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나의 친구 신영복 선생님(1)(탁현민)
By 탁현민 | 2023년 6월 16일 | 미분류
언제부턴가 뉴스를 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결과 갈등, 폭력과 무지의 상업적 언어만 나부끼고 있다. 이태원 참사는 여전히,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 주식이나 집값, 코인, 과학 기술의 혁신이 ‘나’를 힘들게 한다. 세기말도 아닌데 우울이 정서의 기조다. 가까운 심리치료 병의원은 환자들로 붐빈다. 버려진 느낌으로 살고 있는데 탁현민 작가가 신영복 선생을 모시고 왔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작은 기쁨에 인색하지 말고 큰 슬픔에 절망하지 맙시다.” 익숙한 선생님의 언어가 탁 작가를 통해 다시 들려온다. 8월 출간될 탁 작가의 신간 <사소한 추억의 힘> 원고 일부(70매)를 입수해 주말 식탁에 올린다. [편집자 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만나다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고 교내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쓴다며 놀러 다니는 일이 더 좋았다. 내가 다녔던 강원고등학교 문예반은 매해 신춘문예에 등단하는 소년 문사들이 나오는 유서 깊은 동아리였기에, 나 역시 일찌감치 등단하여 문단에 명성을 떨칠 것이라 자신만만했다. 공부에 별 뜻이 없었으니, 학교에 가서도 문예반 동아리방에서 몰래 담배도 피우고 가끔 책을 읽고 주로 땡땡이치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에 등굣길에 담배를 피우다 걸리고, 점심시간에 걸리고, 마지막 야간 자율학습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우다 걸린 날이 있었다. 흡연으로 하루에 세 번이나 적발되었다는 대단한 위업의 결과는 1주일 정학이었다. 당시 정학은 학교에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무실에 책상을 옮겨놓고 앉아 오가는 선생들에게 야단을 맞으며 종일 반성문을 써야 하는 처벌이었다.
정학 첫날. 어쩔 수 없이 교무실로 출근, 아니 등교를 해서는 비뚜름히 앉아 개전의 정이 없는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영 불손한 태도를 지켜보던 선생님은 당구 큐대로 머리를 때리며 모눈종이 전지를 던져주셨다. “넌 여기 칸마다 띄어쓰기하지 말고 반성문 써.” 꼼짝없이 눈물을 흘리며(작은 칸에 글씨를 쓰자니 눈이 아파서) 스스로를 추궁하며 빈칸을 채워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아린 눈을 끔뻑이다 어느 선생님 책상을 무심히 쓸어 보았는데, 그때 책장에 꽂혀있던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반성보다는 반항을 하고 있던 내게 이 제목은 몹시 끌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책상에서 슬그머니 책을 꺼내 저자가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신영복, 통혁당 무기수, 20년 2개월….’ 낯선 이름과 낯선 사건 그리고 내 삶 전체보다 긴 영어(囹圄)의 시간이 저자를 소개하고 있었다. 더는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종이 울렸고 선생님들이 다시 교무실로 들어오셔서 더는 읽지 못했다.
1주일간의 정학이 끝났다. 이후 다시는 모눈종이에 반성문을 쓰고 싶지는 않아 좀 더 조심하며 조신한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문예반 지도교사를 맡게 된 유태안 국어 선생님께 내가 쓴 시를 보여드릴 기회가 있었다. 시를 한참 읽어 보던 선생님이 책 한 권을 추천하셨다. 그 책은 전에 교무실에서 꺼내 보았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선생님은 단지 책을 읽는 것만 아니라 시간을 내어 필사할 것을 권하시기도 했다. 아마 글쓰기의 가장 바탕이 되는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과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 ‘그것을 온전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으면 했던 것일 텐데, 내게 그날의 독서와 필사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럴듯한 표현을 짜깁기해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것을 성취라 생각했던 18살 고등학생이 이제껏 써왔던 글들을 돌아보게 해주었고 무엇을, 왜 쓰려고 하는지 고민하게 해주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글쓰기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해주기도 했다.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은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열어주는 문도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열고 나가는 문이라야 합니다.
자기 발로 걸어 나가는 문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 ‘처음처럼’
그날 춘천 시내에 있던 청구서점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사 읽었다. 편집된 기억으로는 그 밤을 새워서 하루 만에 다 읽었던 것만 같은데 그것이 진짜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목수가 집을 그리는 이야기와 여름 징역 이야기, 정대 이야기, 남산 군형무소 이야기, 그리고 청구회 추억과 ‘햇볕 두 시간’ 이야기에 관해서는 지금도 떠오르는 선명한 독후감이 있다.
추운 겨울 독방 무릎에 올려놓은
신문지 크기의 햇볕 한 장 무척 행복했습니다.
2시간의 햇볕 한 장은 생명의 양지였습니다.
2시간이 겨울 햇볕 한 장만으로도
인생은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하지만 저자인 신영복 선생님이 겪었을 고초와 그 참혹함에 공감할수록 그의 맑고 따뜻한 문장과 사유의 깊이를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그것은 도저히 양립 불가한 모순이었다. 불의한 이유로 감금된 삶과 20년 2개월이라는 시간을 빼앗겼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인생이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고 말씀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어려웠다. 그래서였을까? ‘2시간의 겨울 햇볕 한 장만으로도 인생은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청구회의 추억 마지막 문장에서도 나는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를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을 따름이다.’
지금 읽어도 여전히 마음이 저릿한 ‘청구회 추억’을 읽으며 좋은 글은 그대로 그림이 되고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열심히 필사도 하였건만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등단하지는 못했다. 입시가 다가오면서 점점 글쓰기에서도 멀어져갔다.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 삶은 막연해졌고, 내 고등학교 시절이 그렇게 흘러갔다.
첫댓글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를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을 따름이다
울컥 울컥 미어지는
27살 청년이 47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