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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정의(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일본식민지 정책의 아성인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자 제일먼저 언론기관 정리와 숙청에 나섰다.
민족지인 대한매일신보가 간부이동으로 이미 변질되어 있었으므로 이것을 모체로 한 총독부 국문 판 기관지로 삼았다.
매수정책은 일찍부터 그 손을 뻗치어 대한매일신보의 판권이 넘어갔을 때부터 황성신문을 강제 매수해 없애고 우리민간신문을 역시 강제 폐간 시켰다.
이처럼 사내총독은 우리 민간신문을 손쉽게 없애는 데 성공하자 일인경영 조선일일신문을 비롯한 조선일출신문, 경성신보, 동양일보 등에 대해서는 우리 민간신문과는 달리 보상정책을 사용하여 한 신문에 3~4천 원에서 1만 원까지 지불하고 매수한 후 폐간시켰다.
그 중에도 경성신보는 매수가격 조절로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사회주의적인 기사를 실었다고 트집을 잡아 발매금지와 동시에 매수당했다.
사내총독의 언론정책 강행은 당시 일인 기자들에까지 비난과 분노를 받았으나 한국인은 분노와 반항을 하면서도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은 사내총독이 가혹한 무단정책을 강행하여 한국인들의 발언을 완전히 봉쇄하였고 그의 무단정책은 헌병들의 물샐틈없는 강력한 뒷받침이 있었다.
따라서 나라의 국권이 빼앗긴 합병이 선포되어도 을사보호조약당시 같은 반항이 없어 삼엄한 경계가 무색할 정도였다.
이처럼 군 국 일본은 합병단행에 무력으로 한민족의 수족을 묶어놓아 일체의 집단적인 항쟁을 막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망국의 미래를 앉아서 볼 수 없다는 유지를 남기고 조정구, 김석진 등 유림 학생들이 자결로서 순국하는 애국심을 보이기는 했다.
비통한 한민족은 우리의 신문을 갖지 못해 보고 듣고 읽는 일체의 자유를 빼앗기는 등 완전히 언론암흑시대를 맞았다.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일부국민은 비탄과 실망을 안고 해외로 정치 망명을 떠나고 국내에 머물러 있는 애국지사들은 분통(憤痛)터지는 기막힌 일을 당해야했다.
사내총독은 교원에게까지 제복과 군도를 차게 하여 위압과 강압정책으로 국민을 반항 못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자신을 암살하려했다며 윤치호를 비롯 양기탁, 안태국, 임채정, 옥관빈, 선우혁 등 언론인, 목사, 교사 700여명을 검거해 6개월에서 10년까지 억울한 옥살이를 시켰다.
합병 후 우리신문이 말살되자 해외에서 반입되는 해외신문이 인기가 높았다. 애국열이 불타는 격렬한 소식을 실어 국내로 반입되자 총독부는 255건 8만1062부를 압수하여 폐기했다.
해외 신문은 눈과 귀 이목구비를 정치적으로 거세 당할 때의 신문이어서 황홀하기만 했다.
그 한 장의 신문이 얼마나 귀중하고 진귀한 가치였나. 해외신문의 역할과 지역 및 연대는 다음과 같다.
▲공립신보 1905년 한인공립협회 안창호(安昌浩)외 한인들이 의연금으로 미국 센프란시스코 에서 주간지 4천부를 발행 미국교포와 만주까지 배부되었던 최초의 한인신문.
▲신한민보 1907년 미국 대한국민회 이강, 정재관 등에 의해 창간되어 50주년을 맞이하는 등 반세기를 굳세게 버티어온 장한 해외신문.
▲시사신보 1905년 하와이 윤병구 선교사에 의해 창간되어 미국과 영국 교포들에게 배부되었던 신문.
▲국민보 1907년 호놀루루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문과 영문판으로 발행된 신문.
▲태평양시사 1918년 이승만 박용만이 하와이 동포를 위해 창간하여 독립의 진로를 역설한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발행된 신문.
▲대동공보 1907년 해 삼위에서 유진율, 이강 에 의해 창간, 교포계몽에 힘썼고 한때 안중근 의사도 논설을 기고했던 신문.
▲해호신문 1910년 해 삼위서 한일합방 직전까지 언론에 활약한 신채호가 망명 한인을 위해 국문지로 발행, 국권회복과 개명사업에 주력했던 신문.
여주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