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백석이 70대 중반일 무렵 촬영한 가족사진. 백석 옆이 부인 이윤희씨, 뒤는 둘째아들(중축씨)과 막내딸.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 고보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등단 함흥 영생 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시집: 『사슴』(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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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評
"이땅에서 가장 순수한 서정 시인이며
사상성을 詩에 훌륭하게 간직했던 시인으로
현학적이며 외래적인 시풍을 과감히 배격하여
관념적이고 공허한 동시대의 詩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백석은 릴케 보다도 더 감수성이 예민하고, 서민적이고, 솔찍한 시를 썼다.
푸시킨 보다도 더 쉽고 아름다운 시를 썼고,
도연명 보다도 더욱 진실하게 자연을 사랑하는 훌륭한 시를 썼다.
백석은 이태백의 현학적이고 화려함을 현실적으로도 능가한다.
그리고 백석은 이 모든 유명 시인들의 정치성을 배격하고,
외국의 들뜬 싸구려 감정의 낭만적인 시들을 거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대에 입방아만 찧던 싸구려 외국 시들을 부끄럽게 하는 유일한 시인이다."
ㅡ 송 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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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같은 모국어에 실린 민족현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밈을낸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인데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전문)
1930 년 대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한 엄혹한 시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문학이 두드러진 활기를 띠고 활짝 꽃핀 시기이기도 하다. 연세대 이선영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30년 대에 생산된 작품의 양은 20년 대의 세배를 훨씬 웃돌고 40년 대의 두배가 넘으며 심지어 50 년 대보다도 더 많다.
시의 경우만 보아도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김영랑 박용철 오장환 이육사 유치환 이용악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설정식 임화 윤동주 김상용 등 빛나는 별들이 이리저리 무리지어, 모더니즘 계열, 순수서정 계열, 민족의식 계열 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구인회, 시문학파, 카프 등등의 이름으로 성좌를 이루며 30년 대 문학의 천체도를 수놓고 있다.
그 별들 가운데 하나가 백석이다. 30년 대의 어둠을 밝힌 일등성이 틀림없는, 그리고 특히 '민족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면 그 밝기가 더욱 도드라질 이 별은 그러나 오랫동안 남북한 문학의 천체도에서 누락돼 있었다.
남한의 문학사에서 그가 누락된 것은, 임화나 이용악의 경우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실천이 직접적 이유가 된 것과는 달리, 해방과 분단의 시기에 그가 우연히 자신의 고향인 북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모국어를 수호, 보전하고 그 모국어 속에 민족적 삶의 실감을 담아 내는 것이 식민지의 시인에게 맡겨진 최대의 소명이라고 한다면 백석은 자신의 소명을 누구 못지않게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백용삼으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白石,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기행이다.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사진사의 초창기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일했고, 퇴임 뒤에는 낙향해 정주에서 하숙을 쳤다.
분단 이전에 경의선을 타면 서울에서부터 서른 네 번째 역인 정주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번성하던 지역이지만, 백석의 집안은 기독교와는 무관한 분위기였다.
시인이 어린시절을 보낸 이곳 주위의 풍경은 < B>"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터 /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 ..."로 시작되는 '정주성'을 비롯해 첫 시집 <사슴> 속의 많은 시에 녹아들어가 있다.
백석은 이곳에서 오산소학교와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그는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왔는데 뒷날 이때의 서울 인상을 "건건쩝쩔한 내음새나고 저녁때 같은 서글픈 거리" 라고 적고 있다.
18살 때인 1929년 오산고보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를 졸업한 백석은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유학해 아오야마 학원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 한다.
백석은 대학시절인 1930년 1월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그린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확인된 백석의 유일한 소설이다.
1934년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출판부기자로 입사해 당시 이 신문사가 내던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해 시단에 얼굴을 내민다. 이 시를 발표하기 전부터 백석은 정주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추억을 담은 시를 여럿 쓰고 있었고, 그 덕분에 시단 데뷔 이듬해인 1936년 1월 35편의 시가 <사슴>이란 표제로 묶여 나올 수 있었다.
1월 29일 서울 태서관에서 열린 이 시집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운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으로 돼 있어 당시 백석의 교우관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국 만화 , 영화계의 선구자인 안석영을 포함해 소설가 허준 함대훈 그리고 김기림 등 발기인의 많은 수가 조선일보사의 동료들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있던 시인 김기림은 이 신문의 신간소개란에 쓴 '<사슴>을 안고'라는 글에서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추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기림은 <사슴>의 시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지적 통제에서 모더니즘의 영향을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백석이 시각적 이미지 묘사를 중시한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스트적 면모를 다소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뒷날의 시편들과 함께 <사슴>을 더욱 또렷이 특징지우는 것은 북방정서, 강한 방언주의 그리고 민족주체의 민중정서 같은 것들이다.
그가 이용악 등과 함께 나누고 있는 북방정서도 우리 시의 주류에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눈여겨볼 만하지만, 지난 87년 <백석시전집>을 엮어낸 시인 이동순씨(영남대교수)는 특히 그의 방언주의에 주목한다.
전집 뒤에 낱말풀이를 붙여야 했을 정도로 심했던 백석의 방언주의는 이씨에 따르면 민족언어의 뿌리조차 말살하고자 획책했던 일제의 파쇼적 불법성 앞에서 그를 지탱해준 목구어 정신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방언주의는 민족 주체성의 확보와 모든 동족 사물들 사이의 관계의 합일에 목표를 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타는 모닥불 / / ... "로 시작되는 시 '모닥불'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개체, 개인을 '모닥불'이라는 합일의례의 공간 속에서 융화시키며 시인의 평등사상,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승'의 ".../ /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덩판 /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섶벌 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 갔다 /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 ..." 같은 구절들은 지아비와 딸을 잃은 여성의 삶을 통해 식민지의 한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을 압축함으로써 뒷날 '팔원' 같은 시에서 더 심화될 민족현실의 탁월한 시적 형상화를 예고하고 있다.
백석은 <사슴>을 낸 해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전직한다. 그의 전직은 그보다 1년 앞서 영생학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평론가 백철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동문학가 강소천씨와 목사 김관석씨가 이 시절 백석에게 배웠다.
이들과 함께 백석의 제자였던 충북 청주시의 개업의 김희모(70)씨는 이동순씨가 정리해 월간 <현대시> 90년 5월호에 기고한 '내 고보시절의 은사 백석선생'에서 이 시절의 백석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백석은 뛰어난 기억력과 훌륭한 영어발음을 갖춘 '모던보이' 였고, 수업시간에 러시아 작가들에 관해 주로 얘기했으며, 축구부의 지도교사였다.
백석은 교직 생활 2년 만인 38년 이 학교를 사직하고 다시 서울로 와 <여성>의 편집을 보다가 이듬해에 만주의 장춘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백석의 생애는 그의 문학사적 중요도에 견주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생고보의 취직부터 만주로 건너갈 때까지 3년 동안의 행적은 이 시기에 그와 동거했던 '자야 여사'의 회고에 의해 그 편린이 밝혀지고 있다. 성이 김씨인 자야 여사는 현재 76살로 미국에 살고 있는데, 그가 서울에 살던 3년 전 이동순씨를 만나 행한 백석에 관한 회고가 <창작과 비평> 복간호 (1988년 봄)에 실려 있다.
그가 백석을 만난 것은 36년 가을 함흥에서였고 '자야'는 백석이 그에게 지어준 호라고 한다.
자야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37년과 39년 부모의 강권으로 두 차례에 걸쳐 고향에서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그 때마다 며칠을 못 채우고 다시 자야 여사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백석과 가까웠던 사람들로는 시집 < 사슴 >의 발기인들외에 함께 유학을 했던 정근양, 동향선배 백철, 서양화가 정현웅 등이 있었다. 정현웅은 31년 선전에서 작품 '여인상'으로 특선한, 백석의 <여성> 동료이다.
영생학원을 그만둔 백석이 서울로 돌아와 자야 여사와 살림을 차린 곳은 청진동이었는데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이 바로 이 청진동 집이라고 한다.
자야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일본작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또 육류를 싫어하고 나물반찬을 좋아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에는 동치미국, 댕추가루, 명태창난젓, 맨모밀국수 등 음식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경상대 유재천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백석의 ㅣ에 등장하는 음식물 명칭은 1백여가지에 이른다. 유 교수는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만주로 건너간 백석은 그곳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세관업무 등에 종사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머문다.
이 시절 만주의 하얼빈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김희모씨가 백석이 일하던 안동의 세관에 들러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백석은 지난날의 멋스러움과 생기발랄함이 사라진 초라한 중년사내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백석은 40년 10월에는 자신이 번역한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기 위해 잠시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백석의 대부분의 시가 만주 이주 이전에 쓰이기는 했으나, 만주시절에도 그는 10여편의 시를 국내의 잡지에 발표했다. 대개 40년초부터 41년 4월까지 1년 남짓 사이에 쓴 그 시들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역사에 대한 가책과 회의 그리고 고향 상실감과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로 시작해서 시들어가는 민족사를 부끄러움에 담아 슬프게 노래한 '북방에서'나 이역생활의 쓸쓸함과 망향의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 두보나 이백같이' 같은 시들이 그 예이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조국으로 돌아와 한때 신의주에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분단과 함께 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 남쪽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6ㆍ25때 북진한 국군에 의해 한때 정주군수로 임명되었다가 그 때문에 그 뒤에 숙청되어 늙마를 불우하게 보냈다고 한다. 반면에 전쟁 뒤에도 그가 김일성대학에서 얼마동안 강의를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문학>에 의하면 62년까지 그가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단고 밝힌 이동순씨는 그러나 백석의 방언주의와 북한의 문화어정책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었을 터이므로 그의 문학활동이 활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성을 짙게 풍기는 어법에 주목한 30면대의 시인 박용철에 의해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으식적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 백석의 시는 이렇게 남북 양쪽으로부터 홀대받았다.
그러나 백석 시의 영향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 이동순씨는 백석의 시가 민족주체성이 망가진 시대에서 고향의식과 그 끈질긴 생명력을 팽팽히 응집합으로써 꺼져가는 이 나라 모국어시의 명맥을 되살려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백석의 모더니즘 세례를 주목하는 시인 최두석씨(강릉대 교수)도 백석은 외래적인 모더니즘의 단순한 수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주체적인 입장에서 소화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보였다는 점에서 김광균이나 김기림 같은 군소시인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고종석 (1991.10.11)
-------------------------------------------------------------------------------- 분단에 의해 잊혀진 천재시인 백석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석 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우선 문체상의 개성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매우 뚜렷하다.
그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들은 대개 회고체, 방언체, 구어체, 의고체, 연결체, 만연체, 아동 어투의 독백체 등이며, 이는 민중적 정서를 농도짙게 풍겨나게 하는 기대를 갖고서 구사된다. 시인 자신의 유소년 시절의 체험과 고향 정서로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들이 어김없이 회고체를 채택하게 하는 것이며,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방언이 그의 시작품의 방언적 토대가 되고 있다.
특히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구어체를 그대로 표기하므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드높이고 있다. '금덤판,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녕감, 니차떡, 석박디, 데석님, 디운구신, 녀귀' 따위가 그 사례이다. 더불어 작품의 서사적 구조로 독자들을 이끌어 들이는 하나의 장치로써 연결형이 구사되고 있는 듯하다. ∼고, ∼며, ∼는데, ∼도 등이 가장 빈도수가 높은 연결형 어미와 조사들이다.
백석의 시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기형태는 '?볶?' '얹?M다' 등의 분철(分綴)과 '울ㄴ다' '알ㄴ다' '달ㄴ' 등에서 보여주는 ㄹ과 ㄴ의 자음겹침 형태이다. 이는 작중 화자가 사투리로 직접 말하는 듯한 생동감을 드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형태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법들은 정서법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있지 못한 시기에서 의고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시인 자신의 의도와 배려가 강력히 담겨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시는 형태면에서도 독특한 변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가 대체로 서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례가 많으므로 담시, 서술시, 이야기시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그 외적 양식이 줄글 형태의 산문적 성격으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하다. 띄어쓰기도 시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낭송하기에 편리하도록 한 차례의 낭송호흡에 필요한 일정한 어절을 서로 통합하여 띄어쓰기 규칙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백석 시의 원문을 주의해서 지켜보면 이런 점들이 당시 정서법 체계의 무질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된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연(聯)에 관한 부분에서도 아예 연구분이 없는 비연시 형태와 분명하게 연 구분을 획정하고 있는 연시 형태가 거의 반반씩 균형을 이룬다. 비연시 형태에서는 시「비」의 경우처럼 단 2행으로 전체 형태가 완결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청시(靑枾)」「산비」처럼 3행 형태도 있다.
그런가 하면 4행형과 5행형 이상도 다수 있다. 연시 형태는 시「초동일(初冬日)」처럼 특이한 2연형이 있고, 기타 3연형에서 5연형 이상까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나 이 가운데 단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3연형이다. 줄글 형태는 행구분과 연구분을 모두 벗어난 산문시의 형태인데 백석은 이러한 형태도 더러 구사하고 있다. 백석의 시를 곰곰히 읽다 보면 그의 시가 조선 후기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사설시조의 형태를 방불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 황정을 캐어들고 집으로 돌아 들제 방경에 나는 꽃은 의건을 침노하고 벽수에 우는 새는 유수성을 화답한다 문앞에 다달아는 막대를 의지하여 사면을 살펴보니… 뜰 가운데 들어서니 섬돌밑에 어린 난초 옥로에 눌러 있고 울가에 성긴 꽃은 청풍에 나부낀다… 대수풀 우거진데 이슬바람 서늘하다.
----안민영의 사설시조 중 일부
2)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스하다… 뒤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나 보다 울밖 늙은 들매남ㄱ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 어데서 송아지 매--하고 운다 골갯논드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백석 「황일」 부분
장면을 따라서 포커스가 서서히 공간 이동을 해가는 관찰자의 시점도 그렇거니와 형태와 분위기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서로 많이 느껴진다. 백석이 사설시조에 평소 애착을 가졌다는 그 어떤 자료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전통적인 문학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백석의 시를 율격면에서 고찰해보더라도 여러가지 흥미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전집을 두루 일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행의 율격 형식들을 볼 수 있다.
1)장 ― 단 ― 장 2)단 ― 장 3)장 ― 단 ― 장 ― 단 ― 장 ― 단 4)장 ― 단 ― 단 ― 단 ― 장 ― 단 ― 단 ― 단
이러한 율격 형식들은 무작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작품의 효과를 예견하고 있는 시인 자신의 치밀한 배려가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질서를 갖고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1)은 「산비」와 같은 전형성을 지닌다. 2)는 「청시」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3)은 긴 행과 짧은 행을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해가는 방법이다. 4)는 한 줄의 긴 행 다음에 짧은 행을 세 줄 반복하고 나서 다시 긴 행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행 형식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고, 더불어 주제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적절한 형태를 선택하고 있다.
「연잣간」과 같은 시는 2행 반복율이 특징이고,「바다」는 3행 반복율로 보인다. 운율법으로는 일종의 각운 형식을 방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많다.「대산동(大山洞)」「물닭의 소리」「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안동」「목구(木具)」「수박씨 호박씨」「적막강산」등의 시작품에서 그러한 운율 형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하나 특이한 점은 시「황일(黃日)」의 결말 부분처럼 줄글 형태의 끝에 부분적 정형율을 삽입하는 경우이다. 줄글을 곧장 읽어내려갈 때 발생될 수 있는 분위기의 따분함이나 단조로움을 극복시키려는 의도적 장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열의 한 갈래로서「오리 망아지 토끼」「오금덩이라는 곳」등의 시작품처럼 작중 화자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삽입한 형태도 있다.
한편 백석 시의 특징적인 분위기 가운데는 이미지의 구사가 유난히 독특한 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추억을 환기시키거나 토속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불러 일으킬 때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는 회고적 상상적 이미지이다. 이와 더불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가지 감각 기관의 민감한 반응을 작용시켜 현장의 생동하는 느낌을 더욱 실감나게 고조시킨다.
시「동뇨부(童尿賦)」와 같은 경우는 1연의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으로 표현된 촉각적 이미지, 2연의 '첫 여름 이른 저녁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로 표현된 후각적 이미지, 3연의 '새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로 표현된 기발한 청각적 이미지, 4연의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색채 형용의 이미지가 한 편의 시작품속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 「북관(北關)」에서 명태창란젓을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라는 후각적 이미지와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이라는 미각적 이미지로 연결 통합시키고 있는 부분들은 백석 시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석의 시작품 세계에 전반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미지는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와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향이 정주(定州)라는 작은 포구이기도 한 사실과 시인이 교사 생활을 하던 곳도 함흥 바닷가 연안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관심이 바다쪽으로 쏠리게 되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 세계와 그 분위기가 가장 일치되는 공간에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된다는 설명과도 관련된다.「가키사키(枾崎)의 바다」「이즈 코쿠슈(伊豆國湊) 가도」「통영」「바다」「삼천포」「함주시초(咸州詩抄)」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계절 이미지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은 시인 백석에게 있어서 그리움과 애틋함, 아름다움, 슬픔, 쓸쓸함 등으로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따라서 백석의 시는 어떤 고정된 계절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질 않고 모든 것이 온유함과 쓸쓸한 분위기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시제들도 대다수가 과거 시간이거나 현재의 시점을 지키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특히 유소년 체험을 회상하는 과거 시제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현재 시제를 지키는 작품들은 대개 방황과 좌절을 표현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백석 시의 소재 제재적 측면은 어떠한가?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첼?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진실로 높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이 마음을 제사들오어 이것이 아니면 안심하지 못하고 입명(立命)하지 못하고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은 때에 밖으로 얼마나 큰 간난(艱難)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속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핍박을 받어 처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은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안흔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魂)입니다. '외로운 것을 즐기는' 마음도, 세상 더러운 속중을 보고 '친구여!'하고 부르는 것도, '태양을 등진 거리를 다떨어진 병정 ?링罐? 끌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마음도 다 슬픈 정신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슬픈 정신에게야 속된 세상에 그득찬 근심과 수고가 그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
----백석의 서평 [슬픔과 진실](여수 박팔양씨 시초 독후감)의 부분
이 글속에서 백석이 말하는 '슬픈 정신'은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과 뭇사물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을 다 내 마음속에 애틋하게 수용하고, 특히 모든 소외된 사물들에 대하여 따뜻한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불교적 자비심, 혹은 기독교적인 긍휼이나 사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아끼는 마음' 등은 모름지기 시인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필수 덕목이자 품성인 것이다.
백석의 시가 유난히 작고 가냘프고 여린 것, 외롭고 못난 사물과 가여운 생명들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잘나고 거만하고 자신을 뻐기는 존재나 화려한 사물들은 적어도 백석의 문학적 관심에서 일단 벗어나 있다.
다음으로 백석의 시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동 유희 및 무속적 의식이나 민속 행사, 민중 의약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백석의 시가 주로 농도짙은 설화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주로 이러한 소재들을 표현하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분위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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