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또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입니다. 요한은 안나스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나스의 관저에 예수님이 잡혀갔는데도 아무 거리낌없이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잡혀간 안나스의 관저에 데리고 들어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잡혀갔다고 해서 그 제자들도 잡혀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잡혀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본문 앞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로마 군인들에게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라고 하셨고, 또 9절에서 여기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러므로 베드로의 부인은 우리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안 많은 목회자들이 베드로를 겁장이로 표현하면서 그 역시 잡혀갈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설교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맞을까요? 물론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놓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나 요한과는 달리 베드로는 이미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칼로 벤 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잡혀갈 수도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요한을 따라서 안나스의 관저로 들어오는 베드로를 본 문지기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라고 질문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잡혀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요한처럼 너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도 잡혀가지 않고 그곳에 있는 상황 속에서 문을 지키는 여종은 요한을 통해 들어오는 베드로를 보며 그에게 "아~ 너도 이 사람(요한)처럼 예수님의 제자구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절)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25절)
여기에서 "너도"(also, καί)를 뜻하는 '카이(καί)'라는 헬라어는 '그리고(and)' '역시(also)' '둘다(both)'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역시(also)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서 “나는 아니라”라고 부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번째로 앞에서 언급했던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안나스를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괜찮겠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칼로 자르기도 했기 때문에 잡혀갈 위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 실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그렇게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죽은 사람도 살리고, 장님의 눈도 뜨게 했고, 수만명을 먹이셨던 그 기적을 한 번만 보이면 살아날 수 있는데 전혀 기적을 행하지 않고 힘없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며 너무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동안 예수님을 왜 따라다녔는지를 그의 부인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거에 예수께서 이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뒤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는 관심도 없고,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에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이며, 누가 더 높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로마의 속국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유다 마카베우스와 같은 메시야를 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베었던 것은, 자기가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무언가 기적적인 일을 행하셔서 로마 군인들을 무찌르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상상을 하고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가 목숨을 걸고 6백명이 넘는 로마 군인들 앞에서 용기를 내어 칼을 휘두른 것을 보신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책망하셨고, 그가 휘두른 칼에 다친 사람의 귀를 온전케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잡아가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 동안 자기가 원했고 소망했던 메사야는 저런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에 칭찬을 받았지만, 그 뒤에는 계속해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책망을 받기도 하고 '사단'이라는 소리도 듣고, 인간적으로 무시를 당해왔습니다. 자기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라고 하시며 자기의 충성을 받아주시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장61절 이하를 보면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께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예수님를 치며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 좀 해봐라"라고 희롱했습니다. 즉 눈을 가린 상태에서 때렸으니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보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했기 때문에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으니 맞추어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예수님께서 참으셨고, 그때 베드로가 두번째 부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뒷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그리고 저렇게 말씀만 하시고(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고 당하기만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실망과 좌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동안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꿈꿔왔던 그 모든 비전과 소망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인간적인 배신감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 중의 왕이신 분이 어떻게 저렇게 힘없이 끌려갈 수가 있지? 어떻게 저렇게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왜 가만히 계시는거야? 죽은 사람도 살리셨던 분이 왜 저러셔야 하는데?,,, 계속 저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뭐지? 3년 동안 따라다녔던 것이 모두 물거품처럼 날아가버리는 건가?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지?"... 대충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 보다는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서 모욕을 당하는 그런 메시야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토록 예수님을 3번이나 즉 완전하게 부인했던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목적이 예수님의 목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하여 너무나 실망할 때, 뭐라고 합니까? “나 그 사람 몰라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 자식간에도 “너는 내가 몸으로 낳기만 했을 뿐, 더이상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네~ 이제 아버지도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하며 인연을 끊자고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부인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예수님을 저는 모릅니다. 저는 그런 예수님을 따라다닌 게 아니에요. 제가 생각했던 메시야는 기적을 행하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분이었지, 저렇게 힘없이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인생을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과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꿈꾸는 비전은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고 건강하게 고통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까? 삶 속에서 너무나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올해를 보내면서 진정으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무 교회나 나가서 한 번 예배 드리면,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리도 가깝고, 편하고, 내 기분을 만족시켜주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는 그런 교회를 가서 편한 의자에 앉아서 좋은 교훈같은 말과 잘 될 것이라는 축복의 메세지만 듣고 오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또 하나의 내가 만든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일 뿐입니다. 예배는 결코 편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반드시 나의 희생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제물"이 무엇입니까? 제물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합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야 한다는 것이며,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편하고 자기 취향에 맞는 교회를 골라서 다니면서 "교회 쇼핑"이라는 새로운 단어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목적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부귀영화와 행복을 얻기위해 따라다녔고, 예수님은 이세상에서 자기를 죽이는 훈련을 통한 연단과 더불어 핍박을 겸한 복을 받아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시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나 역시 제자들처럼 내 욕심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해 온 것이 아닌지 반드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만 합니다.
만약 바쁘다는 핑계로 점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매순간 삶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순간,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싶어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계신 예수께서 살아서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데, 내가 죽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내 삶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에게 향했던 손가락을 나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모든 제자들에 대해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든 제자의 대표로 기록된 것이며,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크리스천의 대표로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바로 우리이며 '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를 손가락질 해왔다면, 그만큼 여러분의 속에는 회개해야 할 것이 많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여러분 자신을 성경이 거울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반드시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오늘 지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호흡을 거두어가시면 우리는 그저 흙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먼지같은 존재들이 무슨 비전이 그렇게 크고, 무슨 계획이 그렇게 많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그저 사역을 하라고 하시면 하면 됩니다. 지금 고난을 받으라고 하시면 고난을 받으면 됩니다. 지금 기쁘게 찬송하라고 하시면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면 됩니다. 그런데 흙 먼지들이 뭐가 잘났다고 자기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지식과 지혜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다른 흙덩어리를 비난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뜻까지 마음에 드네 안드네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은 이렇게 했느냐,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불평과 원망을 합니까? 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개미들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개미 중에 어떤 개미가 자기가 더 잘났다고 여러분 앞에서 뻐긴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거기서 거긴데... 라고 하지 않을까요? 개미들이 아무리 훌륭한 집을 짓고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개미의 집과 음식을 보며 감탄이 나올까요?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힘 안들이고 지어줄 수 있고, 음식도 공급해줄 수 있다고 개미들에게 말하지 않을까요? 겨우 그런 집을 짓겠다고 그렇게 고생하며 머리를 굴려서 사기치며 살아가냐고 하지 않을까요? 그것보다 훨씬 훌륭한 집과 훨씬 좋은 음식을 한 순간에 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약 불개미들이 집안에 들어올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밟아서 죽이거나 약을 뿌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불개미들이 불개미를 죽인 것을 잔인하다고 항의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핍박과 고난과 자기부인을 해야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인생이지만, 그 길이 좁고 협착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지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죽은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미들이 사람 앞에서 잘난척하는 것과 똑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밟아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알 수 없고 집안에 들어온 것은 죽여야 하는 그러한 개미와 같은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저 대신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그 은혜를 오늘 깊이 묵상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베드로가 바로 저였음을 알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은 빠르면서도, 또한 크리스천이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말은 잘 하면서도 정작 저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도 완전하게 성경대로 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답답해서 자꾸만 제 입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도 안된다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언행을 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마찬가지일텐데, 저는 저 자신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그것을 깨닫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향하던 손가락이 저에게만 향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주님의 말씀 앞에 저 자신을 비추어보며 정결한 신부로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죽을때까지 성화되어가야 한다는 말을 오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가르치려고 했고, 자꾸만 비판하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는 자는 그 비판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마귀에게 속아서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똑바로 살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는 모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누구보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살도록 저를 이끌어주옵소서.
그래서 항상 저 자신을 부인하며 저를 죽이는 가운데, 제 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저를 죽이는 가운데, 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빛이 드러나며 저를 죽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저를 통해 풍겨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저를 통하여 주께서만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