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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 대한 나의 생각
시조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기에 앞서 먼저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사항이 있다. 나는 시나 시조에 대해서는 완전한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일반인이 생각하는 시조에 대한 생각을 더 솔직히 적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용기를 내어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나 문외한이기 때문에 전개하는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고, 이미 많은 분들이 주제로 다룬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런 우려를 넘어 시조를 모르는 일반인의 이야기가 시조 발전과 변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내게 시조는 무엇인지와 시조는 어떻게 오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시조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었으면 좋을까에 대해 말해 보겠다.
1. 시조는 일반인인 나에게 무엇을 떠오르게 하나?
첫 번째, 시조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암기식 교육의 결과에서 기인한다.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 ‘3·4·3·4 3·4·3·4 3·5·4·3’ 구조로 각 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 그리고 시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만의 노래 형식이라는 기억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주입식 교육시대를 겪은 대부분의 일반인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답변을 할 것이다. 어찌 보면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효용성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된 지금도 이러한 시조의 형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놀랍기도 하다.
두 번째, 시조는 ‘가람 이병기’ 선생을 기억하게 한다. 고등학교 입학 후 문학시간에 배우게 된 가람 선생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이병기 선생을 현대시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뇌리에 각인시켰다. 물론 「하여가」나 「단심가」 등 고시조도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람 선생의 시조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연결고리다. 하지만 만해 선생이나 윤동주 시인의 시는 떠올랐지만, 대표적인 시조시인인 이병기 선생의 작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의 호인 ‘가람’의 뜻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에 반해, 시조 한 수 떠오르지 않아 죄송스러워서 가람 선생의 시조를 한 편 찾아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읽어 보는 시조를 통해 교과서에서 시를 배울 때마다 늘 언급되던 ‘서정성’이라는 의미가 떠올랐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 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 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병기, 「별」 전문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시조에 대한 연결고리는 초등학교 은사이시고 시조시인이신 이정환 선생님이다. 지금까지 이정환 선생님과의 끈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는 시조라는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써볼 기회도, 그리고 용기도 가지지 않았을 터다. 초등학교 졸업 후 40년이나 되어가는 지금도 제자를 살뜰하게 챙겨주시는 선생님을 떠올리며, 시조시인이시기에 그러신 것이 아닐까 조용히 짐작해 본다. 이렇듯 시조와 시는 모두 학창시절의 마무리와 함께 아련히 멀어진 그 무엇이 되었다. 특히 ‘시조’는 주입식 교육에서 각인된 형식성으로 하여 조금은 더 거리감이 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형식에 구애 받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시조의 형식적인 특성은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 시조는 어떻게 수백 년을 살아남았나?
그럼 일반인인 나에게 친숙하지 않은 시조가 어찌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그 의미를 전달 하는 표현의 도구로 활용되게 되었을까 고민해 보았다. 대표적인 고시조를 떠올려 보고, 현대시조를 찾아 읽어보면서 시조가 어느 정도 정형화된 기준과 형식을 갖추고 있는 면을 기억하였다. 아래의 대표적인 두 수의 고시조에서 형식적 특성을 살펴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전문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전문
두 시조의 역사적 창작 배경은 익히 들어왔고, 단숨에 보아도 형식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시조의 초장, 중장, 종장의 특성과 형식은 시조의 생명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무엇이 시조의 이러한 형식적 특성을 자리 잡게 했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오랜 시간 한자 문화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당시’나 ‘한시’의 형태가 우리의 시조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5언, 7언, 그리고 절구와 율시 등, 한시의 구조적인 특성이 시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않았을까? 형식적인 특성이 표현상 시조의 제약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오랜 시간 유지된 틀은 시조의 생명성과 연속성을 강하게 지니게 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보았다.
다음으로는 표현에서 직접적인 전달이 가능한 시조의 강점을 생각해 보았다. 한자의 문어적 표기와 일상생활의 구어적인 차이로 인해 과거로부터 시조를 통한 의미 전달을 더 활발하게 활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훈민정음에서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글과 말이 서로 맞지 않다.”라고 했던 점에서 짐작해 볼 때 과거 고려와 조선의 한시를 통해 전달하기 어려웠던 미묘한 표현을 시조라는 구어체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문어체의 표현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시조라는 표현 방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것이 기록으로 축적되고 구전됨으로 써 수백 년간 유지되어 온 것이다. 시조의 생명력의 핵심인 셈이다.
3. 시조는 어떻게 생명력을 이어나가면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인터넷, 스마트폰, SNS 등, 시나 시조를 접하지 않아도 자신을 표할 수 있는 도구들이 무수히 늘어났다. 시를 쓰거나 읽는 인구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을 살펴보면 시나 시조에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고, 가끔씩 가보는 서점의 시집 진열대를 봐도 늘 한산했던 모습만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하여가」와 「단심가」를 다시 읽어보며, 앞으로 시조의 발전 방향성을 생각해 본다. 단순히 전문가 영역의 시조 발전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서 멀어져 있는 시조를 어떻게 다시 가까이 오게 할 것이며. 시조의 영속성은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될 수 있겠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시조의 형식적인 측면의 자유다. 초장, 중장, 종장으로 이루어지는 형식들을 요즘 시대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많은 분들이 사용하고 있는 트위터나 다양한 SNS에서 사람들이 시조의 형식으로 본인의 생각과 느낌을 짧게 작성할 수 있게만 할 수 있다면, 조금은 용이한 시작의 틀을 일반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 좋은 시도와 결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형식에서 조금 벗어나 유연성을 가지자는 의미로 「하여가」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을 떠올려 보았다. 이는 시조의 유연성과 자유를 표현할 멋진 시구가 아닐까? 시조의 큰 형식은 유지하되, 세세한 면에서 유연성을 허락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쉽게 시조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만약 시조시인들이나 시조와 관련된 단체에서 이러한 시도를 해 본다면 조금은 더 체계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움직임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최근 K-Pop으로 인해 한국어에 대해 높아진 관심도를 활용하여, 외국인들이 시조 형식으로 짧은 작문으로 이어지는 활동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의 현대시조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임 향한 일편단심”
시조의 표현의 내용이 가져야 할 명확한 방향성이다. 「단심가」의 “임 향한 일편단심”이라는 시구에서 시조의 내용에 담겨야 할 선한 서정성과 풍자적인 재미를 떠올려 보았다. 요즘의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짧은 글에 대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시조 형식으로 세상에 대한 시각, 개개인의 생각 등을 서정적으로 풀어낸다면 어느 누구도 거부감 없이 시조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시조라는 표현을 통해 느끼는 감정을 잘 살려 일반인으로 하여금 시조 쓰기를 유도할 수 있겠다. 만약 하루하루 일상을 시조일기처럼 쓸 수 있다면 시조의 대중화를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4. VUCA의 시기에 도약하는 시조
VUCA라고 이야기되는 요즘이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으로 설명되는 현재의 삶에서 도약하는 한국의 현대시조를 생각해 본다. 시조를 모르는 일반인인 내가 각박함 속에서 순간순간 개인과 세상에 대한 서정적인 표현들, 재미있는 의미를 잘 담아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의 현대시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일상에서 읽고 접할 수 있는 시조, 일상을 쉽게 표현하고 느끼며 공유할 수 있는 시조…….
우리가 바라는 시조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지는 더 많은 고민이 뒤따른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기회를 찾는다면 충분히 가능 하지 않을까 싶다. 변화에 주저할 수도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VUCA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다. VUCA의 정의는 군대에서 나 온 불확실한 전장의 개념이지만, 오늘날의 시조에도 적용할 포인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사라지는 VUCA의 시대 속에서 생명력을 더하고 큰 도약 하는 현대시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여기에서 쉬이 답을 할 수도, 알 수도 없다. 하지만 현대시조의 긍정적 변화와 융성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 변화의 모습을 기다리며 이육사 선생의 시조 한 편을 끝으로 옮긴다.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 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촉태 워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몸이 나을길 없오매라
저 달 상기보고 가오 니 때로 볼까 하노라
—이육사, 「뵈올까 바란 마음」 전문
이승엽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LG전자 HE HR담당. 이육사 선생 장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