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
유배지에서 쓰는 편지
양재일 (시인, 본지 주간)
나이 들어갈수록 예전처럼 사람을 만날 때의 설렘은 없어지고 지인과의 만남조차도 아버지의 잦은 전근 때문에 초등학교를 몇 군데 옮겨 다니며 낯선 교실 한구석에 앉아있던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격조했던 지인이 밥 한 끼 하자고 해도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거절을 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빈자가 되고부터는 자격지심에서 오는 모멸감 같은 것이 만남의 후유증으로 오래 남아 가급적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풍경마저도 떼고 살아가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갈수록 내가 만든 벽 속에 갇혀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말수가 적어지다 보니 뇌가 텅 비어버린 듯한 공허감에 초음속으로 치매가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사실 몇 달 전부터는 한 달에 한두 번은 보는 지인인데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낭패스러운 일도 있었고 어떨 땐 물건의 이름도 한참을 궁리해야 떠오른다거나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으면 열 번에 일곱 번은 태워먹으니 치매의 전조현상이 온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밤부터 장마가 온다는 예보는 불을 피울 가스라이터도 없이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부채질만으로 더위를 쫓던 예전에는 기상예보가 없어도 열 명쯤 아이를 낳은 뒤의 산후통에다 농사일로 삭신이 곯을 때로 곯아버린 할머니들의 몸이 곧 기상청이어서 삭신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면 아픈 만큼 비가 오고, 통증이 가라앉으면 하늘이 굽어 살피셔 빗속에 감추어두었던 태양을 꺼내어 눅눅해진 마음까지도 묵은 솜을 털어 지은 이불처럼 만들어주었는데 언제부턴가 인간들이 기계에 의존해 더위를 쫓기 시작하면서부터 신이 빚어놓은 만년설이 녹기 시작했는데 인간의 게으름과 오만에 분노한 하늘이 단죄라도 하듯 요즈음은 장마기간 내내 해를 보여주는 은총에는 인색한 것 같습니다.
어젯밤엔 일기예보의 정확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장맛비가 양평 내 유배지에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백년이 훨씬 넘은 집이라 가끔은 비가 새기도 해 장마 때마다 불청객은 사절한다며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막으로 가라”는 부적을 붙여놓지만 장마는 저승사자처럼 찾아와 물의 무서움과 해의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가진 자보다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슬프게 하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한 달에 서너 번 서울행을 하는 나의 첫 행선지는 언제나 동묘역 주변 벼룩시장입니다. 거기서는 주로 헌 책을 사지만 때로는 이천원짜리 중국산 돋보기를 살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가진 자들이 버린 허섭스레기 같은 물건을 살 때도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시집은 무조건 천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서점의 주인들은 창비니 문지니 민음사 등의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만든 시집들은 이천원, 마이너 출판사나 영세 출판사의 시집들은 천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노점에서 파는 시집들은 무조건 천원입니다. 그들은 시집 속의 정신적 세계를 음미할 여유나 출판사의 등급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나 같은 뜨내기 고객에게 자비를 베풀려고 천원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점포가 없는 그들에겐 천원을 받더라도 빨리 팔아버리는 것이 가난한 아내의 수심을 지울 수 있는 최우선의 일이기 때문에 천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벼룩시장에 쏟아지는 비는 점포를 가진 자의 비와 노점을 하는 자의 비가 각기 다른 질량으로 내립니다. 가진 자들은 며칠간의 장맛비를 신이 주신 휴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은 신의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는 체념이 빠릅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의 아내는 하루 이틀쯤은 남편을 위하여 쟁반이 넘치도록 부침개를 부칠 수 있지만 사흘이 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노란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차비가 있으면서 걸어가는 것과 차비가 없어서 걸어가는 것은 다릅니다. 내일 애인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여자가 바라보는 달과 신혼여행에서 신부가 바라보는 달은 다릅니다. 양평 산골 유배지에서 맞는 나의 장맛비는 작년처럼 또 나에게 하안거를 명령하고 묵언수행을 하게 할 겁니다. 그러나 고승대덕의 자발적인 수행도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번뇌 때문에 깨달음의 문을 넘기가 어려운데 나 같은 범인에게 장마는 문지방에 가기도 전에 내 뇌에 번뇌 바이러스를 가득 채워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장마를 신의 저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나에게 시를 쓰라고 주신 꿀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내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보름 전에는 시인정신을 만들 종잇값이라도 보태려고 공사판에서 일주일 동안 노동을 했습니다. 6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현장소장의 심부름으로 자재를 사러 면소재지에 다녀오다 돌이 갓 지난 것 같은 아이를 안은 채 뙤약볕을 맞으며 걸어가는 동남아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옆으로 아버지 나이의 주름 굵은 사내가 술을 마셨는지 불콰해진 얼굴로 주먹을 쳐들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죽이겠다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에게 그녀는 아내가 아니라 돈을 주고 산 물건이었습니다. 인적이 외진 곳에 가면 그 여자가 맞아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오래오래 지켜보고 서 있었습니다.
나는 여자에게 모성애란 족쇄를 만들어버린 신을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아이를 두고 부모가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남편의 호통에도 캥거루처럼 아기를 안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 젖가슴이 개복숭아 크기만큼도 안 되던 누이들이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몇 배나 커 보이던 미군을 따라 개망초밭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개망초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알았더라도……, 내 되바라진 조숙함까지 스팸메일처럼 기억의 휴지통에 넣어 씻고 또 씻었을 것입니다. 바람도 없는데 출렁거리던 개망초꽃의 미동이 멎으면 누이들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보물처럼 자존심과 맞바꾼 시-레이션을 가슴에 보듬고 나왔습니다. 누이들은, 우리들의 누이들은 산산히 조각난 하체의 뼈를 꿰맞추려는 듯한 걸음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나왔습니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나올 때는 초시계가 분침처럼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누이들은 시-레이션을 자주 주던 입술 두꺼운 흑인병사를 따라 국제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 집은 누이가 보내주는 미제 물건을 팔아 비만 오면 물바다가 되는 하꼬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키 작은 이주여성도 어린 날 우리들의 누이처럼 케이-레이션을 얻으러 이국땅에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난의 세습과 아버지 같은 남편의 폭력은 벗어날 길이 없는 것 같아 목울대로 침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2000년에 여섯 번째 시집을 내고 십 몇 년 동안 시집을 내지 못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출간은 못하고 함량 미달의 졸시들을 가슴 한켠에 묻어두기만 했습니다. 이번 장마 기간 중에는 신이 나에게 허락한 무인도에서 벌거벗고 시를 써야겠습니다. 그 키 작은 이주여성과 가난한 날의 우리 누이들의 이야기도 스무 편은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휘발 냄새를 풍기며 질주하는 미군 지프차를 마른버짐 핀 얼굴로 따라가며 헬로 기브 미 쵸코렛, 기브 미 추잉검, 기브 미 찹찹을 외쳐대던 비굴한 웃음의 약소민족의 아이들, 미국 어디 전쟁기념관에 걸려 있을지도 모를 내 모습을 그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