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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8대 임금에 오른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세조의 말년에 대리청정을 담당하다가, 세조가 죽기 하루 전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1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여, ‘짧았던 예종의 치세’에 대한 아쉬움이 표출되기도 한다. 더욱이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구공신들과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새롭게 등용되었던 신공신들의 힘겨루기로 인해, 짧았던 치세 동안 특기할만한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의 고변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던 이른바 ‘남이의 옥’은 여전히 그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더욱이 이로 인해 구공신들의 권력 장악력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왕권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현실이다.
구공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예종의 정치력을 높게 평가하는 견해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으로 인해 즉위 14개월 만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아직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예종의 아들 제안군은 당시 4살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이 사람이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다. 더욱이 그의 장인이 당시 세력가였건 한명회였기에, 왕실의 최고 인물이었던 정희왕후의 지목을 받아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순조롭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간신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던 한명회의 전횡이 저질러질 수 있었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은 세종과 세조의 정책들이 꽃을 피우던 시기였기에, 국정을 운영하는데 큰 여려움이 없었고 별다른 외침없이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후궁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일삼던 왕비 윤씨를 서인으로 폐하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건은 이후 연산군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이어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하겠다. 폐비 윤씨의 아들로 왕위에 즉위하면서, 어머니의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된 연산군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들은 그의 치세에서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더욱이 세자비였지만 남편이 요절하여 왕비가 되지 못했던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는 국정을 좌우할 정도의 배포가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한 다양한 사안들이 사극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성종의 치세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이러한 평가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신하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보다 적절하게 타협하는 정치를 펼쳤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있다. (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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