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분’을 사랑함에
순례란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는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라 합니다.
‘그분’은 초월자이시고 타자(Altro)이십니다. ‘그분’을 알아본다는 것은 소문으로 들어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체험으로 ‘그분’을 알아 모시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순례의 길을 떠나고 싶어 하고, 평생 순례의 꿈을 ‘내 기어이 이루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지요.
어쩌면 순례는 회개의 여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싶어요. 순례를 떠나는 이는 깊은 영적인 변화와 내적인 악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러므로 순례는 하느님을 향한 회귀의 시간으로서 무엇보다도 '회개(回改)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제가 떠난 순례는 무엇보다 제 자신을 성찰하고 통회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드리는 고해성사의 여정이었다고 고백하렵니다.
***************************
열흘이 넘는 성지 순례를 다녀오고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어 인터넷에 이렇게 시원찮은 글을 올리면서 후회가 밀려오던 걸요. 이 같은 잡문도 읽어주시고 더러는 격려해 주신 분도 있었으니까요.
1월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3월의 끄트머리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시작 할 때였지요.
녹지 않은 눈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산행을 끝내고 내려오던 주말이었어요. 예술의 전당 뒤편에 수줍게 자리한 연못에 말입니다. 오늘에서야 결판내려는 듯 두꺼운 얼음이 채 녹지도 않은 연못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봄비는 참 잔인하게도 "방~빼, 방~빼!" 하며 떠나는 계절의 뒷꼭지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눈에는 평화롭게 보이는 계절의 변화도 이렇게 치열한 애증(愛憎)이 엇갈리는데 인간사야 오죽 하겠습니까?
이즈음의 저는 자꾸만 커지는 세상에 비해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밤에 문득 눈을 뜨면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십여 년이 넘게 다니던 직장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난 뒤로 세상을 다 잃어버린 듯 참 많이도 힘 들어 했습니다.
'....지금 우리 조직이 처한 위기는 과감한 구조조정의 결단이 필요한 때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살을 베어내는 아픔을 견디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희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장님 지시로 검토해 본 결과, 우리 조직의 위기 상황이 온다면 최소한 18개월은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참으로 잔인한 분석이었어요. 그 해 4월에 소집된 최고 간부회의에서 기획실장이 보고한 "우리 회사의 위기관리 대응 방안" 이라는 심상찮은 보고를 들으면서 사실 위기를 실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명예퇴직을 시키면서 몇 개월 치의 보상금을 줄까 노조와 싱강이를 할 때 써먹으려 위기를 과장했거니 했을 뿐 우리 모두는 위기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18개월은 커녕 7개월이 지나고 보니 덜컥 부도가 난 게 아니겠습니까. 경쟁사에 비해 영업력과 재무내용이 상당히 양호하다고 경영대상까지 수상한 우리 회사가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최악의 상황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요.
물론 IMF 외환위기가 찾아올 줄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우리뿐 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변화에 대해 불감증이 걸려도 단단히 걸린 탓이지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변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이지요.
아침이면 어디론가 서둘러 나가야 할 텐데, 비지니스 파트너랑 지금은 전화기를 붙잡고 한창 거래를 할 시간인데 갈 데가 없었고 또한 나가본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막막한 시절이었지요.
내 꿈, 좀 더 보람 있는 삶을 지향했던 내 희망은 가슴에 묻어둔 채 삶의 무게를 업고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시작 했던 것이 그때였습니다. 어지러워 주저앉고 싶은 가혹한 시절이 닥친 게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세상을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요. 주섬주섬 일어서야 할 때가 아닌가요? 너무 오랫동안 주저앉아서 다리가 풀렸다면 맨손체조라도 하면서 치열한 삶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 세상으로 한 발짝 걸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다 여기 왔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들고 어둠 속에서 눈물짓 는 세상의 못난이들을 향해 / "지난 일은 돌아보지 마십시오. 잘못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그 아픔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던 길 멈추고 서 있지 마십시오./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고/ 걸어가야 만 하는 것이 인생이며/ 지고가야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손짓하며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이 일러준 대로 말입니다.
이제 자아탐색의 치열한 성찰을 끝내고 세상을, 그리고 남을 조금씩 이해하고 껴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과거는 이미 떠나 버렸고 미래는 ‘그분’ 손 안에 있으니 오늘은 그저 길을 떠나야 하겠지요.
엘리어트가 그랬지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어렸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의 운율이 멋있어 영문으로 암송하기를 즐겨했지만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암송도 못하지만 아마 이렇게 뜻을 새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겨울은 죽은 자의 세계여서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엎드려 있으면 되었는데, 공연히 봄이란 놈이 죽은 땅에 새 생명을 일깨우면서 귀찮게 이것저것 걱정거리만 만드는 것이 아닌가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의 황패한 정신세계를 고발한 엘리어트의 반짝이는 예지가 선명하게 들어난 작품이 바로 '황무지'입니다.
일태면 치열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비겁함을 고발하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글쎄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타성에 빠져 미사에 왔다 갔다 할뿐 치열한 구도자의 묵상도, 때로는 냉담에 빠져 교회도 팽개치고 떠난 적도 없이 물에 물탄 듯 보잘 것 없는 신자였다고 고백 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이번 순례는 이외였습니다.
하필 성모님 발현성지라는 게 퍽 못마땅하게 여기며 길을 떠났거든요. 마음의 준비, 겸허한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애쓰지 않은 채 훌쩍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프랑크푸르트에서 갈아탄 로마행 비행기에서 깊은 밤 칠흑 같은 어둠속을 내려다보는데, 홀연히 나타난 아름다운 꽃이, 제 전신을 훑고 지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꽃, 르네상스의 발상지, 미켈란자로와 단테, 지옷토 등 숱한 천재들과 그들을 지원해 주어 르네상스의 꽃을 찬란히 피운 거상(巨商), 메디치家(medici)의 고향인 피렌체(Firenze)가 아니겠습니까? 영어로는 플로랜스라고 하지요. 뜻은 꽃의 도시랍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미적 감각이 탁월한 이태리 사람들이 불빛으로 연출한 야경이 바로 꽃의 도시라고 속삭이고 있네요.
"꽃의 도시 피렌체로 어서 오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베아트리체를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렇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여행의 기억이 새로워집니다. 젊은 단테의 눈에 신비롭게 비치던 베아트리체가 살던 곳이지요.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 자리한 우피지 광장에서 베끼오 궁(메디치 가문의 거처)으로 걸어가던 베아트리체가 천 년도 더 오래된 다리 위에서 햇살이 눈부셔 이마를 상긋 찡그리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돌아올 수 없기에 더 한층 그립고 애절한 내 순수를 만난 듯 피렌체가 높은 상공에 떠 있는 나를 저리도 고운 자태로 어서 오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때서야 답답한 내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나를 일깨우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변해야 하는 거야. 내게도 ‘그분’이 주신 아름다운 영혼이 있을 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두려워서 그저 그런대로 흘러가던 태만과 습관을 버리고 진실로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는 나 자신을 맞닥뜨려야해. 내 신앙생활도 변해야 하겠지.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롭게 태어나는 진정한 나를 만나야겠어...
세례성사의 은총을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란, 어제까지의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 로 다시 태어난다는, 다시 말해 변화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르네상스(Rinascimento)라는 말은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랍니다.
즉 re-는 "다시, 거듭"이며, nascere는 "태어나다" 영어로는 rebirth, 재탄생이라고 정리하지요. 이번 순례 일정에 들어 있지도 않은 피렌체를 순례의 시작, 첫날 비행기에서 무심코 내려다본 야경에서 만났지요. 바로 이 만남에서 나는 자신의 진정한 르네상스를 떠올렸고, 또한 '그렇게 하리다'. 고 다짐하면서 진실로 ‘그분’께로 다가가는 발걸음을 조심스레 떼어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순례의 감동을 지나칠 수가 없어서 뭔가 글로 써보리라 했던 것이 "바뇌의 성모님"이었습니다. 웬걸,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워드가 어느날 날아가버릴 줄은. 컴퓨터를 발로 차고 때려봐도 날아간 바뇌의 어머님은 말씀도 없고.
에이 이럴 바에는 순례의 발자취를 따라 차근차근 써보기로 결심하고서 매달렸습니다. 한 주일에 한 편씩, 서투른 독수리타법으로 올리면서 신기한 걸 경험합니다. 새록새록 모든 게 떠오를 줄이야.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메모도 해온 게 없었는데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다보면 그리도 생생하게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화면처럼 영화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픽 하고 웃어버리실 분도 계시겠지만 제게는 온 정신을 모아 올린 글이란 걸 밝혀둡니다.
제 변변찮은 솜씨로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분명, ‘그분’이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었겠지요.
시작할 때는 봄이 오기는 하는 건지 삭막한 겨울,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였습니다. 어느새 개나리가 피고 목련이 슬픈 자태로 메마른 가지에 대롱대롱 달리는가 하더니 어느새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완연한 봄이 온 거지요.
또한 제 신앙생활에 있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이 온 걸.
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봄날, 피고 지는 꽃의 향연을 '꽃들의 섹스'라고 말예요. 유한한 자기 생명의 날 동안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는 거랍니다. 그리하여 자기 꽃씨를 멀리멀리 퍼뜨려 후손을 이어나가려는 치열한 종족보존의 본능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여인이 화장을 곱게 하여 튼튼한 자식을 받으려는 본능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는 본능이 그렇게 예쁘고 고운 색색의 꽃을 피어나게 했다는 거지요.
뭐, 순례 다녀와서 대단하게 변하기야 했겠습니까만 ‘그분’ 을 생각하고, 언제나 제 곁에 계시겠지 생각하노라면 매사가 기분이 좋고 무엇보다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이것도 큰 변화라고 여겨집니다. 기도나 묵상 중에, 아니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밤에는 성서를 읽으며 ‘그분’이 제게 건네시는 말씀을 새겨들으려 애쓰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느 곳에서나 /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 문이 닫혀 있는 곳에서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 노래하는 새들에게서도, 꽃들과 동물들 에서도-- / 경이로움과 찬미의 음성을/ 침묵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르쳐 준 경이로운 깨우침도 이맘 때 배울 수 있었는걸요.
누가 이런 말을 하대요. 변화, 영어로 Change이지요. 그런데 g를 c로 바꿔 놓으면 변화가 Chance 찬스, 바로 기회가 된답니다. 부언한다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변화를 잊지 않고 나 스스로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한 언젠가 ‘그분’을 느끼고, 함께하고 다는 가슴 벅찬 기쁨을 그대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기도란 하느님과 단순하게 대화하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제가 ‘그분’께 말씀드리면 ‘그분’은 들으시고. ‘그분’이 말씀하시면 저는 가만히 듣는 거라고요. 그런데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해버렸네요. ‘그분’께서 말씀하실 틈도 주지 않고 말예요.
"너, 정말 잘 났다"고 화를 내시면 어떡허죠? 이제 그만 들어갈래요. 깊은 침묵 중에 ‘그분’을 만나는 훈련을 해야겠어요. 아마 기도 중에는 침묵으로 드리는 기도가 가장 내공이 깊은 거라지요.
저를 이렇게 은혜 충만하고 의미있는 길에 불러 주신 ‘그분’께 머리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 부끄러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 전하면서 부활하시는 ‘그분’을 두 손 모아 기다리렵니다.
‘그분’이 불러주셔서.
막상 끝을 내려하니 저만 불러 주신 듯 호들갑을 떤 게 쑥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은, 믿음이 깊어지면 순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성지(聖地)이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는 늘 ‘그분’이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그저, 넘치는 ‘그분’의 사랑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꼭....
사족]
가. 이글을 쓰며 참고한 책은
1) 까를로 마짜의 순례 영성
2) 용서와 화해의 대순례 아! 로마(이대성 지음)
3) 각종 팜플렛과 인터넷 검색.
나. 순례하기에는 겨울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유럽을 기준으로 여름이나 봄가을에는 관광객이 많아서 기다리다가 진이 빠집니다. 에펠탑, 세느강 유람선, 루브르 등 유명한 관광지는 두어 시간 씩 기다려야.
여름은 우리나라처럼 무척 더운데 반해 겨울은 별로 춥지 않습니다. 대신 겨울에는 우기라 매일 비가 내리지요. 저는 우산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버스에 타면 비가 오고 순례지를 살피러 갈 때는 어김 없이 비가 그쳤습니다. 그냥 스산하다고 할 정도라서 힘이 덜 듭니다.
다. 순례 코스야 아주 다양하지만 유럽일 경우에는 로마를 마지막 순서로 하면 좋을 듯. 로마의 휘황 찬란한 유물을 보다가 다른 나라로 가면 좀 맥이 빠집니다.
라. 가장 중요한 것은 미리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지요. 떠나기 전에 준비하는 시간은 이미 순례를 시작 한 거 아닐까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진리지요. 사실, 저는 준비한 거도 없었지만 ‘그분’이 제 눈을 뜨이게 해 주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분’을 향한 절실한 열망이야말로 순례의 기쁨을 배가할 터입니다. 제가 무어라고 이런 어드바이스를 하다니요.
긴 시간 저와 함께 순례를 떠나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바뇌의 성모님 당부를 기억하십시오.
"기도 하거라, 기도 많이 하거라..."고 세 번이나 거듭 당부하신 성모님 말씀을 우린 늘 기억 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