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최근 이런저런 계기로 인해 나는 초창기에 활동했던 국문학 연구자들의 논문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접하면서, 결국 그분들의 활동으로 인해 오늘날 국문학 연구의 토대를 이뤄졌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시가 연구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이 시기의 학문적 업적은 고전시가를 전공하는 나에게,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학문적 지향에 대해 끊임없는 시사를 주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간단하게 연구의 방향만을 제시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들이 힘써 토대를 닦은 연구의 틀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 후학後學들의 몫일 것이다. 더욱이 자료나 학문적 여건 등에서 오늘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값진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동안 초창기 국문학자들의 연구 업적에 대한 평가가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학문적 관심이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연구자들의 학문적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던 국문학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위민渭民 고정옥高晶玉(1911~1968)이다. 나는 고정옥이 남긴 연구 성과들을 점검하면서, 그의 연구 업적이 국문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여겼다. 고정옥은 여러 편의 저술들을 통해서 국문학의 이론적인 체계를 정립하는 데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특히 기층 민중들의 양식인 민요가 국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또한 우리의 문학사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진행되던 조선 후기 문학의 다양한 흐름들은 고정옥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던 주제이기도 했다. 그동안 조선 후기 문학에 대해서 주된 학문적 관심을 기울여왔던 나에게도 고정옥의 연구 성과가 매우 중요한 자료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조선 후기 문학의 주요 갈래의 하나인 사설시조를 다룬 고정옥의 저서 고장시조선주를 교주校註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고장시조선주는 고정옥이 ‘장시조長時調’, 곧 사설시조辭說時調 작품 중에서 50수를 가려 뽑아 각 작품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붙여 펴낸 책이다. 1949년에 정음사에서 출간된 이 책은 당시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사설시조 연구에 한 획은 그은 저서로, 당시의 국문학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고정옥이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북越北을 하고, 이후 북에서 고전문학 연구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남쪽에서는 그의 연구 성과들을 쉽게 접할 수 없게 되었다. 납․월북 인사들에 대해서 이름조차 제대로 거명하지 못했던 현실은 우리 현대사에 깊게 아로새겨진 비극적 현실의 한 단면이라고 할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무렵 납․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고정옥의 저서들도 남쪽에서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동안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고정옥의 연구 성과들이 조심스럽게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서 몇몇 저서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연구의 사각지대에 묶여 있었다.
고장시조선주 역시 그러한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에서 잊혀져 있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은 사설시조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로서 사설시조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그의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최근에는 시가 연구자들조차도 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하여 이번 기회에 고장시조선주를 연구자들이나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고정옥의 국문학자로서의 면모를 밝히고 그의 학문적 업적을 널리 알리고 싶다. 이 책의 발간으로 인해 고정옥과 그의 저술에 대해 학계의 관심이 깊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고정옥의 책이 처음 출간된 이래로 벌써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따라서 당시의 표기법과 오늘의 그것이 서로 달라 적지 않은 언어적 장벽(?)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국한문 혼용을 위주로 했던 당시의 표기법을 그대로 둔다면,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고 여겨 국한문 혼용체는 한글을 위주로 한 국한문 병기로 바꾸었다. 따라서 작품 원문을 제외하고는, 원저原著의 한문 표기를 한글을 내어 쓰고 한자는 그 옆에 조그만 글씨로 병기竝記하였다. 다만 띄어쓰기는 현행 맞춤법에 따랐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주석을 달았다. 주지하다시피 고장시조선주는 사설시조 작품에 대한 주석과 해설을 제시한 책이다. 따라서 새롭게 펴내는 책의 형식은 작품의 주석을 위주로 한 원저의 편제에, 다시 새로운 주석과 교정을 덧붙인 교주校註 형식을 취했다. 그리하여 교주 고장시조선주라는 다소 어색한(?) 제목을 붙이게 된 것이다.
고정옥이 행한 원저의 주석은 매우 꼼꼼하여,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각 작품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함께 제시해 놓고 있어, 이를 통해 문학사를 바라보는 안목과 작품의 문학성을 가려내는 감식안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정옥이 남긴 주석에 대해서 다소의 보완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또한 그가 남긴 다른 저서들에서도 사설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교주자의 원저의 주석에 대한 적극적인 보충을 시도하였고, 또한 각 작품에 대한 필요한 정보들을 적극 수렴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펴낸 다른 저서들에 산재해 있는 관련 내용들을 대폭 수렴하여 참고할 수 있게 함으로써, 적어도 고정옥의 사설시조에 대한 논의는 새롭게 펴낸 이 책을 보면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특히 원저의 맨 앞부분에 수록된 ‘서序’는 일종의 ‘장시조론(사설시조론)’에 해당하는데, 이 또한 사설시조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도 역시 교주자의 주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명백하게 오․탈자로 판명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당시의 언어 관습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은 그대로 두었다. 그 또한 우리의 언어 변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새롭게 펴내면서 고정옥의 생애와 연구 활동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고정옥과 고장시조선주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교주자의 해제 겸 논문을 수록하였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고정옥의 문학사에 대한 인식을 보다 적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두 편의 글을 ‘부록’으로 덧붙였다. 그 중 ‘형태상으로 본 국문학의 유대’란 부제를 달고 있는 「국문학의 형태」라는 글은 우리어문학회에서 펴낸 국문학개론에 수록되어 있으며, 고정옥이 바라보고 있던 국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어문학회의 기관지인 어문 창간호에 기고했던 「인간성의 해방」이란 글 역시, 조선 후기의 문학적 상황에 대한 고정옥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서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 다만 부록으로 수록된 글들은 국한문 혼용을 국한문 병기로 바꾸는 것 이외에, 앞의 글들과는 달리 교주자가 어떠한 참고 사항이나 주석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 둔다.
오랫동안 고민을 하면서 붙들고 있었던 원고를 이제 새롭게 책으로 엮고자 세상에 내어놓는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서 고장시조선주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고, 아울러 국문학자인 고정옥을 연구하는 데 하나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발견되는 오류는 그대로 교주를 담당했던 나의 몫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의 비판과 질정叱正을 기꺼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후에 발견되는 오류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바로 잡을 것을 약속드린다.
지난 한 해 동안 나에게는 적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가족들과 주변의 지인들에게 뜻하지 않게 걱정을 안겨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겪었던 그 ‘사건’이 적어도 앞으로의 학문적 자세를 다시 가다듬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자리를 빌어서 나를 걱정해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앞으로도 세상을 살면서 ‘원칙과 상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 드리고 싶다. 무엇보다 이 책의 출간을 기꺼이 맡아주겠다는 오래 전의 약속을 잊지 않고, 책의 편집과 교정 과정에서 까다로운 주문을 넉넉한 마음으로 수용하며 책을 만들어주신 보고사의 모든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어려운 과정을 함께 이겨내며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아내와 아들 가은이는 변함없이 나를 굳건하게 지탱해주는 든든한 존재들이다. 앞으로도 학문적 진지함과 문제 의식을 놓지 않고, 치열한 자세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해 본다.
2005년 5월에
동해에서 김용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