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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水原 華城,, Hwaseong Fortress)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 화성의 화서문
등록 구분 문화유산
기준 Ⅱ, Ⅲ
지정번호 817
지역 아시아·태평양
지정 역사1997년 (21차 정부간위원회)
웹사이트 화성 행궁 공식홈페이지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사적
종목 사적 제3호(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371,145㎡
시대 조선 시대
소유 국유
위치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좌표 북위 37° 17′ 16.11″ 동경 127° 1′ 5.99″좌표: 북위 37° 17′ 16.11″ 동경 127° 1′ 5.99″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입지조건 : 平地城, 山城, 平山城
平地城
백제 풍납토성, 경주 읍성, 언양 읍성
山城
包谷式 山城 : 집안 산성자 산성, 보은 삼면산성, 광주 남한산성, 목천 목천토성
山頂式 山城(테뫼식산정) : 부여 성흥산성, 예산 임존성, 함안 성산산성, 상주 견훤산성
複合式 山城 : 평양 대성산ㅁ성, 장안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平山城
고구려 장안성, 수원 화성
축성법
土城
⑴ 成土法 : 흙을 쌓아올리는 방식
⑵ 削土法 : 험준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기존의 지형을 깍아 내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
⑶ 版築法: 흙 등 재료를 다져서 층층히 쌓아 올리는 방법. 風納土城, 夢村土城, 공주 공산성, 부여 사비성
石城
⑴ 片築式(內托式) : 외벽만 석축을 하고 내측은 흙이나 돌로 채우는 방식
⑵ 夾築式 : 안팎 성벽을 모두 돌로 쌓는 방식
⑶ 퇴물림식 축성법 : 城壁, 角臺, 望臺 기단부에 큰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가면서 층마다 안으로 들여 쌓고 윗 부분은 수직으로 하는 방식. 고구려~조선.
土石混築城
⑴ 순수토석혼축법 : 신라 월성
⑵ 가운데는 토축 외면은 석축 마무리하는 방식
⑶ 가운데 석축 외면은 토축으로 마무리 하는 방식
塼築城
벽돌을 구워 쌓은 성. 조선 초기 일부 읍성, 수원 화성의 경우 여장, 옹성, 치등에 사용한 적은 있으나 성곽전체를 벽돌로 축조한 예는 없다.
1. 성곽(城郭)
군사적이고 행정적인 목적을 갖고 일정한 거주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구조적 연결성을 갖는 인공구조물
가. 군사적이고 행정적인 목적
성곽은 군사적 방어의 목적으로 축조되는데 방어해야 할 주된 대상이 국가권력의 행사 주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행정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나. 일정한 거주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군사와 행정의 기능을 수행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갖추어야 함을 뜻한다.
다. 구조적 연결성을 갖는 인공구조물
방어를 위한 폐쇄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구조물
2. 성곽의 기원
가. 유래
청동기시대에 등장하는 주거지를 둘러싸고 있는 방어용 시설인 해자(垓字, moat)와 목책(木柵, wooden fence)으로 기본적으로 방어시설이면서 동시에 인간집단의 거주공간으로서의 문화 영역을 구분하는 존재였다.
나. 해자(垓字, moat)(濠隍<호황>, 城地<성지>, 溝池<구지>, 塹壕<참호>
⑴ 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
⑵ 능원이나 묘의 경계
다. 木柵(목책, 木寨<목채>, wooden fence)
나무울타리. 울창(梐枑<폐호>)
문헌상 가장 오래된 성곽은 고조선의 도성인 왕검성(王儉城)이며 현재 평양의 일대로 비정되는데 정확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변진에는 성곽이 있고, 진한에는 성책이 있으며, 마한에는 성곽이 없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제3절 성곽의 구성과 방어 시설
1. 城壁 : 성의 담벼락(石築)
2. 城門 : 성의 문으로 외부와 출입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드는 시설(虹蜺門, 虹霓門)
虹蜺(虹霓, 홍예) 螮蝀(螮蝀, 체동) 채홍(彩虹) 珥蜺(이예) 천궁(天弓) 제궁(帝弓) 무지개
3. 城樓: 城閣
4. 甕城 : 성문 밖에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별도의 성
일자형, 장방형, 반원형, zigzag형
5. 將臺 : 전투지휘소, 성안의 가장 높은 곳이나 정문 근처에 배치
6. 敵臺 : 성문 주위의 雉(치)
7. 雉城(치성) :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을 장방형이나 반원형으로 돌출시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
角樓 : 성곽의 모서리부분에 설치된 치와 건물(수원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
8. 女牆(여장, 성가퀴, 城堞, 雉堞, 埤堄, 陴堄) : 군사들의 몸을 은폐하기 위한 시설로 성위에 덧쌓은 낮은 담. 평여장, 볼록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이 있다.
9. 眉石 : 女牆과 體城(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몸체부분) 성벽 사이의 납작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시설물(눈썹모양)
10. 垓字 : 성곽 주위를 자연하천이나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방어력을 높이는 시설. 월성 해자, 몽촌토성 해자
11. 烽燧臺 : 화성 봉돈. 서울 남산(木覓山) 봉수대
12. 水源施設 : 水口門, 排水口
13. 기타 건축물 : 관청, 주민 거주지
화성의 지도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km의 성곽(城郭)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甕城), 성문(城門), 암문(暗門), 산대(山臺), 체성(體城), 치성(雉城), 적대(敵臺), 포대(砲臺), 봉수대(烽燧臺)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목차
1. 축성(築城)
조선 후기 정조 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음력)에 준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擧重機)가 사용되었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轆輅)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는다.
보냈다고 한다.
2 방어 시설 48개
문(門)은 평상시에 출입하는 성문,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암문, 물이 흘러가는 수문으로 나뉜다.
가. 4대 성문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⑴ 장안문
수원 화성 장안문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 개의 적대(敵臺)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 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⑵ 팔달문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문으로,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좌우의 성벽이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축대 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 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한양도성의 흥인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 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2호로 지정되었다.
⑶ 창룡문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⑷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나. 수문
⑴ 화홍문밖에서 찍은 화홍문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화홍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수원8경>
제1경 광교적설(光敎積雪) - 광교산에 눈쌓인 모습
제2경 팔달청람(八達晴嵐) - 안개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
제3경 남제장류(南堤長柳) - 긴 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
제4경 화산두견(花山杜鵑) - 화산의 두견새 울음소리
제5경 북지상련(北池賞蓮) - 북쪽 연못의 흰색 붉은색 연꽃
제6경 서호낙조(西湖落照) -서호 노을에 드리운 여기산 그림자
제7경 화홍관창(華虹觀漲) - 화홍문의 비단결 폭포수
제8경 용지대월(龍池待月) -용지에서 월출(月出)을 기다리는 경치
⑵ 남수문
남수문(南水門)은 북수문과 마찬가지로 교량과 수문의 역할,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했다가, 이듬해 11월까지 공사를 중단되었다가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 (정조 20년) 1월 16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남수문은 화홍문과 마주서서 물줄기의 흐름을 인도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석축으로 9칸의 홍예를 틀고 철전(鐵箭)을 설치하여 잠가두는 것이 화홍문의 제도와 같았다. 남수문은 9개의 홍예문 위에는 통로를 만들고 여장을 높이 쌓았는데, 돌기둥 8개가 돌다리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또한 장포(長鋪)라는 전돌로 만든 긴 포를 설치했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로 해서, 이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많은 포혈을 설치하여 군사시설로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시는 수원 화성이 199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0년 9월부터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2010년 6월 공사를 시작한 남수문 복원사업은 길이 29.4m, 너비 5.9m, 전체 높이 9.3m로, 수문 아래쪽은 9칸 홍예수문(무지개다리)을 연결한 형태이고 수문 위쪽은 전돌을 이용해 원형 복원됐다.
대(臺)는 성문의 좌우에 솟아서 적을 감시하는 적대, 장수가 부대를 지휘하는 장대, 깃발을 흔들거나 쇠뇌를 쏘는 노대로 나뉜다.
다. 장대(將臺)와 노대(弩臺)
장대는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 같은 곳이다. 화성에는 서장대(西將臺)와 동장대(東將臺) 두 곳이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화성에는
서노대(西弩臺)와 동북노대(東北弩臺) 두 곳이 있다.
⑴ 서장대 (화성장대)와 서노대
① 서장대(화성장대)
서장대(西將臺)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扁額)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② 서노대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⑵ 동장대와 동북노대
① 동장대(연무대)
동장대(東將臺)는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② 동북노대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조 20년 4월 14일에 완공되었다.
돈(墩)은 감시를 하거나 포를 쏘는 곳으로 망루와 같은 공심돈, 봉화를 피우는 봉돈이 있다.
라. 공심돈(空心墩)
돈(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望樓)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중국의 병성인 '성서'(城書)에는 공심돈을 "벽돌로 3면에 섬돌을 쌓고 그 가운데를 비워 둔다. 가운데를 2층으로 구분하여 널빤지로 누(樓)를 만들고 나무사다리를 이용하여 위아래에 공안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불랑기나 백자총들을 발사하여도 적으로서는 화살이나 총탄이 어느 곳에서부터 날아오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⑴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⑵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⑶ 남공심돈 : 미복원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치(東稚) 위에 있는 공심돈으로, 1795년 (정조 19년) 10월 18일에 완공하였다. 현재 미복원 상태이다.
마. 암문(暗門)
암문은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이다. 화성에는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남암문, 서남암문 등의 5개의 암문이 있다. 하지만 남암문은 그 지역이 시가지화되면서 인멸되고 지금은 미복원 상태이다.
⑴ 동암문
동암문(東暗門)은 동북포루와 동장대의 중간에 있다. 성벽은 안쪽으로 굽어져 들어가 북암문과 같은 형태이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1796년 (정조 20년) 3월 25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⑵ 북암문
북암문(北暗門)은 동암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방화수류정 근처에 있다. 그 근처는 약간 골짜기진 곳이라서 밖에서 찾기가 어렵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1795년 (정조 19년) 2월 23일 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⑶ 서암문
서암문(西暗門)은 팔달산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입구가 꺾여 있어서 찾기 힘들다. 안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이고, 바깥쪽은 너비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정조 20년 6월 18일에 홍예가 이루어졌다. 문의 안의 높이는 높고 밖은 낮아 안에 계단을 설치해서 계단으로 내려가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암문은 북암문이나 동암문과 같이 성곽을 깊게 하여 암문을 설치하면 지형상 쉽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암문이 옆으로 틀어 앉혀져 있어서 암문을 쉽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암문의 안팎에다 평여장(平女牆)을 설치하였다.
⑷ 남암문 : 미복원
남암문(南暗門)은 남공심돈 근처에 있는 암문으로,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⑸ 서남암문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보통 다른 암문과는 달리 서남각루(西南角樓)로 나가는 암문으로서 유일하게 암문 위에 포사(鋪舍) 1칸이 세워져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6일에 암문의 홍예가 이루어졌다.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대고 바깥쪽 문에다 짐승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누(樓)는 주변을 한눈에 바라보는 각루, 포를 쏠 수 있게 튀어나온 포루(砲樓),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포루(鋪樓)의 3가지로 나뉜다.
바. 각루(角樓)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⑴ 동북각루 (訪花隨柳亭)
동북각루(東北角樓)는 화홍문 바로 옆에 있으며, 용연(龍淵)이라는 연못 위에 있다.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도 아름다워 '방화수류정'이라고도 한다. 1794년 (정조 18년) 9월 4일에 공사 착수, 10월 7일에 상량했으며, 10월 19일에 완공했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⑵ 서북각루
서북각루(西北角樓)는 화서문 옆에 있으며, 동남각루와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완공되었다.
⑶ 동남각루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⑷ 서남각루 (華陽樓)
서남각루(西南角樓)는 서장대와 팔달문의 중간지점 서남암문에서 용도(甬道)를 통해 뻗어나간 외성의 끝 부분에 있으며,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한다. 1796년 (정조 20년) 4월 16일에 공사 착수, 7월 13일에 상량했으며, 7월 20일에 누각의 준공되었다. 서남각루는 용도 끝에 있어서 화성 방어를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구실을 하게 하였다.
사. 봉돈(烽墩)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壁城)에는 총안(銃眼)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자.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포루(砲樓)는 포병용 진지로 벽돌로 짓고 포루(鋪樓)는 보병용 진지로 치성 위에 지은 목조 건물이다.
⑴ 포루(砲樓)
포루(砲樓)는 성벽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塼石) 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① 남포루
남포루(南砲樓)는 팔달산 중턱 서남암문 근처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9일에 준공되었다. 구조는 동북포루와 거의 동일하다. 여장에는 타구(垜口)와 전안(箭眼)을 뚫었고, 타구의 안에는 전판문을 달았다. 마루, 지붕 등의 구조는 서포루와 비슷하다. 남포루에는 대포와 혈포가 각 2대, 총안 19개가 설치되어 있다.
② 동포루
동포루(東砲樓)는 봉돈의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7월 16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3중층으로, 정면 1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하층과 중층의 벽은 돌출부 3면을 전축했고, 성내측면은 석축으로 했으며, 외부의 포혈과 총안을 두었다. 상층 여장의 타구(垜口, 垛口) 및 전안(箭眼)은 서포루와 비슷하다.
③ 북동포루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장안문과 북수문 사이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3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2중층이며, 도리는 납도리이고 홑처마의 5량 구조이다. 포루 밖으로는 우진각지붕을 안으로는 박공지붕으로 하였다. 하층의 중간에서 중층 및 상층에 계단을 설치해서 위아래로 돌아다닐 수 있도로 했다. 그 외는 북서포루와 비슷하다.
④ 북서포루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이며 성 위로는 최상층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포혈, 총안, 여장, 타구, 전안 및 출입문의 구조는 서포루와 동일하다.
⑤ 서포루
서포루(西砲樓)도 북서포루와 마찬가지로 서장대의 북쪽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5월 30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3중층 건물이나 성내의 지반면 위로는 회상층의 1층 누각만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납도리 홑처마이며 3량의 우진각지붕이다.
⑵ 포루(鋪樓)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인데 이것을 포(鋪)라고 한다. 이것은 치성의 군사들을 가려 적이 아군의 동향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운 성제의 하나이다. 화성에는 동북포루(東北鋪樓), 동일포루(東一鋪樓), 동이포루(東二鋪樓), 북포루(北鋪樓), 서포루(西鋪樓)등이 있다.
① 동북포루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도 불린다. 동북포루는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 준공되었다. 3면의 치성(雉城)이 성 밖으로 돌출되었고, 하부 1.46m까지는 석축을, 위에는 전축을 했으며, 상부에 여장을 쌓았다.
② 동일포루
동일포루(東一鋪樓)는 창룡문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1796년 (정조 2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3칸의 중층으로 3량의 우진각지붕을 갖추었다. 하층 주위의 3면은 여장으로 둘려져 있고, 원근총안(遠近銃眼)을 내었다. 상층 동측 2칸은 마루를 갈고 1칸은 통 2층으로 하여 목조 사다리를 설치하였다.
③ 동이포루
동이포루(東二鋪樓)는 봉돈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층누각 밑에는 총안을 뚫어 놓았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3일에 준공되었다. 포루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이고 처마는 홑처마에 납도리를 썼으며, 지붕틀은 5량의 우진각지붕이다. 하층의 총안 등은 동북포루와 동일하다.
④ 북포루
북포루(北鋪樓)는 서북포루와 서북공심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5년 (정조 19년) 2월 20일에 준공된 것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 내면 3칸의 규모이며, 중층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처마는 홑처마에 민오리집이며, 상층에는 주위에 전판문을 달았다.
⑤ 서포루
서포루(西樓鋪)는 서장대 남쪽 서암문과 서삼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1796년 (정조 20년) 8월 18일에 준공되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이나 동측면은 1칸으로 된 중층이다. 내면은 나무사다리(木梯)를 사용하게 되어 있으며, 민도리 5량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이외에도 성벽에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도록 튀어나온 치성(雉城), 군사가 머무르며 기거하는 포사(鋪舍)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은 우리나라에서 수원 화성이 유일하다.
차. 치(稚)
치는 철(凸)자 모양으로 성벽 밖으로 돌출시켜,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 시설물 중 하나이다. 치라는 이름은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한다는 까닭에서 그 이름을 땄다. 화성에는 남치(南稚), 용도일·이치, 서일치(西一稚), 서이치(西二稚), 서삼치(西三稚), 동일치(東一稚), 동이치(東二稚), 동삼치(東三稚) 등이 있다.
카. 적대(敵臺)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팔달문과 장안문 좌우에 설치된 방어 시설물로서 구조와 기능은 치와 비슷하다. 장안문으로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북동적대(北東敵臺)가, 팔달문에는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가 있지만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는 시가지화와 더불어 인멸되어 현재는 미복원 상태이다.
⑴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北西敵臺)는 장안문의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⑵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는 현안과 총안을 두어 성문과 옹성을 방어하던 곳이다.
⑶ 남서적대(南西敵臺) :미복원
남서적대(南西敵臺)는 팔달문 옆 팔달산쪽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⑷ 남동적대(南東敵臺):미복원
남동적대(南東敵臺)는 남수문에서 팔달문 사이에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았다.
3. 기타 시설
가. 여민각
여민각(與民閣)은 화성 중심부에 있는 종각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다가 2008년 복원됐다. 이름은 시민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붙였다. 12월 31일 밤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야의 타종 행사가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3]
나. 성신사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다. 효원의 종각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 만들었다.
사진 모음
안쪽에서 본 장안문 야경
안쪽에서 본 창룡문
2010년 11월, 보수공사 중인 팔달문
장안문
화홍문
수원 화성과 주변 궁의 모형
안쪽에서 본 봉돈
화성 성벽의 일부분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위에서 본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
서북각루
북암문 밖의 모습
동암문의 안쪽 모습
안쪽에서 본 서남암루
방화수류정과 연못
동장대
서장대
화성장대
치에 있는 홍이포
화서문
화성의 내부
화성의 모습
화성의 성벽
화성에서 본 수원
정조대왕상
포구
3.이동 ↑ 박장희 기자 (2009년 12월 4일). “수원화성 ‘화성행궁’·‘여민각’”. 수원일보. 2011년 2월 28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Portal icon 한국 포털
Portal icon 역사 포털
Portal icon 문화유산 포털
도서[편집]
1. 최홍규, <<정조의 화성 건설>>, 일지사, 2001
다큐멘터리[편집]
1. <<KBS 2013 대기획: 의자, 8일간의 축제>>-2013년작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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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 화성
2.축조과학
정조가 꿈꾼 새로운 조선, 화성
수원 화성(사적 제 3호)은 팔달산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젊은 실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화성의 설계를 맡아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서양의 건축을 참고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패기와 기중기, 녹로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건설된 주요시설물로는 문루와 옹성을 갖춘 4대문과 행궁, 암문, 수문, 연못, 장대, 공심돈, 각루, 포루, 봉돈, 궁대, 치성, 용도, 적대 등 48개소이다.
축조과학
수원 화성은 그 계획부터가 새로웠다. 정약용은 화성을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지이면서도 견고한 성을 쌓았다. 도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궁과 ‘十’자로 잘 뻗은 신작로는 인적 · 물적 교류가 활발한 상업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성벽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게 옹성, 장대, 봉수대, 포루, 각루 등 성벽을 따라 40여개의 방어 시설물을 배치하였다. 또 당시의 전투는 화력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성벽위의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곳곳에 총구멍(총안)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했었다.
당시 화성 건설에서 근대적 과학정신이 표현된 것은 거중기이다. 거중기는 정약용의 독창적인 설계로 만든 것으로 무거운 물건을 작은 힘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게 만든 기계장치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개발했는데, 정약용의 거중기는 중국의 것보다 4배 정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모두 11대로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성벽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벽돌이라는 흙으로 만든 신소재가 함께 사용되었다. 벽돌과 석회를 섞어 성벽을 쌓으면 화포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어 당시 화력을 바탕으로 한 전투에서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이에 화성 축조이후,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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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城郭)의 구성
우리나라의 성곽(城郭)은 일반적으로 관청을 포함한 시가지 전체가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형태는 평상시 주민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지키는 읍성일 때나 유사시에 대비해서 산 속에 세우는 산성일 때나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성곽은 우선 크게 주위를 둘러싸는 탄탄한 성벽과 외부와의 통로가 되는 주요 관문인 성문, 그리고 성벽에 부가하는 여러 가지 방어시설로 나눌 수 있으며, 전란을 겪으면서 병기의 발달과 함께 성곽의 재료와 축성술, 방어력과 공격력 등이 크게 발전되었다. 우선 높게 쌓은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킨 치(雉)의 기원은 멀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는 전방과 좌우편에서 성 밑으로 접근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잘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17세기 이후 읍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설치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특히 화성성곽에서 치를 도입하고 여기에 군인들이 머물 수 있는 포루(鋪臺)나 적루(敵樓) 같은 시설물을 적극적으로 세워 성곽의 기틀을 마련했다.성벽 위에는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인 여장(女墻, 성가퀴)를 두었다. 높이는 약1~1.35m, 평균 1.2m 정도로 쌓았으며, 옹성(甕城) 등 필요한 곳에서는 보통 사람 키보다 약간 높은 1.8m 정도로 할 때도 있다. 길이는 3m 정도이며 여장과 여장 사이에 약간의 틈을 두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여장 하나를 1타(?)로 표기하고 여장과 여장 사이의 일정간격 마다 활이나 총쏘기에 편리하도록 위로 틈을 두어 타구라 하였다. 여장의 두께는 보통 70~90cm이다. 여장은 타구를 둔 요철여장(凹凸女墻)과 타구가 없는 연속여장(連續女墻)이 있다. 타구와 타구 사이에 쌓은 벽을 타첩이라 하며 모두 여장으로 불리고 평여장(平女墻), 철형여장 (凸形女墻), 원여장(圓女墻)이 있다. 또한 쌓는 재료에 따라 돌여장(石女墻)과 벽돌여장(塼女墻)으로 나뉜다.여장에는 좌우 중간에 밖을 내다보고 총이나 활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냈는데 이것을 총안(銃眼)이라고 하며, 구멍의 경사도에 따라 근총안(近銃眼)과 원총안(遠銃眼)으로 나뉜다. 그리고 대포를 쏘는 구멍을 포혈(砲穴)이라 하고 화살을 쏘는 사혈을 전안(箭眼)이라 하는데 총안이나 포혈, 전안 등을 총칭하여 사혈(射穴)이라 한다. 총안과는 달리 공안(空眼)은 노대(弩臺)나 공심돈(空心墩)의 각 돌출벽면의 상하로 뚫어 놓은 구멍으로 바깥의 동정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돌에 구멍을 뚫은 것을 혈석(穴石)이라 하며 그 구멍을 석안(石眼)이라 한다. 석안의 모양은 대개 정방형인 방안(方眼)과 원안(圓眼)으로 한다. 성벽 위의 시설물과는 달리 성벽에 수직으로 길게 구멍을 낸 현안(懸眼)이라는 것도 두는데, 이것은 성벽에 바짝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성벽에 치를 두고 위에는 여장 또는 성가퀴를 두는 것, 총안과 포혈, 전안, 공안, 현안 모두가 성곽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높이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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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성성벽(華城城壁)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指定)되었다, 둘례 5, 743m, 길이 5, 220m, 높이 4, 9m ~ 6, 2m이며 면적(面積)은 18만 8,048㎡ 인 수원성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華山) 아래(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와 봉담면 와우리)가 그 중심이었으나 정조가 1789년(정조 13) 그의 생부(生父)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을 양주(楊洲) 배봉산(拜峰山)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정조대왕은 수원부에 10만냥을 하사하여 집값과 이사비용을 보상하여 읍치(邑治)(관아)와 민가들을 수원 팔달산 아래로 집단(集團) 이전 시키었고 신 읍치에 거주하게 될 주민에게는 10년 동안 면세 해택을 주웠다,
정조는 부친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華城遷都)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築城工事)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 중공하고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는 (註1)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註2) 채제공(蔡濟恭)이 성역(城役)을 주관하고 (註3) 조심태(趙心泰)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優雅)하고 장엄(莊嚴)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돌이 많이 있다는 채제공의 보고에 의해 부근 화서동 숙지산(熟知山)과 여기산(麗妓山) 팔달산에서 뜯어내 돌을 즉석에서 3등급으로 나누어 대석은 한 덩이가 한 수례 중석은 두 덩이가 한 수례 될 수 있도록 규격을 통일하고 석재나 목재(木材)등은 바퀴 달린 수례와 바퀴 없는(통나무 바침대) 두 가지 기구가 쓰였으며 채제공과 정약용의 의해 설계된 (註4) 거중기(擧重機)와 대거(大擧)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성을 쌓았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 돌을 뜬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화성은 돌로 성곽(城郭)을 쌓은 석성이다, 네 개의 대문과 5개의 암문(暗門)이 있으며 두 곳의 수문(水門)(북수문(화홍문) 훼손(毁損) 된 남수문(지동시장 입구부근) 이 있다, 대문으로는 장안문(북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甕城)(성을 지키기 위해 항아리 단면 같은 모양)을 둘러 적이 쉽게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곽에는 장대(將臺) 2개 (지위소가 있는 사령부) 공심돈(空心墩) 3개(속이 비었다 하여 공심돈 지금의 초소와 같은 것) 봉돈(烽墩) 1개 (봉화를 피워 신호를 전하는 통신소)노대(弩臺) 2개 (성밖의 동태를 살피는 지휘소) 각루(角樓) 4게(휴식을 즐기거나 주변을 감시하는 정자 같은 곳) 적대(敵臺) 4개, (성문 좌우에 높게 돌출된 감시소) 포루(?樓) 5개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초소) 포루(砲樓) 5개 (화포로 적을 공격하는 공격소) (합 10개) 치성(雉城)(꿩은 제 몸을 풀슾에 잘 숨기다하여) (10개) 포사(?舍) 3개 (각 방향의 경계를 맡은 군사가 성 밖이 위급한 사정을 대포로 시호를 보내는 시설물 일부 미 복원)등 적의 침입을 방지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1997년 12월 24일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 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 화성(華城)의 수난기(受難記)
19세기 이후 국권(國權)이 쇠퇴(衰頹)하면서 방치되어 조금씩 훼손(毁損)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제에 의해 화성과 화성행궁은 파괴되기 시작 하였다, 해방 후 민족 분단의 비극(悲劇)인 한국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전쟁의 포화(砲火)속에 몇몇 시설물만을 남긴 채 원래(元來)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 복원(復元)과 미래(未來)
화성은 1964년부터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그 후 1975년부터 5년 동안 실시된 복원 공사로 옛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그리고 화성 행궁은 1995년부터 발급을 시작하여 2002년 대부분의 건물이 복원되어 제 모습을 갖추었다, 앞으로 화성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사업은 꾸준히 추진될 정망이다,
(註1)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정약용은 화성 축성을 계획한 실학자이다, 정조대왕의 각별한 총애(寵愛)를 받은 정약용은 화성 행차시 한강을 건너는데 쓰였던 배다리를 설계하였다 또한 새로운 성곽을 축성하는 방안을 연구하여 제출 하였고 실제 축성과정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서양식의 과학서적(科學書籍)을 참고하여 기중도설 등의 원리를 바탕으로 거중기 등의 새로운 장비들을 만들었다,
(註2)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
채제공은 남인(南人)의 영수(領袖)로서 정조대왕의 왕권 강화에 절대적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초대 화성 유수로서 신도시 건설을 주관하여 화성유수부를 한성부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화성축성이 시작되자, 최고 책임자인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축성 전반을 지휘하였다, 채제공은 화성을 쌓는데 총책을 맡고서 빨리 서두리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의 원칙을 세워놓고 작업을 했다,
(註3) 조심태(趙心泰) (1740 ∼ 1799)
총리대신(總理大臣) 아래에서 실제 공사를 총괄하는 감동당상(監董堂上)(총리대신 아래직위)은 당시 화성(華城) 유수(留守)로 재임(在任)하던 조심태가 임명되었다, 조심태는 축성을 감독하는 이 외에도 채제공에게 수원의 번영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수원의 자급자족의 경제활동이 가능한 신도시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정조대왕은 조심태 노고(勞苦)를 치하하여 1795년 원행(遠行) 때 당상관으로 품계(品階)를 올려 주었다,
(註4) 거중기(擧重機)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다산(茶山) 정약용이 고안(考案)한 기계(機械)로 1792년 수원 화성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原理)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物件)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요즈음 크레인 같은 것
☞ ? (2) 화성 미복원(未復元) 시설(施設) 현황(現況)
화성 성곽 5, 743m,와 48개 시설물이 있었으나 미복원 시설은 성곽 일부 팔달문 관광안내소에서 남수동 지동시장입구 수원천 까지 약 500m와 남암문, 남수문, 은구, 연못, 남공심돈, 팔달문 좌우의 남서적대, 남동적대, 중포사등 7개소이다, 또한 현존하는 41개의 시설 중에는 원형은 11개, 복원된 시설은 30개이다, 성내시설 중에서 미복원 시설은 중영(中營), 이아(貳衙)(감영이 있는 곳에 군아), 별효사청, 별궁관청, 강무당행각(講武堂行閣), 무고행각(武庫行閣), 수송고, 별주, 분봉상시, 연못 3개(북지, 남지 동지) 감옥1, 군무소1, 수문청4, 창고5, 수직청(守直廳)등 22개 시설이다, 성외시설 10개 중에서 미복원 시설은 지소(紙所), 사직단, 영화역등 3개이다,
이들 미복원 시설이 복구 되지 않은 이유는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화성 성벽에 붙여 있는 북은구(北隱溝)와 같이 화성복원공사 당시에 위차가 확인되었으나 당시에 주변 환경이 바뀌어 불필요한 시설로 인정되어 복원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남수문과 남암문, 남공심돈, 적대, 남은구(南隱溝)등은 복원당시 수원시의 중심시가지로 상설(常設) 시장화(市場化)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벽을 복원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성벽 자체를 복원하지 않아 현재까지 미복원 시설로 남아있는 것이다, 셋째 연못과 포사(鋪舍)는 성벽과 떨어져 있는 시설물로 복원당시에도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實情)이었으므로 복원에서 제외된 시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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