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비 오는 여름날, 安東을 찾아서
7월 27일은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매우 습(濕)한 날이었다. 이날 여덟 명의 일행을 태운 봉고는 아침 8시에 성서 홈플러스에서 출발했다. 군위 휴게소를 잠시 들렀다가 바로 고산서원(高山書院)으로 달렸다. 백송현 선생이 가져온 참외와 블루베리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남안동 IC로 들어선다.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과 ‘몽실언니’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을 이야기하였고, 답심 인솔자인 이한방 교수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학문과 함께 병호시비(屛虎是非)에서 고산서원이 가졌던 위상을 이야기하였다. 기대를 갖고 고산서원에 도착하였으나, 향도문(嚮道門)은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 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건물 안을 보던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머금고 귀래정(歸來亭)으로 달렸다. 그러나 귀래정의 문도 잠겨있었다.
법흥사지 7층 전탑과 임청각(臨淸閣)
이런 관계로 첫 답심지는 안동 임청각 앞의 법흥사지(法興寺址) 7층 전탑이 되었다. 안동지역에는 유독 전탑(塼塔)이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낙동강의 홍수를 예방하고, 지기(地氣)를 지켜주는 비보탑(裨補塔)으로 세워지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말 안동부사였던 양희(梁喜)는 철저한 유학자였는데, 임하사(臨河寺)에 있던 거대한 전탑을 헐어 안동객사(安東客舍) 대청에 깔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안동에서는 관청의 건물이 불타고,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양희는 안동부사에서 파직되었고, 안동은 부(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후 안동사람들이 전탑의 비보 기능을 믿게 되면서 탑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쇠락한 법흥사 터에 고성이씨 종택을 지으면서도 탑을 그대로 놔둔 것도 전탑의 비보 기능 때문이라 보기도 한다.
법흥사지 7층 전탑의 기단부를 살펴보니, 완전한 모습은 아니나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四天王)의 형상이 보인다. 탑신부(塔身部)에는 보수하면서 새로 넣은 벽돌이 보이고, 옥개(屋蓋) 부분에는 기와가 일부 남아있다.
전탑을 본 우리는 옆에 있는 임청각(臨淸閣) 군자정(君子亭)에 올랐다. 벽면 위에는 고성이씨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의 훈장증과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가계도, 사진 등이 걸려있어서 박물관의 전시실 같은 느낌이다. 벽면에는 시판(詩板)도 많이 걸려있었는데, 고국을 떠나면서 지은 석주 이상룡의 시가 기억에 남는다.

석주 이상룡의 거국음(石洲 李相龍의 去國吟)
임청각은 조전 전기에 건축된 귀한 고건축물(古建築物)이다. 이를 증명하는 건축 양식이 바로 영쌍창(靈雙窓)과 독립창호(獨立窓戶)인데, 거의 같은 시기에 건축된 임연재종택(臨淵齋宗宅)에서도 볼 수 있다. 해설사님은 철도가 건설되기 전의 임청각 사진을 보여주면서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설명을 한다. 임청각 바로 앞에는 낙동강(洛東江)이 흘러가고 있는데, 일제(日帝)가 건설한 철도가 임청각과 낙동강 사이를 막아버렸다. 이것은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석주 이상룡에 대한 일제의 치졸한 보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치암고택(恥巖故宅)과 학봉 묘소
임청각을 나와 간 곳이 치암고택이었다. 고향인 등재를 오가면서 수없이 봤던 간판이 ‘치암고택(恥巖故宅)’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 치암고택은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가야 할 곳이 많았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비 오는 날 묘소에 가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한방 교수는 얼마 걷지 않는다면서 가자고 한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신도비 주변은 잘 관리되고 있었다. 거대한 귀부(龜趺) 위에 거대한 비신(碑身)이 눈에 들어온다. 비신은 이수(螭首)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신도비각 왼편 뒤로 조금 올라가니 학봉 묘소가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묘방석(墓傍石)이다. 다른 분들의 묘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인데, 학봉 김성일의 이력이 짧은 글로 축약(縮約)되어 있다. 원래 무덤 자리에서 나온 돌이라 하는데, 왼쪽 부분에는 세로로 타원형의 구멍이 있다. 돌을 떼어내기 위해 작업한 흔적인 것 같다.

학봉 묘소의 묘방석(鶴峯 墓所의 墓傍石 )
학봉 김성일은 퇴계학맥(退溪學脈)을 계승하였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임란(壬亂) 전에 통신사(通信使)로 다녀와서 선조(宣祖) 임금에게 정세를 올바르게 보고하지 못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임란 때, 경상도의 의병 활동을 사실상 총지휘하면서 임란 극복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백죽당 묘소(柏竹堂 墓所)
학봉 묘소를 본 후 와룡면 가수천(嘉水川)에 있는 백죽당(柏竹堂) 묘소로 향했다. 백죽당 배상지(柏竹堂 裵尙志)는 정평공 손홍량의 외손(外孫)으로 두문동(杜門洞) 72賢에 속하는 분이다. 백죽당 묘소는 일제 때 건설된 철로로 인하여 경운기 한 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 때문에 15세기 초에 건립되었던 가수천재사(嘉水川齋舍) 효사암(孝思庵)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여 쓰러질 듯 위태롭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약속한 대로 철로(鐵路)가 옮겨지고,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면 제대로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가 조금 내리는 날씨에 효사암 왼편의 오솔길을 따라 묘소에 올랐다. 묘소 앞에 서니, 갑자기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진다. 먼 후손(後孫)이 산소를 찾았음을 알고 반겨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같이 간 이한방 교수와 백송현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소에 배례(拜禮)하였다. 묘소는 매우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잡풀 하나 없이 푸른 잔디가 덮여 있었는데, 풍수(風水)를 공부한 백송현 선생은 터가 매우 좋다고 말씀을 한다.
안동문화원에서 1994년에 펴낸『安東의 墳墓』를 보면, 책 표지 사진으로 백죽당 묘소의 묘비(墓碑)가 소개되고 있다. 편저자는 서주석(徐周錫)인데, 이 비석을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묘비(墓碑)로 소개하고 있다.
오래된 비석이라 글자를 제대로 판독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安東의 墳墓』에 비석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내용은 간략한데, ‘有明永樂十二年甲午正月二十二日丁酉通訓大夫判司僕寺事興海裵公尙志之墓 一男伊川監務權 二男兵曹佐郎桓 三男成均學諭楠 一女四男成均幼學杠’이다.

백죽당 배상지의 묘비(柏竹堂 裵尙志의 墓碑)
보통 비문은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는 ‘朝鮮’ 대신에 ‘永樂’이 들어가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조선을 인정하기 싫어하였던 백죽당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묘소는 아래 위로 2기가 있는데, 위는 백죽당의 묘이고, 아래는 배위되씨는 안동권씨의 묘이다. 안동권씨의 묘비는 마모(磨耗)가 심하여 글자를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묘소의 형태는, 앞부분은 일자(一字)로 쌓은 돌이 보이고, 뒷부분은 일반적인 묘처럼 둥근 형태이다. 책을 보니, 이것이 고려시대 묘제(墳墓)의 모습이라고 한다.
가수천 백죽당 묘소를 나온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안동 시내를 돌아다녔다. 안동 구시장(舊市場 ) 찜닭 골목에서 찜닭을 먹으려 하였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여 빙빙돌다가 결국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뒤죽박죽으로 나오는 바람에 식사시간이 많이 길어졌다.
임연재종택(臨淵齋宗宅)
식사를 마치고 임연재종택(臨淵齋宗宅)으로 향했다. 임연재 종택은 금역당(琴易堂) 혹은 백죽고택(栢竹古宅)으로 불린다. 임연재 배삼익의 불천위 사당이 있는 집이기에 임연재종택, 두문동 72현인 백죽당 배상지의 종통(宗統)을 잇는 집이기에 백죽고택이라 하고, 임연재의 아들 금역당 배용길이 정한 당호에 따라 ‘금역당(琴易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임연재 종손은 예고없이 방문한 손님을 사랑 대청으로 안내하고, 윗대의 조상과 종택의 구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임연재 종택은 1558년에 세워진 집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조선 중기의 건축물이다. 현재의 종택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만, 전해오는 ‘구가도(舊家圖)’를 통해 옛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종택은 원래 위치하였던 도목리(桃木里)가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면서 이곳 안동대학교 옆으로 이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중엽에 세워진 임연재 종택에서는 조선전기 목조 건축의 양식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쌍창과 독립창호이다. 또 2층 누각형(樓閣型) 건물의 흔적도 살필 수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기 전의 종택 평면도인 구가도(舊家圖)

조선전기의 건축 양식인 독립창호(獨立窓戶)
임연재 종택을 나온 우리는 안동대학교 옆 원룸촌 옆에 위치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묘를 참배하였다. 척암 김도화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命)의 문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한말 의병장이었다. 원룸촌에 둘러싸인 한말(韓末) 의병장의 묘소는 쓸쓸하였다.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묘
이것으로 더운 여름날의 안동 답사는 끝났다. 답사를 마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덥고 습한 날씨였기에 체력의 소모가 심하여 답사를 계속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대구로 오면서, 우리는 9월 답심계획을 의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