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삶의 마당을 쓸다
소수중 교장 김신중
1.
시인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란 게 있다. 물론 우연하게 사람이나 시를 만나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우연마저 어느 날 갑자기 필연으로 느낄 때가 많다. 내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사람은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였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보들레르의 시 ‘교감(Crrespondances)’이었다. 교감을 읽는 순간 받은 충격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에 살아 있는 기둥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소리를 내고,/ 인간이 거기 상징(象懲)의 숲을 지나면/ 숲은 정다운 눈으로 그를 지켜본다.// 밤처럼, 그리고 빛처럼 광막한/ 어둡고 그윽한 조화 속에서/ 저 멀리 어울리는 긴 메아리처럼/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합한다.” 자연은 상징의 숲이며, 그 숲속에서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며 교감한다는 것이다.
보들레르를 만나기 전에는 주로 사물의 겉을 봤다. 노을이 아름답고 산이 웅장하며 지는 꽃이 애처로웠다. 바람이 불었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을 때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이는 미르나뭇잎을 보면서 멈칫 아름다움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물의 겉만을 맴돌면서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하고 넘어지면서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때, 보들레르가 떡 하니 나타났다. 교감은 사물의 내면을 보게 했다. 사물의 내면이 캄캄한 것이 아니라 향기와 색깔과 소리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런 사물들이 모여 상징의 숲을 이루게 되니 이때부터 숲에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도 흘러나오는 교향곡을 해석하면서 향기와 색깔과 소리가 춤추는 것을 쓰면 되었다.
2.
하이데거는 시를 언어의 건축물이라고 했다. 언어의 건축물 속에는 결국 사람들이 살아간다. 시를 쓰다보면 어느덧 사물을 넘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흔이 지나면 사람으로서 성숙해진다. 마흔쯤 되면 서정주의 말처럼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자신도 보고 이웃에 눈길도 주게 되는 것이다. ‘불혹문전(不惑門前)에서’를 쓰면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혹의 나이가 넘으니/ 낯선 곳에서 바라보는 산도/ 어디서 본 듯해 낯설지 않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아주 오래 전이던가/ 꼭 한번은 만난 듯하다./ 나지막이 앉아 있는 산도/ 낮게 보이지 않아 아담하고,/ 못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못난 모습보다는/ 가리킨 그 손가락이 오히려/ 부끄럽게 보인다./ 불혹문전에 선 사람들은/ 문이 낮으면 고개를 숙여/ 낮은 문을 탓하지 않고/ 길이 좁다고/ 길을 두른 나무들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남은 길에 어둠이 가득하다./ 불혹문전에 서니/ 어둠마저 동행임을 알겠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시적 대상이 되는 사람은 불과 몇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모두들 인생에서 참 소중한 분들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의 늪에 빠져 많은 보석들을 잃어버렸다. 교직생활의 상당 부분을 고3 담임과 교무부장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변명 같지만 시도 많이 잃어 버렸다. 누가 뭐라 해도 글은 멍 때릴 때 나올 가능성이 더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 근무하면서 퇴직이 다 된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게 몇 가지가 있다. 1980년대 어느 날, 골목 선술집에서 외로움을 토로하면서 술을 마시던 체육, 상담, 수학선생님, 야간자율학습 지각 단속을 하면서 늦은 학생을 야단치다가 노을에 비친 학생의 얼굴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던 기억도 있다. 벽지 중학교에서 몸이 아파 사택에 누워 있는데 처마에 달린 풍경소리에 딱 하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깨달음도 있었다.
“막 도착했을 때 그들은 취해 있었다./ 세 사람은 같은 화덕연탄구이 원탁에 앉아/ 양미리를 구우며 막걸리를 마셨다./ 무의식 안에 부는 외로운 바람소리만 술병에 떨어졌다./ 현실과 몽상의 들판을 끊임없이 다니면서/ ‘외로움’을 매개로 끊어졌다 연결되다가/ 술에 취해 각자 몽상 속으로 떠났다.”(‘80년대 어느 술집의 기억’ 앞부분)
“인문계 고등학교 야자를 하면서 나는 주로 지각생 단속을 했는데, 그 날도 지각생 몇 녀석이 높은 언덕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왔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줄을 세워서 야단을 치려는 순간, 서산의 노을이 하늘과 운동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숨을 헉헉대는 녀석들의 얼굴에 노을 꽃이 활짝 피어서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냥 들어가라는 말에 녀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들어가고 나는 한참 동안을 멍하니 운동장 계단에 서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한 순간에 왜 이렇게 세상 일이 덧없이 보일까요?”(‘노을’ 전문)
“풍경은 제 몸을 두드려/ 바람이 있음을 알리네./ 나도 오늘 내 몸을 두드려/ 그대 사랑 있음을 알리고 싶네./ 내 몸에도 오동나무 있어/ 사랑의 노래 숨어 있으나/ 아직은 바라는 것들이 많아서/ 몸을 비울 수 없네./ 그대 사랑 알릴 수 없네./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누가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면/ 어둔 문을 열어/ 내 몸을 비울 것이니/ 뜨거운 숨결로 나를 흔들어/ 그대 사랑 있음을 알리게 하게.”(‘풍경소리’ 전문)
3.
초등학교 5학년에 아버지께서 내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지금과 같은 세월이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60년대 중반이니 지게를 선물(?)로 받는 것이 가능한 세월이기도 했다. 조그만 몸짓에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도 빙그레 웃음을 떠올린다. 한 여름에 싸리 꽃이 필 때쯤이면 싸리비를 만들기 위해 싸리나무를 하러 산에 가곤 했는데, 싸리나무를 하다가 벌집을 쑤시고 말았다. 수없이 벌에 쏘이고도 지금도 끄떡없이 살아 있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로 고생을 했으니 시 한 편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싸리비를 매기 위해
싸리나무를 하러 무학봉으로 갔었다.
알싸한 싸리 꽃향기를 맡으며
여기저기 낫질을 하며 돌아치다
땅벌 집을 건드리고 말았다.
독한 땅벌들은 팔 다리를 쏘고도 모자라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를 마구 공격했다.
집에 돌아와 쏘인 자리에 된장을 붙이면서
싸리비를 만들어 마당을 쓰는 일이
살을 내어놓는 아픔임을 알았다.
그때로부터 사십년이 지나면서
가르치거나 시를 쓰는 일도
싸리비 한 자루를 만들어
세상의 한 부분을 쓸고 닦는 것임을 알았다.
비록 쓸어야 할 것들이
얼음처럼 견고하게 달라붙어
쉽게 부서지거나 떨어지지 않아도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비질을 한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보석들은
캄캄한 바위 속에서도 비질을 통해
조금씩 드러났음을 믿기 때문이다.
- ‘싸리비에 얽힌 회상’ 전문
시골의 일이란 게 쉬운 일이 없다. 어린 힘에 모든 일이 힘겨웠다. 나는 유독 마당 쓸기만은 좋아했다. 지저분한 마당을 빗자루로 쓸다보면 깨끗하게 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즐거웠다. 아버지께서 빗자루를 매신다고 하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지켜보곤 했다. 싸리 빗자루가 완성되면 제일 먼저 마당을 쓸어보는 것이다. 그런 빗자루를 맨다고 하시니 싸리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벌에 쏘인 자리에 된장을 붙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빗자루를 만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나이가 들어 생각하니 마당을 쓰는 일도 살을 내어 놓는 아픔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지만 가르치는 것도 빗자루를 만들어 마당을 쓰는 것과 같다. 평평하고 깨끗한 마당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당을 쓸다가 지푸라기가 흙에 붙어 있는 경우에는 깨끗하게 쓰는 게 쉽지가 않다. 몇 번이고 비질을 하든지 허리를 숙여 검불을 끄집어내야 할 때도 있다. 아니 지푸라기를 쓸어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깨끗한 마당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시의 언어를 카오스의 혼돈 속에서 끄집어내어 질서 있게 정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막상 시로 태어나면 그것은 보석이 된다. 마찬가지로 가르친다는 것도 학생이라는 보석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학생들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직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지 못한다. 어쩌면 어둠 속에 갇힌 꽃과 같이 혼란과 혼돈의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비질을 하고 기다려 주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것이다. 시에 의해서 언어의 집이 건축되듯이 가르침에 의해서 사람의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