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1980년대 말, 동구사회주의의 연쇄적 붕괴를 바라보면서 세계의 지성인들이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을 때도 만하임은 그것이 새로운 갈등과 균열의 시작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하임의 불후의 명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는 집단경험과 집단의식의 상호충돌을 촉발하는 사회학적, 철학적 지도에 계급이념은 단지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탐험적 질문과 답변으로 가득차 있다. 그의 사상은 결코 완결된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좌절의 연속이었다. 후세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패배가 예상되는 지적 모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터득할 수 있다는 역설이 이처럼 실감있게 느껴지는 사상가도 드물 것이다. 지식, 인식, 인지라는 철학적 연구대상에 사회학의 옷을 입히려 했던 철없어 보이는 시도로부터 '지식사회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영역이 태어났다. 그것은 세계관의 충돌과 이로부터 유래하는 인류사회의 분쟁을 인식론의 혁명으로 포용하려 했던 유럽 주변국 태생의 어느 인텔리겐치아의 정신적 무기였다.
다빈치의 그림이 왜 현대인에게도 감동을 주는가라는 물음에 맑시즘은 침묵할 수밖에 없음을 일찍이 간파한 만하임은 곧 터질지 모르는 이데올로기의 분화구에서 열광의 춤을 추던 '1914년 세대'에게 국가, 민족, 사회, 계급과 같은 사회적 실체에 얽매이지 말고 '존재'라는 더욱 넓은 영토로 나가기를 권했다. 사르트르와 까뮈가 존재의 바다에서 허무와 부조리를 만났다면, 만하임은 존재로부터 연유하는 문화와 정신(Geist)의 궤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박한 실증주의로 파괴된 이 시대의 문명을 주관적 문화와 치열한 정신세계로 구제할 수 있다는 확신은 루카치와 같은 '1914년 세대'의 공통적 출발점이었지만, 철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던 만하임은 출발과 동시에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로 접어들었다. 존재와 인식의 상호관계, 그가 후에 존재구속성(Seinsverbundenheit)이라고 부른 인식의 고향과 저항의 메카니즘을 루카치의 관념론, 알프레드 베버와 짐멜의 문화이론으로 투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맑스를 넘어서고자 했던 그의 정신과학적 탐험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 투사의 미학은 현대사상의 두 축인 관념론과 실증주의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상호주관성을 통한 '담론세계의 이해'라는 20세기 최대의 화두에 가장 냉철한 출구를 만들어 주었다.
산업사회의 합리성과 대중사회의 비합리성이 빚어내는 문화적 불협화와 정신적 피폐를 구제하려는 '시대진단학'이 나치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건너간 망명지식인의 시대적 사명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식론 혁명에서 사회재건, 시대진단학을 거쳐 민주적 기획에 이르는 그의 사상적 궤적은 1946년 런던대학 교육연구소에서 출간된 '사회학과 사회재건의 국제총서'로 집약되었다. 사회철학에서 정치윤리학, 실천과 행동의 사회학으로 나아갔던 만하임의 사상은 도덕교육을 실천(praxis)의 중핵으로 보는 프랑스 사회사상과 맥이 닿고, 지적 영혼에 예술적 형식과 품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독일 관념론의 주지주의적 전통과 내통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 시절 그의 은사였던 막스 베버가 '상호이해'의 공간으로 관념론과 실증주의의 충돌을 끌어안았듯이, 만하임은 에토스에서 문화와 정신, 정신의 힘에서 기획의 실천 공간으로 상호충돌하는 세계를 포용하고자 했다. 상호이해의 가장 중요한 기제로서 '의사소통'과 '화용문법'을 강조하는 하버마스의 지혜가 담론세계의 분열과 그 근거를 파헤쳤던 만하임의 무모한 모험에 빚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적 난투장이었던 20세기의 타락한 문명세계를 지키고자 했던 파수꾼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인텔리겐치아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이었음을 운명적으로 체득했던 사상가였다. 21세기에 세계화 기치가 크게 외쳐질수록 만하임의 지혜는 새롭게 살아날 것이다. (송호근/서울대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