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터 안녕하세요. 오민애입니다. 오늘은 대한제국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환구단과 경운궁 탐방을 통해 대한제
국의 수립 과정과 정책에 대해 살펴볼 예정인데요.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장소인 환구단부터 함께 둘러보실까요?
본래 풍작과 비를 기원하는 제천의례를 지내던 환구단.
우리나라에서는 농경생활을 주로 하던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었고
고려 성종 때부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환구단은 조선 세조 때 폐지되었다가
고종 황제 때 다시 설치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황제가 되었음을 하늘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황제, 즉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동아시아의 관례를 따른 것이었는데요.
자, 그럼 황제국이었던 시절을 반증하는 역사현장인 환구단,
이곳이 품고 있는 역사는 어떤 모습일지 함께 만나보시죠.
<황궁우>
리포터 안녕하세요. 이곳은 황궁우입니다. 어떤 건물인가요?
전문가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황제가 되었음을 하늘에 알리기 위해서 환구단을 설치했습니다. 환구단은 (이쪽에 있었
는데요) 현재는 헐려서 없어졌고, 이 건물은 그 부속 건물로 제사 때 쓰이는 조선 황실의 위패,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로 1899년에 설치한 건물입니다.
리포터 대한제국을 선포했었어야만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죠
전문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그 당시에는 사실은 그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이런 게 있어서 조선왕
조의 질서는 이미 해체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해서 뭔가 근대적인 국가가 세워져야 하는데 고종으로서
는 1년 동안이나 러시아 공관에서 기거했었고.... 이런 생활에서 돌아와서 새롭게 정국 운영의 의지를 다지면서 근대국가
의 모습을 갖춘 강력한 대한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 때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이 되었음
을 대내외에 알리는 이런 행사를 이곳에서 치르게 됩니다.
<돌북>
환구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본래 역할 외에도
고종이 보다 강력한 국가를 꿈꾸며
황제 즉위식을 했다는 상징적, 정치적 의미를 품은 공간.
그런 역사현장에 직접 서 보니
이 장소에 담겨진 의미 치고는 규모가 조금은 작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리포터 대한제국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는데요. 이 황제를 표방하는 것은 중국의 영향일까요 아니면 근대 서구화의 과정이었
을까요?
전문가 대한제국이 황제를 칭하고 환구단을 쌓아서 하늘에 알리는 행사를 치른 것은 중국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동
아시아 관념 내에서는 중국의 황제, 즉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 낼 수 있다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종
이 중국에서 벗어나서 황제를 칭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관념에는 이제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관념에서 벗어나서
서양 여러 나라, 서구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면서 대한제국도 근대국가로 가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황제라는
칭호 자체는 중국 고대에 있는 것이지만 대한 제국의 황제를 칭한 관념 자체는 근대국가 체제로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
니다.
리포터 고종의 자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데요. 즉위식이 어떻게 진행됬는지 궁금합니다.
전문가 고종이 이곳 환구단에서 하늘에 황제로 즉위함을 알린 다음에 즉위식 자체는 경운궁으로 돌아가서 경운궁 중화전 앞에서
치릅니다. 근대식 방식은 아니고 나중에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서양 열강의 여러 나라의 외교관을 초청하여 즉위 기념
식을 하려는 의지는 있었어요. 여러 재정 부족 등으로 즉위 기념식이 연기되다가 최소되었지요.
<석조 정문> ...(환구단과 조선호텔 사이에 위치)
리포터 환구단의 위치는 왜 이곳으로 결정되었나요
전문가 원래 이 환구단이 설치된 이곳에는 조선시대에는 남별궁(태종의 둘째 딸 부부가 기거)이 있었어요. 공주가 살던 집인
데 선조 이후에는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묵었습니다. 중국에서 벗어나서 황제를 선포하는 마당에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묵었던 남별궁의 터에다 환궁우를 설치한 것은 이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그만 두고 뭔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서 근대
국가로 가겠다는 의지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이제 덕수궁으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별첨>
<석조전>
리포터 덕수궁은 대한제국에서도 중심적인 공간이라고 들었습니다. 정궁이 아니었음에도 황제의 뜻을 펴기에 적합한 공간이었
는지 궁금한데요.
전문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1년 동안이나 있다가 경복궁이 정궁인데도 그곳으로 가지 않고 이곳 정동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
궁을 한 이유는 당시에는 주변에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또 서양 선교사, 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공
간이었습니다. 근대국가로서 대한제국이 뜻을 펼쳐 나가기 위해서는 서양 열강들하고 교섭을 활발하게 펼쳐야 하는데
이곳 경운궁이 그런 외교를 펼치기에 매우 적절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리포터 아 그런 뜻이 있었군요
전문가 그럼 이제 중화전으로 가보실까요
리포터 네 그러실까요
<중화전>
대한제국의 정전인 중화전
이곳에서는 임금님이 하례를 받거나 국가행사가 거행된 장소인데요
2단으로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품계석과 삼도를 설치하는 등
전통 궁궐의 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리포터 덕수궁의 중심건물인 중화전... 당시 대한제국의 중요 정책은 무엇이었습니까?
전문가 대한제국은 부국강병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광무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토지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측량한 광무
양전지계사업을 했구요. 그 밖에 서울에 근대적인 시설인 전차가 다니게 한다거나 자력으로 철도 일부구간 개설, 근대적
인 회사나 은행을 설립해서 상공업을 진행하는 식산흥업정책을 다양하게 펼쳤습니다.
이와같이 추진되었던 광무개혁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됩니다.
보수파에 의해 추진된 갑오 을미개혁을 답습한 것이었지만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며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리포터 조금은 낯설고 어색했던 대한제국이었는데 지금은 익숙해진 느낌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
를 내리신다면?
전문가 광무개혁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오랜 논쟁이 있었습니다.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이부은데 비하면 뚜렷한 성과가 없었
다 하는 부정적 평가하고요. 또 한편에서는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가 주도해서 자주적인 근대화 개혁을 하
려고 했다고 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긍정적 평가가 있습니다. 근대화 개혁의 실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이 되고
있는 편이지요. 다만 한계를 지적하자면 이 개혁의 추진 주체가 고종황제와 그 주변의 소수세력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 많은 예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제의 군사적
침략을 막지 못했던 점. 그런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리포터 말씀 감사합니다. .... 환구단과 덕수궁을 통해 살펴본 대한제국의 설립과정과 당시 정책들, 어떻게 보셨나요? 역사현장
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때마다 너무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충대충 의미를 부여했던 자신을 생각하며 반성을 해봅
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는 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에 대한 필수 덕목은 아닐까 생각
해 봅니다.
(한국산업기술대 서영희교수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