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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곧 화두가 된 것입니다.
2. 「이뭣고?」라는 한마디가 시의 중심입니다
이뭣고?
선불교의 대표적인 화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혹은 더 깊게는,
‘나는 무엇인가?’
‘이 고통은 무엇인가?’
‘이 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철학자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몸의 닦달에
속절없이 앓았다.
이것은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몸의 닦달’이라는 말에는 유머도 있고 철학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몸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면 반대가 됩니다.
몸이 인간을 닦달합니다.
아프라고 하면 아파야 하고, 누우라고 하면 누워야 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 순간 인간의 자존심과 의지는 무력해집니다.
3. 이 시의 가장 큰 성취는 ‘고통이 화두를 풀었다’는 역설입니다
마지막 연이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삼칠일
바닥을 헤매니
제풀에 화두가 풀렸다.
아주 재미있고도 깊은 결말입니다.
보통 화두는 수행을 통해 풀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참선하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비우며 깨달음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대상포진으로 앓아누워 바닥을 헤매다가 화두가 풀립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역설입니다.
깨달으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고통이 깨닫게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화두를 붙잡았던 ‘나’가 고통 속에서 무너져 버리자
화두도 저절로 풀려 버렸다
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4. ‘제풀에’라는 말이 특히 좋습니다
제풀에 화두가 풀렸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마침내 화두가 풀렸다
라고 했다면 너무 근엄하고 진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풀에
라고 하면서 시가 갑자기 인간적으로 변합니다.
고통스럽게 앓아놓고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거창하게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앓고 나니, 뭐 별것도 아니더라.”
하는 식의 탈력감과 유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선문답처럼 근엄하면서도 웃음이 있는 시가 됩니다.
5. 「삼칠일」이라는 시간이 효과적입니다
삼칠일
바닥을 헤매니
‘21일’이라고 하지 않고 ‘삼칠일’이라고 한 것은 좋습니다.
불교적인 ‘화두’와 어울리는 시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닥을 헤매니’라는 말도 단순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는 뜻 이상입니다.
인간이 고통을 겪으면 삶의 바닥을 경험합니다.
그 바닥에서야 비로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바닥’은
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습니다.
6. 이 시는 결국 ‘몸이 철학자보다 먼저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머리로 붙잡고 있던 화두를 몸이 대신 풀어준 시
입니다.
인간은 머리로 삶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진실은 생각해서 알 수 없습니다.
아파 봐야 알고, 잃어 봐야 알고, 죽음 가까이 가 봐야 알게 됩니다.
이 시에서 대상포진은 단순한 질병이 아닙니다.
존재를 깨우는 스승이 됩니다.
그 스승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통렬히 찾아오고
몸을 닦달하고
바닥을 헤매게 합니다.
그러나 결국 화두를 풀어 줍니다.
7. 다만 한 가지 검토할 부분
느닷없이
화두 하나
통렬히 찾아왔다.
여기서 ‘느닷없이’와 ‘통렬히’는 모두 강한 부사적 역할을 합니다. 짧은 시인 만큼 약간의 어휘 집중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문제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느닷없이’는 예고 없는 발병을,
‘통렬히’는 대상포진의 통증을 나타내므로 서로 역할이 다릅니다.
오히려 병의 성격을 정확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종합 평가
「대상포진」은 예고 없이 찾아온 육체의 통증을 불교의 화두로 받아들이고, 21일간의 처절한 고통 끝에 오히려 존재의 질문 하나가 저절로 풀려 버리는 과정을 역설과 해학으로 담아낸 짧고 강한 시입니다.
이 시의 가장 큰 장점은 병을 비극적으로 신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통은 분명 통렬하지만, 시인은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제풀에 화두가 풀렸다
라고 가볍게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깊이가 생깁니다.
한 줄 평을 한다면,
「대상포진」은 머리로 풀지 못하던 존재의 화두를 몸의 통렬한 고통이 대신 풀어버린 과정을, 선적(禪的) 역설과 인간적인 해학으로 압축해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은 「저 초록빛」처럼 짧은 시의 압축력이 좋고, 「한 잔의 가을」처럼 하나의 중심 은유가 끝까지 유지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