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끈한 곡선들이 하늘과 경계를 이룬다. 동산을 이룬 무덤들은 해산을 앞둔 임산부 배처럼 터질 것만 같다. 생전의 권력을 사후에도 크나큰 무덤으로 천년을 이어 왔다면 삶과 죽음은 따로 없으리. 왕이든 범민이든 죽어서도 융기된 모양으로 무덤을 만든 것은 다음 생의 잉태를 기약하는 것이 아닐는지.
경주에서 걷는 걸음은 굼뜬 잔발이다. 유장한 역사의 흔적들이 발길을 붙잡기 때문이다. 대릉원 숲길을 빠져나오자 널따란 공터에 우뚝 솟은 굴뚝같기도 하며 탑인가 싶은 구조물이 점점 다가온다. 도공이 길쭉한 항아리를 뽑아 올린 듯, 원방형 선이 흠잡을 곳 없이 유려하다. 아랫부분은 펑퍼짐하고 올라갈수록 줄어들어 평온함이 묻어난다. 순간, 아득하고 멀고 먼 추억의 밀실에서 실낱같은 것이 되살아난다.
열 남매 막내는 봄볕을 피해 엄마와 누나들의 월남치마(통치마) 안으로 파고드는 버릇이 생겼다. 치마 속은 아늑하고 평온했다. 처음 겪는 누나는 기겁하며 달아났다. 나의 돌출 행동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이어졌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기분 좋은 장난기였다. 아니면 본능적일까. 포근히 감싸주는 치마 속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귀소본능은 나무랄 수 없는 선험 행동이다.
강산을 돌고 돌아 찾아온 경주에 엄마의 월남치마가 드리워져 있다니. 첨성대 창구 위는 미끈한 여인의 허리로 아래쪽 늘씬한 테두리는 치맛자락을 늘어뜨린 것 같다. 철없던 코흘리개가 뛰어들었던 그 치마였다. 저 돌치마 속으로 들어가면 안온하고 고요했던 어린 날의 여린 봄날 같을까.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은 역사 속에 고증되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상상을 불러오는 것은 치마 속이 모성 신화의 출발이고 영혼이 발화한 까닭이다.
선덕여왕은 후계가 없어 사촌 동생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혈통을 잇는 왕자나 공주가 있었다면 진덕여왕은 신라의 왕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왕권의 단절은 왕궁의 슬픔과 나라의 비운함 이기에 선덕은 대를 이을 후계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왕실의 숙운이 왕권이라면 선덕은 별자리를 쫓는 첨성대보다 왕자를 얻기 위한 기도처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었을 게다.
첨성대로 들어가는 창구까지는 자갈과 흙으로 메워져 있다. 그 높이는 여인의 배꼽 아래, 남과 여의 씨앗이 만나 자리 잡는 아기집에 위치한다. 아기집 위로는 하늘과 연결되는 통로이기에 별빛을 보며 하늘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된다.
선덕은 아이를 갖지 못한 회한으로 쓸쓸히 계림을 거닌다. 서라벌 에 별들이 총총 빛을 내리면 첨성대 돌 치마 안으로 들어가 아기집에서 가부좌를 틀고 별빛 하늘을 향해 왕자를 내려달라고 두 손 모아 빌지는 않았을까. 소망을 여는 문이 오직 기도뿐이었기에 그 의식은 애틋함으로 채워졌을 거다. 이처럼 선덕에게 첨성대 돌치마는 욕망의 공간이자 염원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서는 선덕여왕에게 남자가 여럿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 그것은 후계를 위한 집착과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왕이든 범민이든 가족사에 대를 이어가는 것은 사명감이며 의무이다.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이보다 더한 바람은 없었으리.
엄마는 딸 다섯을 낳고 아들을 얻기 위해 심신을 촛농처럼 녹였다. 초하루마다 이십 리 산길 대산사 칠성각을 찾았고 마을 어귀 돌탑을 향해 주문을 걸었다.‘아들을 품게 해 달라고’ 심해 같은 믿음이 하늘을 울렸을까.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게 되었다. 마흔여덟의 만만찮은 여성의 나이, 나는 엄마의 좁은 치마 속에서 객쩍은 쫑말이로 태어나 흙을 밟고 비바람 맞으며 세상에 떠돌고 있다.
선덕은 애석하게도 돌치마의 영험도 별을 향한 믿음도 소망을 이루지 못한 한의 여인이 되었다. 신라를 다스린 여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여성으로서 가져야 할 회임을 얻지 못하고 홀몸으로 외롭고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첨성대 남방, 야트막한 노적봉에 선덕여왕은 죽어서도 천년이 간다는 주목처럼 사람들 눈길을 받으며 능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린 철의 여인이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자신에 대한 나약함은 무덤에서도 돌치마를 향하고 있을 것만 같다. 웅장한 무덤 역시 만삭된 아낙의 배를 닮았다. 대릉원에서는 볼 수 없는 돌(자연석)을 쌓아 올린 삼단 밑층이 눈에 들어온다. 죽어서도 자신의 소망과 염원은 돌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인의 몸매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우리에게 갈증을 날려 보내는 음료수가 있다. 코카콜라는 세계인의 손에 쥐어져 오감을 자극하며 지금도 목마른 이의 영혼을 달래준다. 여인의 몸을 닮은 구조물을 만들어 자신의 몸에 태기를 소원하며 별을 향해 기도를 올린 첨성대 돌치마. 역사가 남긴 발자취는 시공을 넘어 오석처럼 한결같기에 경주의 첨성대는 코카콜라의 시원이 된다.
할머니와 손주, 대를 이어가는 가족들이 첨성대를 쉼 없이 돌고 돈다. 만추의 따가운 햇볕을 빨아드린 꽃들은 진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첨성대 주변의 수국과 코스모스 꽃잎들도 건들바람에 고개를 나붓거린다. 마치 선덕여왕이 돌치마 아기집에 올라 애타게 기도한 것으로 상상하는 나를 알기나 한 듯.
해는 첨성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여왕의 능이 있는 낭산의 땅거미는 어슬렁거리며 다가온다. 가로등 불이 하나둘 켜진다. 등롱 같은 불빛이 은은하게 사위를 밝히자, 첨성대는 또다시 치마를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