜야 할 인간의 존엄마저도 초라해져버린 날들의 새벽은
다만 회색 빛, 그러므로 다가올 아침에 대해 누구 한 사람 말하지 않는
한 점 별빛은 흘러 이슬이 된다
초록 싱싱한 풀잎은 저 이슬 때문,
풀잎은 반짝거리는 꽃이 되겠지
화사한 이 가을의 꽃은 저 푸르른 하늘, 쏟아져내리는 햇살 때문
눈물을 얘기하나 슬픔을 모르는 많은 수다꾼들에게서
슬픔을 얘기하나 생존의 고통을 모르는 숱한 서정시인들에게서
고통을 얘기하지만 인간의 절망을 모르며,
그리움을 얘기하지만 수도 없이 밤을 새운 기다림의 날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하는 가족과 낡은 식탁에 앉아 나누는 장엄한 평화,
한 점 풀꽃이 되어 이 지상의 아름다움을 노래 부를 수 있음을
어찌 다 기대할 수 있겠는가
타올랐으나 잿더미가 되어버린 길을 따라
지나간 시대 우리의 누군가가 불렀을 노래,
다가올 시대 우리의 누군가는 하염없이 부르며
잿더미 속에 뿌리내린 그 하얀 풀잎 이파리 노란 꽃무리
타올랐으나 바람이 되어버린 저 산 하염없이 넘나들며
나무가 되어 나무숲에 깃드는 산새가 되어
누군가 맞장구치며 따라 노래부르며
홍수 진 강물을 따라 흐르다가 문득 아득히 제 혼자서
떠내려가는 살림살이 하나 둘씩 손 붙잡아 어깨 껴안는 말뚝으로
좋지 않은 소문에도 휘둘려 난데없이 펄럭이다가도 제 혼자서
바람에 손 내밀어 잔잔한 물결 만드는,
그렇게 누군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
애써 노래하지 않을 뿐
그러므로 이미 우리가 지나 온 길과 지나가야 길에 대해서
애써 말하려 하지 않을 뿐
지금은 다만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와 벗하여 잿더미 길을 걸어갈 따름이다
* 약력
1959년생/ 시무크지 [민중시 1집]으로 등단
시집 [다시 새벽길]
<대구작가회의>
낡은 기차
이 철 산
낡은 것들이 가차없이 폐기처분 되었다 어떤 가치도 낡았다는 혐의 앞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기차가 그랬다 거침없었던 과거의 속도 때문이었다 어제까지 안락하게 기차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이 기차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부당하지만 낡은 것들에 치를 떨었던 세상에서 선의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사실 낡은 것의 잣대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임을 나는 안다 속도가 세상 헛된 관심이 되면서부터 만족스러운 속도를 증명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퇴출 되었다 일방적인 질주 앞에서 평등한 관계란 부질없는 희망인지 모른다 선천적으로 속도에 적응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먼저 낡은 기차가 되었다 노동자 철학이 그랬다 노동자 문화가 그랬다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이 낡은 세상에 대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비극적인 과거를 감당해야 했다 이제 사람들은 기차를 버렸듯이 노동자를 버렸고 분배의 철학마저 버릴 것이다 이 좋은 세상에 노동자라니! 사람들은 서둘러 과거 속에서 떠났다 이제 과거라고 불러줄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세상이다 사람들이 떠난 작은 역에서 나는 오늘 낡은 기차에 몸을 싣는다 어차피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낡고 버려지는 편에 나는 서고 싶은 것이다 주목하지는 않는 낡은 기차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분명 세상 한 쪽을 지킬 것이다 그 한 쪽 세상이야말로 평등한 관계가 살아있는 유일한 과거임을 나는 안다
약력
1966년 대구 출생
제 6 회 전태일문학상 시부문 가작
<강원작가회의>
그 강에는 氷魚가 산다
김 창 균
그 강에는 빙어가 산다.
떼지어서떼지어서
속이 환한 빙어가
겉과 속의 경계를 무너뜨린
아니, 애초부터 겉과 속의 경계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
인제, 겨울강에 가면
무너진 경계와 경계 사이를
꽃 피우며
빙어들이 산다.
이제, 이 땅은 너무 시시하다는 듯
추운 곳에서 더 추운 곳으로
머리를 쳐박으며
인제, 겨울강에는
빙어같은
사람이 산다.
약력
1966년 강원도 평창 출생 <심상> 신인상 수상
민족문학작가회의 강원지회 사무국장
<충남작가회의>
조개눈과 화등잔
유 용 주
여기 서해에는 바람아래나 파도리 어은들 같은 아주 작고 포근한 바닷가 마을이 많은데요 간 기가 푹 베인 어리굴젓이나 게장처럼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짭조름한 이야기가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지요 밭고개에 사는 조개눈과 화등잔도 평생을 갯바닥과 간사지 땅을 부쳐먹고 살아온 흙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이 양반들이 젊었을 때 농사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농한기에는 샘을 파서 먹고 살았는데, 아 그때야 지금처럼 좋은 기계도 없었고 순전히 삽으로 땅을 파서 도르래로 끌어올리고 난 뒤 노깡을 묻는 것으로 인근 동네에 우물이란 우물은 모두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 그런 대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기도 했다구요 화등잔이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흙을 퍼서 담아 놓으면 조개눈이 마치 불알 터진 이처럼 허이나 흐이나 잡아당겨 이틀 할 일을 보통 사나흘로 늘려 주인 쪽에서 보자면 참 속터진 일도 많았겠지만 막걸리 두어 되 더 사는 걸로 웃고 넘어갔다고 해요 그러나 저러나 화등잔도 나이가 들어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집안 고모 되시는 분이 중매를 서 얼굴도 모르는 신부와 초례를 치른 다음 첫날밤을 맞게 되었는데 조개눈과 달리 괄괄한 화등잔이 아무리 삽을 들이대도 새암을 못 찾는 거라 구멍 뚫고 이슥토록 침을 삼킨 마실꾼들도 거의 돌아간 뒤까지 온갖 방법을 다 찾던 화등잔이 그만 뒷문을 뻥 차고 나오면서 고자다 고자여 속았구나 속았어 큰소리를 쳤다는 구만 동네 시암을 있는 대로 다 팠는데 어찌 자기 마누라 시암을 파지 못했을꼬 이튿날 시엄씨와 중매를 섰던 고모가 둘러앉은 방에서 신부의 옷을 벗겨 놓고 소위 제품 검사를 했는데 거 숲도 무성하고 계곡도 깊어 물 나오는데는 아무 이상이 없는 거라 시엄씨가 엉덩이를 높이 들거라 고개를 잔뜩 꼬아 마지막 검사를 하고서 윗구멍 아랫구멍 제대로 뚫렸고 아무 이상이 없구먼 최종 판정을 내렸다 이 말씀이야 하기사 아무리 눈구멍이 얼굴 반을 차지하고도 남는다는 화등잔이지만 껌껌한 방에서 그것도 숫총각이 숫처녀의 새암을 찾기가 어디 쉽기야 했겠는가 그 말을 듣고 조개눈이 거 부사리처럼 성질만 급해서 원 늘상 불알 터진 벼룩처럼 천천히 파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한바탕 웃고 말았지요 지금 화등잔 양반 아들 셋에 딸 다섯 팽팽히 퍼올려 놓고 세상 좋아진 탓에 샘파는 일 벌써 정리해고 당했다고 궁시렁 꼼지락 고샅길을 휘휘
약력
1960년 전북 장수 출생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제 15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시집『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
<울산작가회의>
땡 감
오 영 숙
아버지는 올해도 고향집 감나무에
푸른 땡감을 보내주신다.
땡감은 아버지의 삶의 방식
땡감의 떫은 맛을 본 자만이
홍시의 달콤함에 감사할 수 있다며
감이 열리는 초가을이 오면
어린 우리 육남매에게 늘 땡감을 먹이셨다.
그러나 우리는 땡감 한 입에 온 얼굴을 찡그리며
입안의 떫은 맛을 덜어내기 위해
생소금 한 줌을 집어 삼키며
하루 빨리 감이 붉게 익길 기다렸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늘 그랬다.
감이 익듯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기다리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성급함으로 유년의 숙제장을 채워 나갈때면
천천히 바를 正자를 쓰게 하시던 아버지
푸른 땡감의 시절을 보내고
잘 익은 감빛으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고
이젠, 대청마루에 초상화로 남은 아버지
아버지가 남긴 여섯그루의 감나무는
저마다의 마당에 뿌리내려 알알이 영글었는데
내 生에는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의 과즙이
가장 빛나는 무늬로 남았다
아직도 가을이 오면 걱정이 되시는가
아버지는 올해도 고향집 마당 감나무에
푸른 땡감을 보내주신다.
약력
「현대시학」으로 등단
<제주작가회의>
겨울산행
김 수 열
겨울산을 오른다
산그늘 머문 곳엔 바람결 따라
숫눈 고요하고 한 때 푸르르던
그래서 더욱 눈부시던 산은
잎 하나 키우지 못한 채
오래된 주검마냥 괴괴하다
발자국소리에 눈길을 주며
허청허청 산을 오른다
얼마큼 지났을까
되돌아보면 이미 어중간하고
남는 길 가늠하자니
저리도 감감한 겨울산행
발길 동여매는 눈발을 헤치고
마침내 산머리에 서면
하늘 가득 눈바람소리뿐
겨울산을 내려오면서
산 아래 누워있는 산들을 보면서
그제서야 가슴 아리게 깨닫는다
겨우내 눈바람을 인내한 저 산들이
머잖아 숨결 다듬어 언 살을 녹이고
숫눈 속에 여린 새순 틔워낸다는 것을
이 골 저 골 물 맑은 소리로
이 산 저 산 온통 푸르름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약력
1959년 제주 생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디에 선들 어떠랴』
<전남작가회의>
간이역 소식 2
- 10월에
박 관 서
햇살 내린다
부주산 키 큰 어깨죽지를 타고 넘어
간신히 당도한 가을햇살 그득히 -
산자락에 묻혀있는 간이역을 적신다
잦아든 풀벌레 새들의 울음소리
기진 한 바람의 옷소매도 잡아끌어
양지 바른 처마 밑 신호대 아래
일렬로 널어 둔 노란 장화와 겨울 털모자
구두 한 켤레에 양쪽 신발 안창에까지
쪽, 쪽, 입을 맞춘다 갈 길이 멀어
천천히, 깊이, 송별을 하는 연인처럼
옆으로 좀 삐딱히 나선 왼발 안창은
끌어들여 줄을 맞추고 겉만 죽죽 마른
겨울 털모자는 홀랑 까뒤집어 말없이
젖어있던 기다림을 내비친다 세월은
그렇게 만만히 흐르는 게 아니라고
호주머니 가득 채워뒀던 속살 탱탱한
봉숭아 금송화 해바라기 씨알들 한 마장을
역사 뒤꼍 그늘진 곳 푸대 위에 부려놓고
어느덧 문고리 올린 창살을 두드린다
쏟아져 들어오는 순금 햇살 가득히
눈이 부시다
* 박관서 :
「문학」지 등단/ 제7회 윤상원문학상을 수상/
시집 「철도원 일기」 현 호남선 임성리역 근무
선 언 문
-제9회 영·호남 문학인대회를 개최하며
새로운 세기의 문이 열림과 함께 성사된 6·15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에 예상치 못한 지각변동을 불러오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던 이산가족들은 밤잠을 설쳐야 했고 마침내 만남으로 이어진 상봉장은 다시금 우리의 민족이 하나였음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뒤이어 발표된 경의선 복구는 3,900여 개의 지뢰를 제거하느라 여념이 없다.
민족문학이라는 깃발 아래 몸을 두고 있는 우리는 여기서 꼭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현재 제거작업이 한창인 그 지뢰가 단순히 무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단의 철조망이 허리였다면 지뢰는 우리의 발목을 잡아온 족쇄였다. 이에 우리는 마지막 남은 머리를 제거하고자 다시금 펜을 들어야겠다.
팔십년대 이후 미국은 이 땅에서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우리의 펜은 이미 녹슬어버렸으며 그로 인해 인권유린은 물론이고 한 국가의 발언권마저 묵살해버렸다. 특히 미군의 범죄행위에 대해 그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불평등한 한미협정은 우리에게 또 다른 족쇄로 남아 있다.
그리고 IMF 한파로 불어닥친 경제난은 두 해가 넘도록 우리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 이미 수많은 실직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려야 했고 두 해가 지난 지금에까지도 그 칼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그렇다면 너나없이 깃발을 흔들어댄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가 낳은 건 치유할 수 없는 빈부의 격차였으며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하에 생산된 건 수많은 실직자들뿐이었다.
우리 영·호남 문학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그 동안 걸어온 길을 겸허한 자세로 돌아봐야 할 때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길거리로 내몰릴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으며, 북녘의 아이들이 주린 배를 부둥켜안고 죽어갈 때 양심의 펜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었던가. 수도권을 축으로 한 중앙문단은 이미 문화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은 지 오래이고 문학을 문학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위험수위에까지 도달해 있다. 또한 현실을 외면한 창작자와 작품은 그럴싸한 포장지로 포장되어 언론의 눈치나 보고 있으며 우리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이다.
선거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동서간의 이질감은 우리들의 숱한 노력과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이 극에 달해 있으며 이를 치유하고자하는 문학인의 결연한 자세와 글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다. 참으로 정치적인 모습이거나 방관자적인 시각뿐이다. 이에 영·호남 문학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적극적인 자세와 합리적인 사고로 대처를 해야겠다. 동서간의 화합을 이루지 못한 통일은 그 시련이 몫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 동안 우리는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의 염원을 잊은 적이 없다. 또한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결단코 외면하지 않았다. 자유실천문인협회를 태동으로 잔혹한 독재와 맞서왔고, 반공을 국시로 삼아온 자들과는 그 어떤 타협도 있을 수가 없었으며, 민족의 자주통일에 걸림돌이 되어온 국가보안법과 반미(反美)에도 실천을 앞세운 펜으로 이를 거부해왔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금 그 기억들을 되살리고 뼈아프게 받아들여 이 땅의 문예일꾼으로서 부끄럼이 없어야겠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영·호남 민족문학인들은 이와 때를 맞추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겨레의 숙원인 민족통일은 반드시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성사되어야 한다.
둘째, 그 어떤 수구세력의 도전에도 당당히 맞서 경의선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하며 민족통일을 가로막아온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셋째, 불평등한 한미협정은 어떠한 경우라도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
넷째, 동서간의 이질감을 조성하는 세력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영·호남 문학인의 일치단결로 맞서야 한다.
다섯째, 자본의 논리에 끌려다니며 부익부 빈익빈의 문학을 낳고 있는 작가와 작품들은 단호히 퇴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